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IN 사외칼럼

종의 기원 [김다은의 웹소설] <8회>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 추정돼 가장 오래된 성경책(히브리어)로 평가받는 ‘코덱스 사순’의 모습. 로이터연합뉴스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 추정돼 가장 오래된 성경책(히브리어)로 평가받는 ‘코덱스 사순’의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8. 태초에



수년 전, 한 대형서점에서 <책을 제대로 읽는 방법>을 강연하면서 나는 유명해졌다.

기존의 독서법은 엉터리였다는 말이 방송을 탔기 때문이다. ‘내’ 기존 독서법을 말한 것이었다. ‘내’를 뺀 문장이 전파를 타자, 한국인의 기존 독서법은 엉터리라고 사람들은 알아들었다. 나의 독서법을 취재하고 싶다고 연일 요청이 쇄도했다. ‘엉터리’라는 표현은 영어의 ‘broken’과 같아서 어긋한 독서라고 대강 알려주었다. 이때부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나에게 좋은 제안과 승승장구할 기회가 줄지어 들어왔다. 나에게 ‘독서의 신’이라는 타이틀을 선사하기도 했다.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어난 일이었다.

‘내’를 바로 잡을 필요가 없어서 그간 내버려 두었다. 그 우연찮은 사건이 세계적인 작가와 대담을 나누는 영광스러운 자리까지 나를 인도했다고 여겼는데, 동시에 내 인생의 가장 곤욕스러운 자리로 나를 초대했음이 비로소 깨달아졌다. 이 쪽팔리는 대담이 어디까지 나를 끌고 갈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진퇴양난이었다.

‘이런 상황을 가장 간단하게 해결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나는 표지 문구의 출처와 의미를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기로 작정했다. 솔직함은 때로 어떤 무기보다 강하다. 내 유명세에 타격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죽을 쑤고 대담을 끝내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한 인간의 솔직함과 허약함은 도리어 반전 매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그런 영리한 계산 끝에 막 고백하려는 순간이었다. 화면 속에서 작가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태초에, In the beginning….”

작가의 입에서 갑자기 영어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뭐지? 왜 갑자기…영어를! 세 단어의 위력이 상당히 컸던 모양, 막 용기를 내려던 솔직함이 내 안으로 쑥 들어갔다. 말문이 떨어지지 않았다. 프랑스인은 유난스럽게 자국의 언어를 사랑한다. 상품을 팔기 위해 외국 바이어를 상대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특히 사교 생활에서는 프랑스어가 자랑이자 특권이었다. 프랑스인 작가가 전 세계로 방영될 대담에서 ‘교양 없이’ 영어를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반복했다.

“태초에 In the beginning, 생명의 체계가 이미 설계되어 풀 한 포기도 이 종에서 저 종으로 바뀔 수 없습니다.”



그는 ‘태초에’라는 세 단어만 영어로 반복하고 뒷부분은 프랑스어로 이어갔다. 나는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했다. 독서의 신은 그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태초에’로 시작하는 책은 이 세상에 오로지 한 권뿐이다. 프랑스어로 들을 때는 ‘시작에’로 해석해서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영어로 들으니 ‘태초에’로 들렸다. 표지 문구의 어투만 보아도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책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읽는 그 책이었다. 작가는 영어로 그 책을 암암리에 나에게 알려준 것이다. 나는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은커녕, 더 굴욕감을 느꼈다. 지혜로운지 교활한지 가늠할 수 없는 작가의 눈을 도전적으로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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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를 알아도 표지 문구의 모순적인 표현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 문구를 다시 떠올리자마자, 눈에 보이지 않는 칼처럼 뭔가가 나를 겨냥해서 섬짓했다. 『인공낙원의 문』에서 단테는 무리의 우두머리였고 홉은 단테의 명령을 따르는 신출내기였다. 하지만 관 속의 아기를 구하는 순간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변했다. 홉이 아기를 품에 안는 순간부터, 단테가 아니라 홉이 명령하는 우두머리로 바뀌었다. 나와 작가의 관계가 마치 단테와 홉과 같았다. 대담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그의 작품을 한국에 소개하는 사회자이자 이 행사를 진행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 질문에 그럴듯한 대답을 해가며 자신의 책을 한국 독자에게 어필할 수밖에 없는 종속된 관계였다. 그런데 표지 문구의 비밀 때문에, 그는 홉처럼 상황을 끌고 가는 우두머리로 우뚝 섰다. 나는 죽음의 관을 마지막에 덮던 단테로 전락한 셈이다.

나는 이 변화의 원인에 주목했다. 나는 여태 책을 정복하는 심정으로 다독(多讀)을 해왔다. 타고난 능력이기도 했고, 가정교육에 따라 의무적으로 읽어내야 하는 책들과 아버지를 따라 여러 나라를 떠돌며 섭렵한 다양한 책 종류 때문이기도 했다. 마치 운동선수처럼 독서로 나를 단련했다. 읽을수록 지식도 늘고 사회생활에도 도움이 되니 꿩 먹고 알 먹기였다. 그런데 표지 문구의 비밀에 의문을 품자, 어디서 불어 왔는지 알 수 없는 바람이 독서의 신을 사정없이 무너뜨리고 있었다.

『인공낙원의 문』의 관에 일그러진 여자의 시체가 들어 있었다면, 내 몸의 관에는 읽었던 책들의 파편들이 들어 있었다. 나는 여태 마약처럼 복용한 책의 중독자였던 셈이다. 책들의 종이었다. 그 결과로 그 책들을 쓴 사람들의 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저 화면 속 작가의 종이 되어 이처럼 끌려다니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대처 방안이 없었다. 단테가 그러했듯이, 생명의 비밀을 품은 작가 앞에서 나는 마비된 듯 침묵을 지켰다. 다행스럽게도, 말하기 좋아하는 프랑스인답게 작가는 계속 떠들어 대고 있다.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바뀔 수 없는 이유는 생명의 비밀이….”

순간, 나는 드디어 반격할 하나의 단서를 찾아내었다. 굳은 표정이 저절로 풀면서도 입도 풀렸다.

“관에서 구한 아기에게 악당들이 지어준 이름 말인데요. 그 이름이 표지 문구의 비밀을 풀 열쇠이지요?”

▶다음 회에 계속 …



김다은은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덕중의 정원’ ‘훈민정음의 비밀’ ‘쥐식인 블루스’ 등 20여권 소설책을 출간하고, 다수 번역돼 해외 소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를 비롯, 청송 객주 문학관,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레지던시, 해남 인송문학촌 토문재 레시던시에 참가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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