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투기 자본에 날개 달아줄 상법 개정안

정철 한국경제연구원장





최근 행동주의 펀드의 국내 기업에 대한 위협이 증가하고 있다. 행동주의 펀드가 개입한 한국 기업은 2019년 8개사에서 2023년 77개사로 9.6배 급증했다. 이는 조사 대상 국가 23개국 중 세 번째로 높은 증가율이다.

행동주의 펀드를 비롯한 투기 자본은 단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행동주의 펀드가 주주가치 제고와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시킨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허울 좋은 명분에 불과하다. 행동주의 펀드의 기업 경영권 위협이 들불처럼 번지는 현실 앞에서 기업들의 걱정이 커지고 있다.



최근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지배구조 법안들은 행동주의 펀드와 같은 해외 투기 자본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이사의 충실 의무를 주주로 확대하자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감사위원 분리 선임 확대,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 과거에 이미 결론이 난 중고 법안도 다시금 부활해 발의돼 있다. 하나같이 기업을 협박해 단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투기 자본의 무기로 악용될 소지가 있는 법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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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현 제도하에서도 투기 자본이 단기 수익을 거둔 후 ‘먹튀’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대주주 의결권 3% 제한 제도를 악용해 1조 원에 달하는 이익을 얻은 후 국내에서 철수한 2003년 소버린, KT&G의 집중투표제 도입을 이용해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사외이사를 선임하고 10개월 만에 1500억 원의 시세차익을 얻고 한국을 떠난 2005년 칼 아이컨 사례는 너무나 유명하다.

올해도 국내 대표적 행동주의 펀드인 KCGI가 DB하이텍의 지배구조 개선을 주장하다가 느닷없이 보유 주식을 주가 대비 12.6% 높은 가격에 DB하이텍에 되팔아 차익을 실현했다. 그 과정에서 주가는 장중 6% 이상 하락해 소액 투자자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현재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주요 기업의 외국인 지분율이 50%를 넘기 때문에 지배구조 규제를 섣불리 강화했다가는 국내 투자자보다 해외 투기 자본이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감사위원 전원 분리 선임과 집중투표제가 의무화되면 자금 동원력이 큰 해외 투기 자본이 이사회를 장악한 후 자산 매각, 자사주 소각, 배당 확대를 입맛대로 결정해 손쉽게 이익을 거둘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기업의 장기적 성장은 기대하기 어렵다. 해외 투기 자본은 수익을 거둔 후 한국을 떠나면 그만이기 때문에 기업의 장기적 성장에 관심이 없지만 국내 투자자, 특히 일반 소수 주주들은 우량한 국내 투자처를 영영 잃게 될 수도 있다.

투기 자본의 경영권 공격에 대항할 수 있는 기업의 방어 수단은 자사주가 유일하다. 이미 경영권에 대한 공격수와 수비수 간 균형추가 중심을 잃은 상황에서 상법 개정을 통해 경영권 공격수에게 더 많은 무기를 쥐어주면 한국 기업은 해외 투기 자본의 손쉬운 사냥감이 될 것이다.

국회 계류 중인 지배구조 규제 강화 법안은 전 국민이 바라는 주식시장의 밸류업과는 거리가 있다. 우리 기업에 치명적일 뿐 아니라 경제 전체의 ‘밸류다운’을 초래할 것이다. 이제 논의의 초점을 바꿔 우리 기업이 경영에 전념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만드는 데 모든 지혜를 모아야 한다.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날아야 하는 것은 투기 자본이 아니라 건강한 우리 기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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