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가 얼어붙고 금리마저 높게 유지되면서 스타트업 생태계 불황이 장기간 이어지고 있다. 올해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한 투자는 지난해와 비교해 약 33%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 초창기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소액 투자부터 기업공개(IPO) 직전 이뤄지는 대규모 투자 등이 모두 감소했다. 업계는 정부 지원 등으로 올해 시장이 반등할 것으로 내다봤지만 예측과 달리 침체 국면이 장기화하는 모습이다.
18일 벤처 투자 정보 플랫폼 더브이씨에 따르면 올 들어 국내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한 투자는 이달 15일까지 총 5조 6426억 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7조 4684억 원보다 약 33% 감소한 것이다.
특히 초기 투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한때 초기 투자에 적극적이던 대기업들이 소극적 자세로 돌아서고 상당수 액셀러레이터(AC)가 조직 통폐합은 물론 폐업까지 선택하는 등 경영난을 겪는 상황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 시드 투자는 지난해 3007억 원을 기록했지만 올해는 1951억 원에 그쳤다. 같은 기간 시리즈A 투자도 2조2208억 원에서 1조5324억 원으로 감소했다. 다만 시리즈B 투자는 2023년 1조 9367억 원, 2024년 1조7316억 원으로 엇비슷했다.
업계에서는 투자 혹한기를 맞아 초기 기업이 유독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벤처캐피탈협회 조사에서도 2020년 초기기업에 대한 투자 비중은 30.7%, 후기기업은 29.2%였지만, 올해 9월 기준 초기기업 투자 비중은 19.3%, 후기기업은 45.6%로 변화됐다. 상대적으로 검증된 스타트업에 대한 후기 투자를 선호하는 VC가 늘어나면서 초기 기업에 대한 관심이 부쩍 줄었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평가다.
다만 후기 단계 투자도 초기 투자와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리즈C 투자는 지난해 1조 5754억 원을 기록했지만 올해는 9783억 원에 머물렀다. 프리 IPO 투자 역시 2023년 7750억 원에서 올해는 2862억 원으로 급감했다.
업종별로는 콘텐츠, 패션, 여행, 자동차, 환경·에너지, 금융 등에 속한 기업에 대한 투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스타트업 진출이 활발한 대표 업종인 콘텐츠는 지난해 투자 유치 금액이 6173억 원을 기록했지만 올해는 절반 수준인 2988억 원에 머물렀다. 패션 업종도 같은 기간 4072억 원에서 1799억 원으로 감소했다.
다만 바이오·의료, 엔터프라이즈, 쇼핑, 뷰티 등은 오히려 투자 열기가 예년보다 뜨거웠다. 바이오·의료는 2023년 9391억 원에서 2024년 9914억 원으로 증가했으며, 쇼핑도 1391억 원에서 2036억 원으로 증가세를 보였다.
이처럼 투자 시장이 얼어붙은 것은 대기업발 구조조정 등 불안한 대외 환경과 함께 상장 실패 리스크가 어느 때보다 고조된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이용관 블루포인트파트너스 대표는 “올 하반기에 투자 시장이 좋아질 것이라 예상했으나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라며 “정부 지원도 줄고 민간 기업들의 출자도 감소하면서 시장에 자금이 더욱 부족해졌다”고 진단했다.
한 AC 대표는 “유망한 초기 기업 발굴에 적극적이던 대기업과 중견기업이 올해 들어 투자를 대폭 줄이면서 올 한해는 창업가들이 펀딩을 하기가 어느 때보다 힘들었을 것”이라며 “지난해 파두 사태 이후 상장 문턱이 높아지면서 업계 전반적으로 초기 기업 투자에 대한 열기가 빠르게 식은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창업자와 투자자들은 올 한해 스타트업 생태계가 지난해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와 오픈서베이가 최근 발표한 ‘스타트업 트렌드 리포트 2024‘에 따르면, 창업자와 투자자 10명 중 6명은 투자 시장이 전년 대비 위축됐다고 평가했다. 해당 조사는 창업자 250명, 투자자 200명, 대기업 재직자 200명, 스타트업 재직자 200명, 취업준비생 200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지난해 대비 생태계 분위기를 묻는 질문에 대해 창업자의 64.8%, 투자자의 58.9%는 ‘부정적으로 변화했다’고 응답했다. ‘경제위기 가능성·경제상황 악화’를 주요 원인으로 꼽았는데, 창업자와 투자자가 각각 35.9%, 33.8%를 기록했다.
투자 유치·집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 역시 창업자 48.4%, 투자자 53.5%로 절반 수준에 달했다. 창업자(82.4%), 투자자(66.5%) 대부분은 향후 1년 뒤에도 스타트업 생태계 분위기가 나아지지 않거나 부정적으로 변화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경제위기 가능성·경제상황 악화(창업자, 투자자 각각 35.9%, 33.8%)' 때문일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다만 해외 투자가 예년보다 활성화되는 등 일부 호재도 나타나면서 유니콘 기업은 예년과 비슷한 수준으로 탄생한 점은 위안거리였다. 인공지능(AI) 기반 영어 학습 솔루션 스픽은 이달 11일 시리즈 C 투자 라운드에서 약 1094억원(7800만달러)을 유치했다. 이번 투자로 스픽의 기업 가치는 1조 4000억원(10억달러)을 기록하며 유니콘 기업으로 진입했다. 스픽은 직전 B3 투자 라운드 이후 6개월 만에 기업 가치가 2배로 증가하며 총 2274억원(1억 6200만달러)의 누적 투자금을 유치했다.
에이블리와 리벨리온도 올해 유니콘 반열에 올랐다. 특히 에이블리는 중국 알리바바그룹이 소수 지분 투자 방식으로 1000억원을 투자, 기업가치 3조원을 인정받았다.
한편 지난해 유니콘에 새로 이름을 올린 기업은 파두(반도체 설계), 아크미디어(드라마 제작사), 에이피알(뷰티테크), 크림(네이버 리셀 플랫폼) 등 네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