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 당국이 ‘12·3 비상계엄’ 이후 치솟는 원·달러 환율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고환율 장기화가 기업과 가계에 미칠 악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지만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아서다. 외환보유액을 써서 환율 방어에 나서자니 정치적 혼란이 언제 수습될지 모르고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하는 내년 1월 20일 전후로 환율이 다시 튀어오를 가능성도 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외환 건전성의 ‘최후의 보루’인 외환보유액만 축 낼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의 전략적 헤지 발동으로 외환 당국도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 우선 시장에 공급되는 달러의 규모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전략적 환헤지는 국민연금이 보유한 해외투자 자산의 10%를 환헤지하는 운용 전략을 뜻한다.국민연금이 환헤지 비율을 높이면 시장에는 달러 공급이 늘어나는 효과가 생긴다. 국민연금이 환헤지를 위해 달러 선물환을 매도하면 이를 사들인 은행이 달러 매도·매수 포지션을 중립으로 맞추기 위해 시장에서 달러 현물환을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장에는 달러 공급이 늘어 환율 하락 요인으로 작용한다.
9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해외투자 자산은 4855억 달러다. 이번 조건 발동으로 최대 485억 달러가 시장에 풀릴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 국민연금의 재량으로 최대 5%까지 가능한 전술적 환헤지를 더하면 국민연금의 총환헤지 비율은 15%에 달한다. 국민연금의 환헤지로만 시중에 풀리는 달러가 728억 달러다.
시장에서는 국민연금이 연말을 앞두고 진행 중인 자산군별 리밸런싱 작업도 주목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매년 5년 단위의 기금운용 전략인 중기자산배분안을 통해 자산군별 목표 비중을 설정한다. 올해 자산군별 목표 투자 비중은 △국내 주식 15.4% △해외 주식 33% △국내 채권 29.4% △해외 채권 8% △대체투자 14.2% 등이다. 문제는 최근 해외 주식시장의 수익률이 국내시장보다 높은 데다 환율 상승까지 더해져 자산군별 목표 투자 비중을 조절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9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해외 주식 투자 비중은 34.8%, 국내 주식 투자 비중은 12.7%에 그친다. 국민연금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는 “해외 주식 투자는 목표 대비 1.8%포인트 웃돈 반면 국내 주식 비중은 목표보다 2.7%포인트 낮다”며 “국민연금이 연말 기준 자산군별 목표 비중을 맞추기 위한 리밸런싱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이 해외 자산 비중을 줄이고 국내 투자를 늘리면 이 과정에서 달러 매도 압력이 커져 환율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발생한다.
통상 연말과 연초에 수출 기업들의 네고(달러 매도) 물량이 집중되는 점도 환율 상방을 무겁게 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민경원 우리은행 연구원은 “국민연금의 환헤지 물량 경계 심리가 환율 상승을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한다”며 “수출 업체의 휴가 복귀 이후 매도 대응이 나타날 경우 환율의 상단이 무거워질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외환 당국 입장에서는 환율 방어의 부담을 덜면서 최근 내놓은 외환 수급 개선 대책들을 점검할 시간도 벌었다. 외환 당국은 이달 19일 국민연금과의 외환 스와프 거래 계약을 내년 말까지 1년 더 연장하고 한도를 기존 500억 달러에서 650억 달러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이어 20일에는 △외국환평형기금채권의 룩셈부르크 증권거래소 상장 추진 △은행 선물환 한도 확대 △외화 대출 규제 완화 등을 뼈대로 한 외환 수급 개선 방안을 내놓았다. 외환 당국 관계자는 “이번 방안의 시행 효과와 국가 신인도 및 외환시장 여건 등을 면밀히 봐가며 추가적인 제도를 단계적으로 확대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호재에도 불구하고 고환율 흐름을 되돌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환율이 ‘우리 경제의 부정적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KDI가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KDI는 “3~4%의 환율 변동은 통상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며 “원·달러 환율의 1500원 도달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통상적인 환율 변동선을 3~4%로 본다면 환율은 큰 충격이 없다고 해도 1420~1539원 수준에서 등락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줄탄핵 같은 정치 혼란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백약이 무효”라며 “정치적 불안정성 해소 없이는 환율은 안정되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외환 당국이 강조하고 있는 1조 달러 규모의 순대외금융자산은 긴급할 때 쓸 수 없다는 단점도 있다. 1조 달러의 해외 순자산이 있는 것은 맞지만 단기 유동성 위기 때 정부 마음대로 곧바로 현금처럼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실제 한은에 따르면 순대외금융자산 가운데 단기 상품으로 분류 가능한 자산은 순대외채권이 유일하다. 9월 말 기준 1년 미만 단기 순대외채권은 4689억 달러다. 정부가 견고한 대외 안전판으로 외환보유액과 함께 순대외금융자산을 자주 언급하지만 단기 대응이 가능한 상품은 순대외채권을 제외하면 사실상 ‘깜깜이’라는 애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