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부자들도 등급이 있어요. 학벌이나 직업이 필요 없는 ‘넘사벽’이 있고 그 아래가 우리가 흔히 아는 의대 열풍의 대치동 사람들이죠.”
서울 강남구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토박이 박 모(39) 씨가 보는 최상류층은 직업이 없어도 초호화 소비가 부담스럽지 않은 ‘찐부자’들이다. 이들은 부모는 역삼동 단독주택에 살고 자신들은 압구정동 아파트에 살면서 여러 채의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 ‘그들만이 사는 세상(그사세)’에서 오래 거주한 그는 주로 미국에 거주하면서 날씨에 따라 강남을 오간다. 이들은 “자녀에게 결핍을 가르치고 싶다” “직업을 가져봤으면 좋겠다”면서도 실제로 소비를 줄이거나 취업을 하지는 않는 대신 인문학 모임을 가지면서 결핍을 채우고 있었다. 이들은 “아이들 힘들게 의사를 뭐 하러 시키나. 변호사는 나한테 술 따르는 사람”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강남 집중이 심해지면서 최상류층이 자신들을 나머지 계층과 구별 짓는 사회적 현상은 소비 전반에 드러나고 있다. 코로나19 기간 반짝했던 명품 소비는 최근 전반적으로 감소했지만 최상류층의 구매력은 더욱 강해졌다. 명품 브랜드와 백화점들이 슈퍼리치 대상 마케팅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서울경제신문이 24일 백화점 3사 점포 중 강남 지역에 위치한 신세계(004170) 강남점, 현대 압구정점, 롯데 잠실점의 명품 매출 증가율을 분석한 결과 3개 점포 모두 급격하게 감소했다. 신세계 강남점의 경우 2021년 명품 매출 증가율은 전년 대비 39.6%에 달했으나 올 들어 9월까지는 전년 동기 대비 13.1% 증가하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현대 압구정점은 40%에서 13.2%로 줄었고 롯데 잠실점은 40%에서 5%로 낮아졌다.
하지만 럭셔리 주얼리는 매출 증가율이 상대적으로 양호했다. 롯데 잠실점의 경우 올해 9월까지 반클리프 아펠·그라프 등 럭셔리 주얼리는 25%의 신장률을 나타냈다. 손목시계가 개당 2억 원을 훌쩍 넘는 오데마피게가 청담동에 입성하는 등 청담동 명품거리가 주얼리·시계 중심으로 되살아나는 것도 마찬가지 배경이다.
한 백화점 VIP 고객은 “요즘에는 가방보다 오래가면서 자녀에게 세금 없이 물려줄 수 있는 럭셔리 주얼리에 손이 더 간다”고 말했다. 구매 단가가 수백만 원으로 비교적 낮았던 명품 패션을 사던 수요는 주춤해진 반면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대를 한 번에 살 수 있는 최상류층이 득세하는 것이다.
백화점 역시 이들을 잡기 위해 VIP마케팅을 강화하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에비뉴엘 블랙, 신세계백화점은 트리니티, 현대백화점은 자스민 블랙이라는 이름으로 최상류층 고객을 관리한다. 에비뉴엘 블랙은 서울 기준 1년에 3억 4000만 원 구매, 트리니티는 매출 상위 999명 고객을 이듬해 1년간 선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백화점은 이들에게 25만 원 상당의 한우 등을 선물로 제공한다. 한 VIP 고객은 “백화점에서 해주는 무료 발렛 주차 때문에 들어가려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VIP 역시도 계층이 나뉜다. 1년간 구매 실적을 바탕으로 선정하는데 최상류층은 연초에 이미 연간 금액을 채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연말까지 금액을 채우면서 매년 오르는 등급 커트라인을 백화점에 묻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한 고객은 “하루에 1억 원 가까이 쓸 수 있는 VIP들도 있다”면서 “그런 사람들은 백화점 VIP 라운지에서 며느리 모임도 여는데 자산가는 자산가끼리, 전문직은 전문직끼리 따로 만난다”고 귀띔했다.
백화점보다 청담동 단독 매장을 선호하기도 한다. 한 고객은 “단독 매장은 백화점 VIP 같은 혜택은 없지만 오픈런할 필요가 없고 더 많은 직원에게 대접받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판매원들은 신상품이 나오면 VIP 고객에게 먼저 알려주고 젊은 고객들은 매장에서 인스타에 올릴 사진을 찍기 위해 오기도 한다. 매주 수백만 원씩, 1년에 1억 원어치를 사는 단골도 있다.
호텔 업계 역시 럭셔리 마케팅에 나섰다. 파르나스호텔의 플라워브랜드 에플로어는 온라인에서 99만 원짜리 꽃다발을 팔고 있고 스위트룸을 꽃으로 장식한 숙박 상품은 1박에 260만 원부터 판매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