서경IN 사외칼럼

종의 기원 [김다은의 웹소설]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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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종의 순서



일의 목표나 방향은 우두머리가 정한다. 여태 그것은 단테의 역할이었다. 오늘은 달랐다. 좀 전에, 생명의 포대기를 안은 자가 서슴없이 일당의 방향을 결정했다.

“메종으로 가. 메종!”

홉이 그렇게 소리쳤을 때, 단테는 명령의 서열이 한순간에 뒤집힌 것을 알았다. 홉의 결정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마치 어디로 가야 하는지 미리 정해둔 사람 같았다. 홉을 무시하던 로깡도 아무 말이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앤드류는 홉의 권위에 순종하듯이 물었다.

“홉의 집으로?”

메종은 집이라는 뜻이었다. 홉의 집에 가면 우유며 아기 옷들이 있을 테니 좋은 선택이었다. 단테는 어림없다고 생각했다. 홉이 일당을 자신의 집으로 끌어들일 사람이 아니었다. 여태 그런 여지를 보인 적도 없었고, 특히 아이가 생기고 난 뒤로 더욱 경계했다. 앤드류의 질문에 놀란 것은 도리어 홉이었다. 홉은 이전의 단테처럼 단호하게 명령했다.

“대문자!”

대문자 집(Maison)은 일당만의 은어였다. ‘푸른 감자의 집’을 약칭해서 메종이라 불렀다. 푸른 감자를 수확하는 집이었다. 홉이 하필 그곳을 선택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다른 곳이어야 할 것 같은데, 단테는 다른 곳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죽은 자의 뼈를 수송할 때는 목적지가 분명했다. 하지만 아기의 생명을 구할 미지의 방향은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다. 죽음과 관련된 결정과 달리, 생명과 관련된 결정은 더없이 막막했다. 홉이 단테의 마음을 꿰뚫듯 말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순간 갈림길이 나타났고, 앤드류는 메종의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푸른 감자의 집으로! 잘라보면 푸른색이 도는 감자들이었다. 땅의 특징 때문에 그런 색깔을 띠었다. 최근에는 보라색이나 노란색 감자도 시장에서 볼 수 있지만, 단테의 형이 푸른색 감자를 처음 수확했을 때는 팔 수 없는 종이었다. 그런데 푸른 감자를 먹으면 약한 몸이 빠르게 회복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근처에서 찾는 사람들이 생겼다. 일당은 겉으로는 푸른 감자를 키우고 수확하는 평범한 일꾼들이었다. 단테는 아기를 ‘푸른 감자의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 최선인지 확신이 없었다. 그 ‘메종’이야말로 아기에게는 더없이 위험한 곳이었다.

“여기 잠깐 세워 줘!”

저만치 주유소와 잡화점이 보이는 곳에서 홉이 갑자기 요구했다. 무슨 일인지 다들 긴장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테도 왜 그러냐고 물을 여유가 없었다. 차를 세우자마자, 홉은 아기를 로깡에게 맡기고 서둘러 내렸다. 차의 앞문을 열더니, 단테에게 아까 자신이 바닥에 던졌던 돈을 돌려달라고 했다. 이것이 무슨 술수인가 싶어 단테는 얼굴을 험악하게 찡그렸다. 마치 우두머리가 총무에게 돈을 정산하라는 식이었다.

“아기에게 먹일 것을 사야 해요. 빨리 서둘러요.”



단테는 그제야 홉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급하게 돈을 주섬주섬 꺼냈다. 홉이 바닥에 던져 꾸겨진 지폐 두 장과 자신의 지갑에서 제법 큰 금액의 몇 장을 꺼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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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씨! 자주 올 수 없을 테니 필요한 것을 한꺼번에 사도록 할게요. 물건을 가지고 나오면 바로 싣고 갈 수 있도록 잡화점 뒤쪽에 차를 세워두도록 하세요.”

홉은 단테에게 지시하고, 아기용품을 사기 위해 달려갔다. 단테가 그의 달리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앤드류가 말을 걸었다.

“언제 잡화점 뒤쪽으로 이동해야 하나요?”

홉이 사라지자 기존의 서열이 다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기다려!”

단테는 속으로 언제부터 서열이 뒤집혔을까를 생각했다. 10분 전만 해도 홉은 오늘 받은 일당(日當)을 던지고 일당(一黨)에서 달아나던 도망자였다. 그런데 달아나던 사람을 중간에서 태우고 아기를 안겼을 때, 그는 달라졌다. 아기 포대기를 품에 안자 그는 여태 보이지 않던 결단력과 행동력을 발휘했다. 홉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앤드류와 로깡도 아기를 발견할 때부터 달라졌다. 그들도 단테를 두고 먼저 아기를 안고 달아났다. 그렇게 발이 빠른 놈들인 줄을 처음 알았다. ‘죽은 자를 위한 예의의 시간’에서 관의 마지막 뒷정리를 단테가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죽음의 덮개를 닫는 것은 서열상 꼴찌가 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홉 대신 단테가 닫았다. 그때부터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종의 순서가 달라졌다.

“이제 차를 이동시켜.”

앤드류는 주유소를 지나 잡화점 뒷문 쪽에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게으르고 느려터진 앤드류의 예전 모습이 아니었다. 이전 앤드류는 무감각하고 자기 의견을 내는 적이 좀체 없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표현할 줄도 몰랐다. 한데, 아기의 울음을 들었다고 말할 때부터 눈빛이 달라졌다. 살아 있는 아기를 버려두고 갈 것이냐고 버틸 때 그는 변했다. 그는 죽은 자의 뼈가 아니라 살아 있는 아기를 안고 나오는 시간을 지나왔다. 자신의 의견이 단테에게 먹힌 아주 강렬한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꼬박꼬박 지시해주어야만 했던 이동 경로를 스스로 결정하기 시작했고, 그는 달라졌다.

“홉이 나타났어요.”

앤드류가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다. 뒤쪽의 로깡은 아기를 안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단테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로깡에게 몸을 낮추라고 말하고, 자신도 그렇게 했다. 앤드류가 서둘러 홉이 사 온 물건들을 받아서 뒤쪽에 싣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집이 제법 날쌔게 움직이는 모습이 신이 난 사람 같았다. 다시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급하게 시동을 걸었다.

뒤쪽에, 홉이 아기를 건네받는 모습이 거울에 비췄다. 홉은 30초만 기다리라고 했다.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쉬운 위치인데, 홉은 포기하지 않았다. 로깡은 홉이 사 온 물건들을 이리저리 들춰보며 대기 상태였다. 홉이 요구한 이 절체절명의 30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테는 깨달았다. 형의 삶과 죽음의 갈림길의 몇 분과 같은 시간일 것이다. 단테는 아기에게 뭔가를 먹이는 듯했다. 잠시 후, 다시 달리라고 지시한 것은 홉이었다.

단테는 혼란한 마음에 뒤쪽을 돌아보지 않고, 가슴에 걸리는 일을 생각했다. 무엇보다 지금 단테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구하지 못한 죽은 자의 뼈였다.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 실패한 일을 복구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지금 새로운 시체를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공작을 새로 꾸미려면 최소한 한 달 이상 필요했고, 그것도 극히 조심해야 했다. 더구나 교통사고로 부서진 시체를 구하는 일은 운이 극히 좋아야 했다. 슬그머니 아기의 엄마가 떠올랐다. 지금쯤 단단하게 못질을 당한 관이 묘지로 가고 있을 터였다. 푸른 감자가 심긴 들판 가운데 길로 앤드류가 차를 몰아 들어가고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 …



김다은은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덕중의 정원’ ‘훈민정음의 비밀’ ‘쥐식인 블루스’ 등 20여권 소설책을 출간하고, 다수 번역돼 해외 소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를 비롯, 청송 객주 문학관,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레지던시, 해남 인송문학촌 토문재 레시던시에 참가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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