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치일반

[여명] 어둠 밝힌 응원봉, 정치의 본질을 묻다

■김경훈 디지털편집부장

집회로 이끈 건 분노와 온기 품은 행동

한강 작가 말처럼 공감이 서로를 연결시켜

'고통 함께 못느끼는' 정치 정체 거듭할 뿐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5분. 윤석열 대통령의 이 짧은 선언으로 21세기 대한민국은 1979년 전두환 신군부의 ‘12·12 군사 반란’ 이후 45년 만에 비상계엄 사태를 맞았다.

“딥페이크 영상인 줄 알았다”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말처럼 아직도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계엄 선포는 친애한다는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오직 대통령을 위한 자기 방어였다.

국민의 일상은 말할 것도 없고 피와 땀으로 쌓아 올린 나라의 위상과 경제도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군인들의 총과 군홧발에 소중한 사람을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함에 잠 못 드는 밤을 보낸 국민들에게 대통령은 ‘불편’을 끼쳐 송구하다고 했다.

역사의 변곡점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국민들은 거리로 나왔다. 국회 앞으로 모여든 이들은 장갑차를 막아 세웠고 누군가는 총을 든 계엄군을 끌어안았다. 국회와 언론마저 장악될 위기에서도 현장을 생중계하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급박한 상황을 전했다.

계엄이 해제된 뒤 이어진 탄핵 집회에 나선 사람들은 대통령이 만든 어이없는 상황, 그리고 고통을 따뜻한 연대로 감싸고 서로를 보듬었다.



바람에 쉽게 흔들리는 촛불 대신 끝까지 꺼지지 않을 응원봉을 들고 나왔다. 집회에 함께하지 못 하는 이들은 음식과 음료 선결제로 마음을 보탰다. SNS와 온라인에서는 영화 서울의 봄 패러디인 ‘12·3 취했나 봄’ ‘나 사랑 때문에 계엄까지 해봤다?!’ 등 각종 밈을 공유하며 풍자와 해학으로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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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년층은 K팝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기 위해 가사를 외웠고 젊은이들은 잘 모르는 민중가요를 공부해서 부르며 모두가 한마음이 됐다.

집회 현장을 가득 메운 응원봉, 울려퍼진 K팝 노래를 두고 외신들은 “마치 콘서트장 같았다”며 “20~30대 젊은층이 시위를 주도했고 이것은 한국 민주주의 미래의 희망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신나는 집회’ ‘MZ 집회’ 등의 수식어로 달라진 시위 문화를 조명했지만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다정하고 온기를 품은 행동이 만들어낸 힘이었고 응원봉을 손에 쥐고 광장으로 나서게 한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무언가 잘못됐음을 그저 혼자서 느끼는 것과 직접 행동에 나서는 것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다. 집회의 형식은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분노와 문제의식을 느낀 국민들이 현장에 나오도록 이끄는 수단이 되었을 뿐이다.

미국의 진화인류학자 버네사 우즈와 브라이언 헤어는 저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진화를 통해 살아남은 종들은 경쟁을 이겨내는 ‘적자(適者·Fittest)’가 아니라 타인의 처지를 공감하고 따뜻하게 도와주는 ‘온자(溫者·Friendliest)’라고 말했다.

“언어는 우리를 서로 연결시킵니다. 이런 언어를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체온’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학을 읽고 쓰는 작업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맞서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소설가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 역시 이와 맞닿아 있다.

어린 시절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사람들이 함께 비를 바라보던 장면을 떠올린 한강은 “수많은 사람들의 1인칭 시점을 한꺼번에 체험한 이 순간은 경이로웠다”면서 문학을 통해 이같은 경험을 반복해왔다고 했다.

그는 “언어의 실타래를 따라 다른 이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또 다른 내면과 마주하면서 내 가장 절박하고 중요한 질문들을 그 실타래에 실어 보내곤 했다”며 고통에 대한 깊은 공감을 통해 서로를 연결하는 문학의 본질을 강조했다.

작가의 말을 곱씹어 보면 문학의 본질은 사랑이며,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 사랑일 것이다. 정치의 본질도 이와 다르지 않고 결코 달라서도 안 된다고 믿는다.

2024년 12월. ‘어두운 나라’에서 ‘가장 밝은 것’을 들고 나와 서로의 체온을 나눈 국민들은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해 또 한 번 진화했지만 정치는 여전히 예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김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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