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전력망 선진국으로 손꼽힌다. 촘촘하게 구축된 전력망의 총 연장이 3만 7000여 ㎞로 지구 둘레(4만 ㎞)와 비슷하다. 독일에서도 소음·오염, 경관 훼손 등으로 주민들의 전력망 구축에 대한 거부감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력망 구축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권의 협조 덕분이었다. 주에서 개별적으로 추진해왔던 전력망 계획을 2011년 연방정부로 일원화한 전력망구축법을 제정한 게 큰 힘이 됐다. 연방네트워크청에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면서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전력망을 빠르게 확대했다. 미미한 경로 변경에 대해선 환경영향평가를 생략해 사업 속도를 높였다. 토지 소유주가 원활히 협조할 경우 더 높은 보상금을 주는 법도 마련했다고 한다.
전력은 이제 우리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공기 같은 존재가 됐다. 가정에서는 에어컨·컴퓨터·냉장고·TV 등 수많은 전자제품이 전기를 이용하고 있다. 일터에서는 전력이 공장을 돌리고 사무실을 밝힌다. 전기는 친환경 사회 건설과 첨단산업 육성을 위한 필수적인 존재로 부상하고 있다. 주요 국가들은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분야 등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전력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반도체 공장은 전기와 물 없이 돌릴 수 없고 AI도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릴 정도로 전기를 많이 쓰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가 문재인 정부의 탈(脫)원전 강행 상처 극복에 나서면서 발전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고 있다. 기후변화에 대응해 원자력과 재생에너지 발전을 믹스해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면 된다. 문제는 이렇게 발전한 전기를 소비자들에게 전하는 전력망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주민들의 반대와 지방자치단체의 안일한 태도 때문에 전력망 구축에 제동이 걸리는 일이 허다하다. 동해안(울진)~수도권을 연결하는 초고압직류송전선로(HVDC) 건설은 2008년 발표됐지만 16년이 지났는데도 철탑 하나를 세우는 데 머물고 있다. 이 선로 끝에서 수도권에 전기를 배분해줄 동서울변전소의 증설은 ‘하남시의 반대’에 발이 묶였다. 이로 인해 동해안의 멀쩡한 석탄발전소들이 송전망 부족으로 가동하지 못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원자력·태양광·풍력 발전 등 우리나라의 발전 설비는 동·남부 지역에 집중돼 있다. 전력 수요가 많은 수도권 등으로 송배전돼야 하지만 아직도 전력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정부도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지난해 독일처럼 국가기간 전력망을 깔 때 국가의 책임을 늘리겠다고 밝혔다. 국민의힘은 이런 상황을 감안해 6월 22대 국회의 1호 법안으로 범부처 전력망위원회 신설, 인허가 특례, 보상 확대 지원 등을 골자로 하는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을 발의했다. 21대 국회에서 회기 종료로 자동 폐기된 법안을 다시 발의한 것이다.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도 김정호·정진욱·김한규·안태준·이상식 의원 등이 전력망 구축을 지원하는 법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전력망 확충 특별법은 아직도 제대로 논의되지 않아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여야 간 의견 차이도 크지 않다. 탄핵·특검 몰이, 입법 폭주 등을 둘러싼 여야 정쟁으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21대 국회에 이어 22대 국회에서도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부족한 전력망은 저성장 시대에 직면해 절박해지고 있는 첨단전략산업 육성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대규모 전력망 투자를 서두르지 않으면 각국의 기후 공약이 달성된다고 해도 글로벌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15% 부족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전력망 구축은 가정과 일터는 물론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모든 곳에 연결돼 있다. 대표적인 ‘먹사니즘’ 정책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당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먹사니즘’을 우선하겠다고 강조해왔다. 민주당이 전력망 구축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여야는 비록 정치적 문제에서는 싸우더라도 ‘먹사니즘’과 관련한 민생·경제 살리기 문제에서는 머리를 맞대 해결책을 찾고 이를 뒷받침하는 법안 통과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송배전망 건설을 위한 입법을 서두르지 않은 탓에 가정과 공장의 전력 공급이 갑자기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과연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