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비상계엄의 후폭풍이 세계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국내 방산·원전 수출에 악영향을 줄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조 단위의 대규모 계약이 이뤄지는 만큼 정부대정부(G2G) 간 논의와 협력이 필수적인데 외교 기능이 사실상 마비되면서 진행되던 수출 건에 제동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불안으로 우리나라의 대외 신뢰도가 낮아지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9일 방산 업계에 따르면 연내 타결이 예상됐던 폴란드 정부와의 K2 전차 2차 수출 계약 건이 올해를 넘길 것으로 전망된다. 파베우 베이다 폴란드 국방부 차관은 최근 현지 기자회견에서 K2 추가 도입과 관련, “(계약 체결을) 서두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우리는 2022년 폴란드와 K2 1000대를 수출하는 기본 계약을 체결한 뒤 이 중 180대를 먼저 공급하는 1차 이행 계약을 맺었다. 현재는 나머지 820대 중 일부 추가 물량에 대한 구매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가격과 현지 생산, 기술 이전 등을 두고 줄다리기 협상이 이뤄지는 가운데 외교력의 부재가 아쉬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앞서 방한한 사디르 자파로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은 4일 한국항공우주(047810)산업(KAI)을 방문하려 했지만 전날 밤 비상계엄 사태로 일정을 취소하고 조기 귀국했다. 자파로프 대통령은 한국형 기동헬기(KUH) 시험비행과 생산 현장을 둘러볼 예정이었다. 5~7일 예정됐던 울프 크리스테르손 스웨덴 총리 방한 취소도 방산 업계로서는 뼈아픈 부분이다. 크리스테르손 총리는 지난해 5월 한덕수 국무총리의 유럽 순방 당시 “한국과 방위산업 분야 협력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번 방한에는 스웨덴 방산 업체 사브(SAAB) 등의 지분을 소유한 인베스터AB의 야코프 발렌베리 회장도 포함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방산 기업과의 비공개 면담이나 업무협약(MOU)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됐지만 기회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원전 수출도 ‘정상 외교’가 멈추면서 위기감이 증폭되고 있다. 7월 한국수력원자력을 중심으로 한 ‘팀 코리아’는 24조 원 규모의 체코 두코바니 신규 원전 2기 건설 사업의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됐다. 한수원은 내년 3월 체코전력공사(CEZ)와 최종 수주 계약 체결을 목표로 실무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국정 혼란으로 인해 원전 생태계 복원 및 수출 계획이 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차세대 에너지원으로 주목받고 있는 소형모듈원전(SMR) 사업도 정부의 지원이 뒷받침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업계에서는 국정 혼란이 장기화될 경우 방산·원전 산업의 성장 추세까지 꺾일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국가 간 대형 사업일수록 외교적 신뢰가 중요한데 계엄 사태로 대외 안정도와 신인도가 떨어진 상황에서 권력 공백마저 야기되면 대응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방위 사업의 경우 최신형 잠수함 3~4척을 획득하는 3조 원 규모의 폴란드 오르카(Orka)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잠수함 12척(60조 원) 규모의 캐나다 잠수함 사업, 미국 자주포 현대화 사업 등을 위한 수주전이 펼쳐지고 있다. 원전은 아랍에미리트(UAE), 사우디아라비아, 영국 등 국가의 신규 건설이 예상된다. 각국의 치열한 외교전 속에서 한국은 자칫 자리를 잃을 수 있는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국가 정상 간 소통을 중시 여기는 중동 지역의 사업에 특히 권력 공백의 영향이 클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