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미술 시장을 움직이는 메가갤러리 페로탕과 타데우스 로팍이 올해 마지막 전시의 주인공으로 한국의 1980년대생 작가들을 선택했다. 청담동 페로탕 서울이 고려 불화의 석채 기법으로 현대 사회의 정치성을 탐구하는 김훈규(39)의 개인전 ‘더 플레이어스’를, 한남동 타데우스 로팍은 최신 디지털 기술로 19세기 낭만주의 미학을 실현하는 정희민(38)의 개인전 ‘번민의 정원’을 각각 진행 중이다. 두 작가 모두 전통과 혁신의 교차점에서 독자적인 예술 언어를 구축해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공통점이다.
김훈규 작가의 그림에 대한 첫 인상은 혼란이다. 대형 화면 가득 수백 마리의 동물들이 뒤엉켜 비명을 지른다. 토끼는 도망치고 여우는 쫓고 돼지와 고양이는 부딪치는 가운데 붉은 가재 혹은 푸른 뱀이 화면 전체를 휘감아 오른다. 이 치밀한 ‘난장판’을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면 눈에 남는 것은 그저 화려한 색채의 소용돌이다. 가까이에서는 세계의 혼란이, 멀리서는 색의 조화가 선명한 이중적인 매력이 시선을 계속 붙든다.
서울대 동양학과와 영국왕립예술대를 거쳐 현재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는 토끼, 여우, 고양이 등 동물 형상으로 인간 사회의 욕망과 모순을 탐구하는 독특한 회화 세계를 구축해왔다. 10여 점의 신작이 공개된 이번 개인전에서 작가는 종교와 신념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들여다본다. 예컨대 각 작품에는 하나의 지배 동물이 있는데 기독교의 붉은 가재, 불교의 푸른 뱀 등이 압도적인 크기로 화면을 뒤엎는 식이다. 또 빨강과 파랑 같은 두 개의 지배 색이 서로 충돌하며 얽히고 혼재된다. 작가는 “‘색이 곧 인연’이라는 불교의 문장이 작업의 시작이었다”며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팔레트라는 생각 아래 종교와 세속, 일상과 정치, 질서와 충돌처럼 상반되고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색의 인연들을 하나의 화면 안에서 부딪치게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비단에 색을 층층이 쌓고 가느다란 붓으로 정교하게 그리는 고려불화의 기법을 쓴다. 그러나 내용은 현대적이다. 실제 경찰복을 입은 오리나 태극기를 든 동물 등 정치 시위를 연상하게 하는 묘사도 많아 흥미롭다. 작가는 “좋은 작업은 시대 정신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며 “믿음과 종교, 신념이 뒤엉키는 현대에 ‘정치성의 회복’을 말하고 싶기도 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20일까지.
물결치는 듯한 질감의 회청색 화면 위로 먹구름을 떠올리게 하는 암갈색이 무겁게 짓누른다. 폭풍이 오기 직전의 바다 같기도 혹은 우주의 성운 같기도 한 이 풍경의 가장 독특한 점은 바로 질감이다. 작가는 아크릴 물감에 광택을 주는 재료인 겔 미디움을 쌓고 긁어 내리는 방식으로 이미지의 실질적인 부피감을 캔버스 위에 구현해낸다. 조각처럼 새긴 이미지의 출처를 알고 나면 작품은 한층 더 흥미로워진다. 작가는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에서 수집한 바다의 파도와 조개 껍질, 돌, 꽃, 나무 껍질 이미지를 3D모델링 프로그램으로 변형해 현실로 가져온다. 디지털 픽셀과 물감, 손과 기술, 우연과 의도가 교차하는 ‘디지털 시대의 풍경화’인 셈이다.
현대의 최신 기술을 활용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은 19세기 낭만주의 회화가 보여준 ‘숭고미’다. 인간이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 느꼈던 경외감을 무한히 확장되고 통제 불가능한 디지털 세계에 대입하며 오늘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숭고함을 새롭게 정의한다. 작가는 대형 청동 조각 2점을 포함한 11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이번 신작전의 제목을 ‘번민의 정원’으로 붙인 이유에 대해 “정원은 자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인공적인 상태로 디지털 세계의 구조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2월 7일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