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한국 의사로 살 자신 없어” 사직 전공의, 국제학술지에 밝힌 심경

의정부성모병원 신경외과 사직 전공의

문정기씨, 란셋 자매지에 기고문 게재

7일 오후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 응급의료센터로 의료 관계자가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7일 오후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 응급의료센터로 의료 관계자가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 삶은 송두리째 뒤집혔습니다. 환자들이 저를 돈 때문에 환자를 버리고 떠난 사람으로 기억할까봐 두렵습니다. 제가 레지던트 시절 돌봤던 사람들이 절 기회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갔다고 믿었던 게 어리석은 생각이었을까요? 다시는 환자들과 진정성 있게 소통할 수 없을까봐 두렵습니다. "



의과대학 증원 추진에 반발해 사직서를 내고 병원을 떠난 한 신경외과 전공의가 국제학술지를 통해 "한국에서 의사로 계속 일할 자신이 없다"며 이 같은 심경을 밝혔다.

가톨릭의대 의정부성모병원 신경외과 레지던트로 근무하다 올해 2월 사직한 문정기 씨는 국제학술지 '란셋 지역 건강(The Lancet Regional Health)' 11월호에 '내가 한국 보건의료시스템을 떠나기로 결정한 이유(Why I decide to leave South Korea healthcare system)'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게재했다. 란셋 지역 건강은 저명한 의학학술지 란셋(Lancet)의 자매지로 지역사회의 건강 문제와 보건 정책, 보건 시스템 등에 대한 연구 결과와 견해를 다룬다.

국제학술지 '란셋 지역 건강(The Lancet Regional Health)' 11월호에 실린 기고문 캡처국제학술지 '란셋 지역 건강(The Lancet Regional Health)' 11월호에 실린 기고문 캡처



문 씨는 기고문에서 "한국 정부가 올해 2월 당장 2025학년도부터 의대 입학정원을 66% 늘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며 "당시 사직한 90% 이상의 레지던트 중 한 명"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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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씨는 "새로운 보건의료정책이 어떻게 제 전공을 포기하게 만들었는지에 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운을 뗐다.

생명이 위급한 환자를 살리는 뇌수술에 매료되어 2023년 신경외과 레디전트 수련을 시작했고, 위험 부담이 상당히 큰 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살린 환자와 가족들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을 때면 보람이 컸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과학적 근거를 갖추지 않은 채 필수의료 분야 낙수효과를 이유로 전례 없는 의대 증원 규모를 공개했고, 일방적인 의료개혁에 항의해 사직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정부의 행정명령(사직서 수리 금지 명령)으로 의사 면허가 수련병원에 묶였고 일반의 자격으로 다른 병원에 취업할 수 없었다는 내용도 담겼다. 문 씨는 "정부가 고생 끝에 딴 의사 면허를 정지시키겠다고 위협했고 5개월이 지나서야 공식적으로 사직 처리가 됐다"며 "현재 수련 병원이 아닌 의료기관에서 근무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번 사태로 인해 의사를 적대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고, 의사와 환자 간 신뢰에 금이 갔다고 주장했다. 주요 언론들이 사직 전공의들을 범죄자와 배신자로 묘사했고, ‘금전적 이익을 위해 환자를 버렸다’고 비난하면서 의사들에 대한 적대감이 심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환자들과 진정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없을까 두렵다. 제 자신이 부서진 느낌"이라며 "한국에서 의사로 계속 일할 자신이 없다"고 토로했다.

문 씨는 "한국의 보편적 의료 시스템은 지속 가능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꼬집었다. 의료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수련생 신분인 전공의의 노동에 지나치게 의존해 왔는데, 합계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까지 떨어지면서 잠재적인 보험료 납부자가 줄어들 것이란 이유에서다.

그는 "건강보험 재정은 5년 이내 적자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며 "정부와 의사, 의대생은 물론 전 국민이 국가 의료의 미래 방향에 대해 광범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의료 개혁의 흐름을 감안하면 의사들의 목소리가 정책 결정 과정에 반영될 것이라는 희망을 잃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의료개혁 발표 이후 많은 한국 의사들이 해외 근무를 고려하게 됐다. 나 역시 많은 고민 끝에 보다 안전하면서도 존중받을 수 있고 예측 가능한 임상 환경을 찾아 해외로 이주할 준비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의료계에서는 정부의 일방적인 의료개혁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해외에 알리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앞서 서울대 의대에 재학 중인 신동진 씨와 신동주 씨는 지난 8월 의학학술지 란셋에 '6개월째 한국 의대생은 휴학 중(6 months on: South Korean medical students still on leave)'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게재했다. 기고문에는 한국 정부가 지난 2월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겠다고 발표하면서 의대생 95% 이상이 1년간 휴학하는 결정을 내렸고, 의대 본과 4학년생 중 5.3%만 올해 의사 국가시험에 지원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안경진 의료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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