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여명]노키아가 망하니 핀란드가 살았다고?

최형욱 디미털미디어 부장

핀란드, 노키아 몰락 위기에도

혁신·규제완화 등에 성장회복

한국, '대기업 때리기' 앞서

경제생태계 복원부터 시작을




아일랜드 역사상 최대의 비극은 1840년대의 감자 파동으로 인한 대기근 사태다. 1845년 원인 모를 마름병(블라이트병)이 주식이던 감자 농사를 덮쳤다. 5년 동안이나 감자의 잎과 줄기가 시들고 수확량이 급감했다.

대영제국의 피도 눈물도 없는 식민지 수탈과 비인간적인 처사, 대지주들의 탐욕 등이 맞물리면서 100만명 이상이 아사했다. 또 굶주림과 전염병 등을 피해 최소한 150만명가량이 북미로 이주했다. 800만명 이상이던 인구는 거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170여년이나 지난 지금의 인구가 470만명 정도라니 당시 참사의 강도가 얼마나 컸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아일랜드 감자밭은 왜 순식간에 썩어버렸을까. 일시적인 요인은 고온다습한 기후였다. 하지만 비극의 씨앗은 생태계 내부에서 싹트고 있었다. 수확량이 많은 특정 종(種)만 동종 교배를 지속하다 보니 특정 질병에 취약한 DNA로 구성된 순수한 감자 종이 만들어졌다.

아일랜드의 감자 파동은 농업생명공학이나 대규모 기계화 농업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사례로도 자주 등장한다. 생산량에 집착해 유전자의 다양성을 파괴할 경우 예기치 못한 재앙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1870년대 인도와 스리랑카 지방의 커피 녹병, 1943년 인도 벵골 지역의 벼 기근, 1970년대 미국 남부의 옥수수 마름병 등이 모두 순수한 혈통의 종만 단일 재배하다가 생긴 참사였다.

종의 다양성이 중요하기는 경제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2000년대 초반 ‘노키아랜드’로 불리던 핀란드가 대표적인 사례다. 세계 1위 휴대폰 기업이던 노키아는 한때 핀란드 국내총생산(GDP)의 4%, 법인세 수입의 22%, 수출의 25%를 차지했다. 노키아가 우수 인재, 투자 자금 등을 독식하는 바람에 다른 산업은 기를 펴지 못했다.


하지만 노키아가 스마트폰 시장 경쟁에서 도태되면서 핀란드 경제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다 ‘노키아 취업’이라는 편한 길이 막힌 인재들이 정보기술(IT), 헬스케어, 게임 등 창업에 뛰어들면서 경제도 회복됐다. ‘노키아가 망하니 핀란드 경제가 살아났다’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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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일부 대기업의 선전에 의존한 성장 전략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지적이 많다. 자동차, 조선, 철강, 디스플레이 등 기존의 주력 산업은 보호무역주의, 경쟁력 하락 등에 신음하고 있다. 올해 3% 안팎의 성장률이 전망되지만 ‘반도체 착시’에 불과하다는 우려가 크다. 반도체 부문을 뺄 경우 올해 수출이나 경상수지, 기업 실적이 지난해보다 오히려 후퇴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반도체 호황으로 인한 달러 유입에 원화 가치가 상승하면서 다른 수출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핀란드의 노키아와 우리나라의 반도체 사례는 소수 대기업에 의존한 경제 생태계가 위기에 얼마나 취약한지 공통적으로 보여준다. 다만 다른 점도 있다. 과연 우리 경제는 도널드 트럼프발 무역전쟁이 가속화한 가운데 반도체 사이클까지 꺾였을 때 핀란드처럼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사실 핀란드 정부는 노키아가 망하기 전부터 기업가 정신 고취, 청년창업 활성화, 연구개발(R&D) 투자, 혁신 등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붓는 동시에 규제 완화에도 적극적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같은 노력은 노키아가 건재할 때는 성과가 없더니 무너지자 오히려 빛을 발했다. 핀란드의 사례는 경제 생태계만 건강하다면 일부 기업이 망하더라도 경제가 금세 복원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국은 어떤가. 대기업을 죄악시하는 데 그칠 뿐 미래산업 발굴은 손을 놓고 있는 듯하다. 정부가 사회적 자원을 일부 대기업에 몰아주거나 시장반칙 행위에 손 놓고 있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원격의료, 인터넷 전문은행의 은산분리 완화, 개인 차량 공유, 카풀 서비스 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들이 여전히 이해당사자나 시민단체의 반발에 막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답답하다”고 토로한 후 여당과 정부가 규제개혁에 속도를 내겠다고 한다. 과거 정부 때도 수없이 공언한 규제개혁이 이번에는 성과를 내기를 기대해본다. 경제 생태계 복원은 상위 1·2위 종의 도태가 아니라 다른 종을 키우는 데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choihuk@sedaily.com

최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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