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PETER ELKIND and DAVID WHITFORD with DORIS BURKE
2007년 토니 헤이워드 Tony Hayward 는 일련의 재앙적인 사고를 겪은 영국의 거대 정유회사 BP의 CEO에 취임하면서 안전을 최우선 순위로 삼겠다고 맹세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역사상 최악의 산업 재난 중 하나를 수습하게 되었을까 ?
포춘의 조사 결과, 자만과 야심, 그리고 시추 재난이 아닌 커피 흘리는 데만 관심을 가져온 BP의 안전철학이 재앙을 부른 것으로 밝혀졌다.
4월 20일 사람들이 뛰어내리고 있다.
해가 지고 2시간이 지난 4월의 어느 화요일 저녁이었다. 하늘에 뜬 반달은 멕시코 만의 잔잔한 바닷물에 완벽하게 투영되어 있었다. BP의 선박 데이먼 B. 뱅크스턴 Damon B. Bankston 에 승선한 케이즌 Cajun (*역주: 프랑스인 후손으로 프랑스 고어의 한 형태인 케이즌어를 사용하는 미국 루이지애나 사람) 선장 앨윈 랜드리Alwin Landry(41)는 조타실 책상에 앉아 일지를 기록하고 있었다. 왼쪽 귀에 한 쌍의 링 귀걸이를 한 노련한 뱃사람 폴 에릭슨 Paul Erickson(1등 항해사)은 상황을 살피며 키를 잡고 있었다.
150피트 길이의 편평한 화물 갑판을 가진 푸른색 선체의 튼튼한 보급선 뱅크스턴은 스포츠 경기장만한 크기의 시추선 딥워터 호라이즌 Deepwater Horizon과 좌현을 마주하고 있었다. 뱅크스턴의 임무는 호라이즌의 요구대로 해안에서 보급품을 수송하는 것이었다.
월 20일 밤 그 시간엔 이 두 선박 모두가 이곳에 있을 예정은 아니었다. 호라이즌은 1개월 전 이미 다음 시추 장소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었다. 뱅크스턴도 선원 교대를 위해 루이지애나 주 포천 항 Port Fourchon으로 향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랜드리 선장은 폐 굴착이수(泥水) 4,500갤런을 처리해 줄 것을 요청받고 출발을 미뤘다. 선원들은 시추선과 뱅크스턴의 저장 탱크에 무거운 호스를 연결했다. 이른 오후부터 작업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작업이 끝나기 전 호라이즌은 굴착이수 전송작업을 중단했다. 랜드리 선장은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호스를 분리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이 고요했다. 그 사고가 있기 전까지는.
그가 나중에 묘사했듯이, 에릭슨은 뱅크스턴에 검은 비가 퍼붓듯 시추선에서 엄청난 양의 액체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것을 먼저 목격했다. 랜드리 선장은 처음에는 호스가 찢어졌다고 생각했다. 함교 위 2개의 강철 해치를 닫으려 달려 갈 때만 해도 성가시다는 생각만 했다. 청소하려면 며칠은 걸리겠군! 그러곤 랜드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나중에 "내가 유정 탑 꼭대기를 봤을 때, 문제가 생긴 것을 알았다" 고 포춘에 털어놓았다.
그의 눈앞에서 펼쳐진 사건은 거의 성서에나 나올 법한 재앙이었다. 호라이즌의 주 갑판 위로 20층 높이의 화산이 폭발했다. 심해에선 천연가스가 강력히 솟구치면서 해수와 진흙이 함께 솟아올랐다. 새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랜드리는 호라이즌의 함교에 무전을 쳤다. "무슨 일인가?" "지금 유정에 문제가 생겼다." 랜드리는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던 것만큼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말이 들려왔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바로 호라이즌의 선장 커트 쿠차 Curt Kuchta(34)였다. 쿠차는 랜드리에게 당장 500미터를 후진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우리는 호스로 연결되어 있다" 고 랜드리는 쿠차 선 장에게 상기시켜주었다. 지름 4인치의 아주 큰 호스였다. 연결 장치만 해도 무게가 150 파운드나 되는 엄청난 호스였다. 이를 분리할 때 보통 크레인을 사용할 정도였다.
"어…" 쿠차는 두 박자 정도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 1차 폭발이 일어났다. 랜드리는 유정 탑 뒤 시추선의 주 갑판으로부터 나오는 녹색 섬광을 보고 폭발을 인지했다. 뒤이어 큰 진동이 밀려오고, 엄청난 불덩이가 치솟았다. 잔해 폭풍도 이어졌다. 정전으로 시추시설은 암흑으로 변했다.
뱅크스턴의 엔지니어 안토니 제르바시오 Anthony Gervasio는 엔진실에서 타이어 펑크 소리의 100배나 되는 엄청난 소리를 들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위층으로 달려갔 다. 그의 앞으로 진흙이 나타났다. 그는 호라이즌이 암흑으로 변해가는 것을 목격했다. "오..." 라는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그러곤 "젠장, 상황이 좋지 않군" 이라는 말이 나오기 도 전에 곧바로 1차 폭발보다 훨씬 강력한 2차 폭발이 일어났다.
"시추선이 폭발했어. 빨리 자리를 떠나야 해! 호스를 분리해!" 라고 340파운드나 몸 무게가 나가는 키다리 갑판원 루이스 랑글루아 Louis Langlois가 160파운드짜리 땅딸보 제르바시오에게 소리쳤다. 그들은 1인치 두께로 깔린 진흙에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상 자와 릴로 어질러진 화물갑판 위를 달리고 또 달렸다. 로드아일랜드 Rhode Island에서 고 등학교를 다닐 때 미식축구 수비수를 했던 제르바시오가 먼저 도착했다. 그는 연결부 위에 렌치를 대고 끌어당겼다.
랜드리 선장은 그때까지 조타실에 있었다. 그는 호스를 분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기다릴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그가 서 있는 곳에서 40피트 떨어진 곳에 있 는 시추선은 완전히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휘발성 화합물로 가득 찬 통들이 미사일처 럼 하늘로 발사되고 있었다. 그는 출발과 동시에 속도를 올려 호스를 떼어내려고 생각 했다. 그는 그럴 정도의 충분한 마력 Horse Power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원들의 보고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랜드리 선장은 후에 "나는 이미 그들을 내보냈다. 그들을 호스에 끼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고 말했다.
그때 랜드리 선장은 그들을 봤다. 배의 뒤편에서 제르바시오와 랑글루아가 팔을 들어 올리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고 있었다. 그는 바다에 빠진 호스도 봤다. 그리고 결국 후 진에 성공했고, 마침내 그와 화염과의 사이에 거리를 둘 수 있 었다. 점점 거세지는 불에 뱅크스턴의 수은 전등 빛이 가세하 자, 묘하게 밝고 초현실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마치 영화 세트 장에서 모든 것이 불타고 있는 장면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사물질의 1차 섬광이 랜드리의 시선을 관통할 때, 그는 "그럴 리 가 없는데" 라며 혼잣말을 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에릭슨을 보았다. 또 다른 섬 광이 보였다. 그 둘은 사람들이 뛰어내리고 있다는 것을 직 감했다. 호라이즌 선원들이 배를 버리고 있었다. 주 갑판에서 70피트 아래의 바다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밤 10시 4분. 랜드 리는 휴스턴에 있는 BP 통제실에 이메일을 보냈다. "호라이즌 화재 유정 분출, 구조 바람!!!!!!!"
무덤
거대한 시추선은 이틀 동안이나 계속 타다가 점점 기울어져 결국 침몰했다. 침몰 당시 타격으로 해수면 위의 유정 탑과 해저의 유출구 사이를 잇는 1마일의 파이프가 끊어지고, 중 신세 Middle Miocene의 적갈색 슬러지가 솟구쳐 나왔다. BP가 원유유출을 차단하기 전까지, 약 2억 600만 갤런의 원유가 멕시코 만에 유출되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즈 Gabriel Garcia Marquez의 소설에 나오는 저주받은 도시의 이름을 딴 마콘도 Macondo 유정은 현재 봉인되어 버려졌다. 선원 11명의 무덤이 된 이곳엔 딥워터 호라이즌의 잔해가 묻혔다. 심해 시추의 안전성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 불러온 잊을 수 없는 재앙의 상징이 되었다. 이곳은 또한 영원한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해양 석유 시추시설이 폭발하기는 쉽지 않다. 인간과 기계 의 크고 작은 실수들이 개인과 조직에 의해 엄청나게 모여야만 가능하다. 산업재해 조사업계에선 이를 스위스 치즈에 비유한다. 각각의 실수는 치즈 한 조각에 난 하나의 구멍이다. 이 실수들이 쌓이고, 이 구멍들이 완벽하게 일직선을 이루어야만 재난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수년간 정확한 사고 원인에 대한 논쟁을 벌일 것이다. 마콘도 유정 폭발은 이미 미국 역사상 가장 철저하게 해부되고 있는 산업 재해 중 하나가 되었다. 정부 기관, 미 국공학한림원, 관련 3개 회사, 그리고 1월 11일 380쪽 분량의 보고서를 발간한 대통령 특별 조사위원회 등 적어도 9개 기관이 독립 조사를 진행 중이다. 형사기소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법무부는 이미 BP와 시추시설 운영회사 트랜스오션 Transocean 및 기타 회사들을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호라이즌의 사망 선원 가족들부터 객실의 절반이 텅 비어 있는 플로리다의 모텔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련자들을 대표 하는 원고측 변호인단이 이미 350건 이상의 소송을 제기했다. 벌금과 손해배상액만 수십 억 달러가 걸려 있다.
그러나 이 사고의 책임자가 누구인지 아는 것보다, 왜 이 재앙이 발생했는지 이해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포춘의 조사 결과, 이 재앙은 경영진들이 수년 동안 합병을 통한 성장과 잇단 비용 절감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때에도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문화를 키워왔기 때문에 발생했다. 단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얘기다.
딥워터 호라이즌 사고가 있기 전 10년 동안에도 BP는 심각한 사고의 역사를 써왔다. 매번 사고가 날 때마다 BP의 CEO는 향후 재난을 막겠다고 다짐했다. 계속되는 화재와 장비 불량 문제를 겪은 2000년에도 당시 CEO 존 브라운은 "안전에 대한 BP의 각오를 쇄신" 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2005년 BP의 텍사스 시 정유공장에서 15명이 사망하는 끔찍한 폭발사고가 난 후에도 브라운은 사고의 모든 가능성을 샅샅이 조사해 안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발표했다. 2007년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하자, 브라운의 후임으로 지명된 토니 헤이워드 Tony Hayward는 안전문제에 "레이저처럼" 초점을 맞추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역사상 최악의 원유유출 사태를 맞고 말았다.
포춘의 조사 결과는, 한때 '테플론 토니 Teflon Tony' (*역주: 수차례 퇴임 압력에도 꿈쩍 하지 않아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에게 붙여진 별명. 섬유 테플론처럼 질기다는 뜻을 담고 있다)로 알려진 인물이자 고속 승진의 주인공인 지질학자 헤이워드가 어쩌다 그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추락했는지를 보여준다. 변화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 고, BP는 텍사스 시 정유공장 폭발 사고와 같은 이전의 재난들을 일으키게 했던 허술한 안전 정책의 근본적인 취약점을 바로잡지 못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원인은 치명적인 폭발을 막을 공정 안전 process safety보다 미끄러짐과 추락사고를 줄이는 등 직원의 안전을 강조한 탓이라 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엔 의미 있는 변화처럼 보일 수 있지만, BP는 그로 인해 발생한 심각한 결과를 감당해야만 했다.
이걸 한번 생각해보자. BP는 뚜껑 없는 커피잔 사용을 금하는 엄격한 지침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정 폭발을 막을 중요한 마지막 조치인 '부압 테스트 negative-pressure test' 를 실행할 표준 절차를 마련하지 못했다. 이 테스트만 적절히 시행했어도 딥워터 호라 이즌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 포춘은 보도된 적이 없는 2008년 12월 전략 문서에서 BP 경영진들이 멕시코 만에 심각한 공정 안전 '격차' 가 있음을 경고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 문서에는 "엔지니어와 라인 운영 직원들이 공정 안전의 주요 위험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 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인식 부족이 사고의 전조 신호를 놓치고, 사고 후 대응도 제대로 못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 공정 안전 관련 사고의 가능성과 심각성을 증가시킨다"고 쓰여 있다. 이 문서는 '주요 위험의 인식' 강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BP는 실패했다. "그들은 안전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고 BP의 정유공장 폭발사고 후 BP의 안전 실태 조사 패널로 참여했던 MIT의 산업 안전 전문가 낸시 레버슨 Nancy Leveson은 말했다. 그 후 레버슨은 BP 경영진에게 안전 교육을 해 왔으며, 딥워터 호라이즌 사고 조사를 위한 대통령 패널에도 조언을 했다. "그들은 많은 기준을 만들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주 좋지 않았고, 상관도 없는 것들이었다" 고 그녀는 말한다. BP의 방식에 너무 문제가 많다고 여긴 레버슨은 2010 년 1월 동료들에게 "그러니까 사고가 나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호라이즌의 세계
딥워터 호라이즌의 강철 갑판 위에 서 있으면 배 위에 있는지 잊어버리기 쉽다. 심지어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도 컴퓨터 위치제어 시스템으로 거의 움직임이 없을 정도다. 호라이즌은 시추시설이었지만, 헬리콥터 이착륙장이자선상 호텔이기도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호라이즌은 거대한 배였다.
침몰 당시 건조된 지 9년째였던 호라이즌은 지구 반대편 한국의 현대 조선소에서 건조되었다. 건조 당시만 해도 최첨단 시설이었다. 원래 주인이었던 R&B 팔콘 Falcon이 3억 6,500만 달러를 지불한 이 시추시설에는 물에 잠긴 한 쌍의 부교 위에 다리가 4개 서 있었다. 이 선체의 수면 아래 부분은 2만 8,000톤의 '시추 장비 drilling package' 를 지탱했다. 거대한 강철 더미를 시추시설의 다리 위로 올리는 일은 이탈리아의 파지올리 Fagioli가 한국의 현대 조선소에서 해낸 업적으로, 가장 무거운 물체를 들어올린 세계 신기록이었다.
다른 시추시설과 비교해 보면, 호라이즌은 선상 궁전이었다. 160명을 수용할 수 있 는 호라이즌은 영화관, 체육관, 사우나, 흡연실 등을 갖추고 있었고, 심지어 선실 청소 서비스까지 제공되었다. 침상마다 카펫이 깔렸고, 인터넷과 위성 TV도 연결되었다. 24 시간 개방되는 식당도 갖추고 있었다. 슈퍼볼 선데이에 갈 만한 곳이었다. 모여서 슈퍼볼 게임을 시청할 때 요리사는 나초와 핫 윙스를 내 주었다.
한국을 출발해 처녀 항해길에 오른 호라이즌은 느린 걸음에 해당하는 3~4노트의 속도로 남서쪽으로 향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 타운에서 선원을 교체한 후, 북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해 대서양을 건너 2001년 7월 마침내 멕시코 만이 있는 텍사스 프리포트 Freeport에 도착했다. 호라이즌이 프리포트를 떠난 후엔 다시 항구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멕시코 만을 떠나지도 않았다. 그때쯤 스위스에 명목상의 본사를 둔 심해 시추 전문기업 트랜스오션이 R&B 팔콘을 인수해 호 라이즌의 새 주인이 되었다. 호라이즌 사용 계약을 체결했던 휴스턴에 있는 석유탐사 회사 바스타 리소시스 Vastar Resources 는 BP에 인수되었다.
비난을 도맡아 받는 사람
"시간이 아주 많다" 고 토니 헤이워드는 익살스럽게 말했다. 9월 29일 런던의 비 내리는 아침이었다. 그의 후임인 밥 더들리 Bob Dudley 이사에게 CEO직을 물려주기 이 틀 전이었다. 헤이워드는 세인트 제임스 광장 St. James' s Square에 자리한 BP의 현대식 본 사 건물에서 포춘 기자를 만났다. 둘은 우산을 함께 쓰고, 몇 블록 떨어진 헤이마켓 가 Haymarket Street에 있는 카페로 갔다. 2층 버스들이 소리를 내며 지나갈 때, 그는 산 베네 데토 San Benedetto 물을 한 병 들고 앉아 포춘과의 심층 대담 첫 번째 시리즈를 시작했다.
그는 BP 원유유출 사고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덜 심각한 것으로 밝혀졌다 고 주장했다. "환경 종말론은 다시 쓰이고 있다. 미디어들이 결코 원치 않았던 것은 성 공 스토리였다. 미디어가 원했던 것은 엄청난 재난이었다. 나의 가장 큰 실수 중 하나 는 나 자신을 증오와 분노를 도맡아 맡는 사람이 되도록 한 것" 이었다고 헤이워드는 말 했다.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헤이워드는 매력적이고, 직설적이고, 자조적이고, 냉소적이 고, 가끔씩은 불경하기도 한 놀라운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미국인들이 경멸하는 만큼 상처받고, 자기방어적이며, 귀를 닫은 사람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이 사고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BP라 서가 아니다. 이것은 산재다" 라고 헤이워드는 말을 이어갔다. 그가 말한 대로 BP의 대 응은 "역사상 가장 이례적인 기업의 위기 대처" 였다. 그는 BP가 아직 '과정 중' 에 있긴 하지만, "과거보다 공정 안전에 훨씬 더 중점을 두고 있다" 고 주장하며, BP의 안전 경영 을 옹호한다. 헤이워드는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맥락에서 벗어나버린' 원유 유출의 환 경 영향에 대한 그의 언급이 "심히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고 말했다. 그러나 곧이어 "내 말이 방어적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 중 많은 것들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고 덧붙였다.
현재 헤이워드는 자신에게 술까지 사주며 지지를 보내주 는 국민들이 있는 영국으로 돌아와 행복하다. 미국에서는 그 렇지 않았다. 마콘도 유정이 봉합되기 전, 휴스턴의 4성급 호 텔 소렐라 Sorella에서 영국 BP 파견팀과 함께 지냈던 헤이워드 는 자신의 거처를 알리지 못했다. 그의 운전수만 그의 거처를 알고 있었다. "나는 파파라치에게 쫓겨 다녔다. 미국에서 가 장 미움을 받고, 가장 멍청한 사람이 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쫓기는 사람이 되었다" 고 그는 말했다.
지질학자 그리고 중역
정유업계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앤토니 브라 이언 헤이워드 Anthony Bryan Hayward는 무명으로 평화롭게 여 생을 보낼 것 같았다. 그는 에딘버러 Edinburgh 대학에서 '터 키 남서부에 있는 제3기 오피올라이트 관련 퇴적물 Tertiary Ophiolite-Related Sedimentation in S.W. Turkey' 이라는 논문으로 지질 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420쪽 분량의 이 논문은 고대 퇴적 층의 형성을 재구성한 것으로, 탄화수소를 찾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에겐 아주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미래 CEO로 올라서는 발판이 된 그의 논문은 시위 주제가인 밥 딜런의 '블로잉 인 더 윈드 Blowin' in the Wind' 의 가사 "산이 바 다로 씻겨 내려가기 전에 몇 년이나 존재할 수 있을까?" 라는 대목에 인용되기도 했다.
7남매 중 장남인 헤이워드는 런던에서 서쪽으로 2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산업도시 슬라우 Slough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중소 섬유회사의 중견 간부였고, 어머니는 보 건부 행정관료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헤이워드는 모빌 오일 Mobil Oil과 고용 계약을 체 결했다. 그러곤 BP의 책임 지질학자가 그를 개인적으로 스카우트하자 그 계약을 어겼다. 그는 에딘버러 대학에서 만난 미래의 아내 모린 Maureen 때문에 약혼을 파기하기도 했다.
헤이워드가 입사했던 1982년은 BP로선 중요한 시기였다. BP는 1909년 영국-페르시 아 정유회사 Anglo-Persian Oil Co.로 설립된 이후 줄곧 대영제국의 회사처럼 운영해왔다. 정 부는 회사의 최대 주주가 되었고, 중동은 사실상 거의 모든 석유를 제공했다. 그러나 헤 이워드가 입사할 당시 아랍 국가들은 BP에 절교를 선언한 상태였다. 손쉽게 무한정 원 유를 공급받던 시대가 끝난 것이었다.
BP는 잃어버린 원유의 일부를 대체할 새로운 유전을 두 곳 발견했다. 그러나 훨씬 더 위험한 환경인 알래스카의 프루도 베이 Prudhoe Bay와 북해지역이었다. 헤이워드는 스코틀 랜드 연안에서 165마일 떨어진 해저 33피트 깊이의 밀러 필드 Miller Field를 탐사하는 시 추시설로 파견되었다. 그는 해양 탐사의 모험을 즐겼다. 그리고 행운도 따랐다. 그는 일을 시작하고 불과 몇 개월 후인 크리스마스 날 새벽 4시에 석유를 발견하는 전율을 경험했 고, 몇 년이 지난 후 인터뷰에서도 그때의 희열을 들뜬 기분으로 회상할 수 있었다.
헤이워드는 몽고와 파푸아뉴기니 같은 아주 먼 곳에서 일하기도 했다. 전 세계를 누비는 현장 지질학자로서 8년을 행복하게 보냈다. BP는 석유 발견에 자긍심을 느꼈 다. 영국인의 탐험가 기질은 뿌리가 깊다. 그러나 BP는 계속해서 설 곳을 잃어 갔다. 경쟁자들은 BP가 알래스카와 북해에만 너무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2개의 송유관 을 가진 회사" 라고 놀리기도 했다.
BP는 또한 현장에서 근무해보지 않은 이들이 주도하는 경직되고 수직적인 경영 문 화로 방해를 받았다. 특정 직위 이상의 모든 본사 직원은 월요일 아침 개인 수건과 비 누를 받았다.
'쟁반 인간 tray men' 으로 알려진 고위직 직원들은 오후에 각자 쟁반에 차와 비스킷 을 받았다. 관료주의가 지배했고, 운영비용은 아주 높았다. 결과적으로 BP의 직원 일 인당 이익은 엑손의 절반에 불과했다.
이 모든 것은 후에 브라운 경 Lord Browne of Madingley이 된 에드문드 존 필립 브라운 Edmund John Philip Browne이 CEO가 되면서 사라졌다. 현대 정유업계 최초의 유명 CEO 였던 브라운은 케임브리지와 스탠퍼드에서 물리학과 경영학 학위를 받은 명석하고 카 리스마 있는 사람이었다. 브라운은 BP의 미래, 정유업계 전체의 미래, 토니 헤이워드의 미래까지 규정했다.
BP의 심해 탐사
1989년 BP의 주력분야인 탐사 및 생산 부문을 맡은 존 브라운은 사내 10명의 최고 지질학자들에게 석유를 찾을 새로운 전략을 세우라는 임무를 맡겼다. 당시 32세의 헤이워드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런던 외곽의 한 리조트 호텔에 모였고, 며칠 뒤 계획을 들고 나타났다.
회사 규모를 고려해볼 때 BP는 수익에 큰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는 거대한 유전들, 다시 말해 '코끼리들 elephants' 이 필요했다. 지질학자들은 석유를 찾기 위해선 BP의 외교적 능력, 창의성, 대담성이 유리하게 작용하는 새로운 장소에서 시추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정치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하거나, 기술적인 어려움 때문에 다른 이들이 거의 가 본 적이 없는 유역을 시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카스피 해가 그중 하나였고, 서아프리카와 중남미도 타깃이었다. 가장 BP를 흥분시키는 광구는 심해, 특히 멕시코 만의 심해였을 듯하다.
엄청나게 높은 압력과 낮은 기온, 그리고 암흑의 악조건 상황에서 해수면 아래 1마일 이상을 시추할 수 있는 기술이 최초로 허용된 상황이었다. 해저 작업은 드릴 파이프를 연결하거나 도구를 사용해 강철을 자르는 튼튼한 팔이 달린 원격조정 무인해저장비 ROV로 진행되었다. 지진파 영상 기술의 발전으로 석유가 매장된 곳을 찾아내는 게 가능해졌다. 심해 시추는 위험하고 비용이 많이 들었다. 유정 하나만 해도 1억 달러가 넘는 비용을 쏟아 부어야 했다. 그러나 그 성과는 엄청났다. 멕시코 만은 특히 매력적이었다. 미국은 인근에 정유 시설과 끝없이 원유가 소비되는 시장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민주주의 체제, 낮은 세금, 최소한의 규제만을 갖추고 있었다.
BP는 서둘러 연안 시추권을 획득했고, 멕시코 만의 최 대 정유회사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멕시코 만의 심해 는 미국의 새로운 석유생산 동력으로 부상했다. 이 모든 것은 해양 시추에 대한 감세를 단행하고, 새로운 해양지역의 탐사를 허용한 미국 정치인들이 만들었다. 시추업계 규제 주무부처인 정부 광물관리국 Minerals Management Service은 업 계의 홍보 팀처럼 움직였다. 거의 모든 사람이 해양 시추를 좋아하는 듯했다.
태양왕과 테플론 토니
좋든 나쁘든, CEO로서 존 브라운의 유산은 엄청나다. 1995 년 취임한 그는 강력한 수익 추구 경영을 펼쳤고, 항상 비용 절감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각 지부 담당 경영진들에게 운영권을 넘겨주고 그들이 미니CEO처럼 움직이도록 했다. 그는 고위직 250명 모두가 공격적인 이익 및 생산성 목표를 설정한 연간 실적 계약에 사인하도록 요구했다. 그러곤 그들에게 개인적인 책임을 물었다.
BP가 생존하기 위해선 성장만이 살길이라고 확신한 브라운은 일련의 인수합병을 통해 회사를 '슈퍼 메이저' 로 키웠다. 그는 아모코 Amoco과 합병했고, 아르코 ARCO, 바 스타 Vastar, 버마 캐스트롤 Burmah Castrol, 베바 Veba를 차례로 인수했다. 브라운은 중국 과 아제르바이잔에도 진출했고, 러시아와는 수익성 있는 공동 벤처회사 TNK-BP를 설립했다. 그때쯤 BP는 연 매출이 2배 이상 증가해 엑손과 쉘에 이어 정유업계 세계 3위에 올라섰고, 미국내 최대 석유생산업체가 되었다. BP의 이익과 주가는 몇 배나 뛰었다. 경쟁업체들도 따라잡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엑손은 모빌과 합병했고, 코노 코 Conoco는 필립스를 인수했고, 셰브런은 텍사코 Texaco를 집어 삼켰다.
브라운은 또한 BP를 최초의 '그린' 정유회사로 내세우며 회사 이미지를 변화시켰다. 1997년 그는 지구온난화의 증거를 인정하며 정유업계와 결별했다. 브라운은 대체 연료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고, 2억 달러의 브랜드 제고 캠페인을 펼쳤다. 브리티시 페트롤리움은 BP로 법적인 사명을 바꾸고, BP를 연상시키는 "석유를 넘어서 Beyond petroleum" 라는 슬로건을 채택했다. 이 후에 BP의 친환경 열정은 위선으로 조롱받았지만 당시에 그것은 마법이었다. 브라운은 수많은 영예를 차지했다. 유엔의 지구의 날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18개의 명예 학위를 받았으며,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CEO'라는 영예까지 안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에게 기사작위를 수여했다. 말쑥하고 이지적인 브라운은 사진작가 메이플 소프 Mapplethorpe의 사진을 수집하고 오페라를 즐기는 등 우아한 삶을 살았다. 런던에서 함께 사는 홀로된 어머니와 국빈 만찬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찬사를 마음껏 즐겼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그에게 '태양왕' 이라는 별칭까지 붙여주었다.
브라운이 왕이었다면, 헤이워드는 총애받는 왕자였다. 1990년 브라운은 지질학자 중 헤이워드를 뽑아 자신의 비서 2명 중 한 명으로 임명했다. 회사 내에선 이들을 만화책 '닌자 거북이 Teenage Mutant Ninja Turtles' 의 이름을 따 '거북이들' 이라고 불렀다. 거북이들은 해외출장 중 브라운의 가방을 드는 일에서 이사회 회의 참석까지 모든 일을 했다. (브라운에게) 깊은 인상을 준 이들은 고속 승진을 계속했다. 헤이워드는 거북이가 되기 전까지는 지질학자 이외의 다른 삶을 원하지 않았지만 브라운과 일하면서 "비즈니스 세계에 눈을 떴다" 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브라운은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단 한 번도 마지못해 권좌에 앉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 적이 없다" 며 그에게서 야심을 봤다고 말했다.
1992년 현장에서 큰 임무를 연달아 맡은 헤이워드는 훨씬 더 경험 많은 동료들을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브라운은 그를 회사의 주요 광구 중 하나가 있는 콜롬비아의 탐사 책임자로 지명했다. 그리고 3년 후엔 BP의 베네수엘라 지사장으로 임명했다. 말을 붙이기도 쉽고, 직설적이고, 결단력이 있는 헤이워드는 모두가 좋아하는 경영자였다.
하지만 이 두 곳에서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전 동료들은 헤이워드가 얼마나 많은 석유가 발견될지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말한다. 브라운은 "헤이워드는 긍정적인 쪽으로 편향되어 있다. 석유와 가스 탐사 사업 쪽에서만 일하다 보면 갖게 되는 특징이다"라고 말했다. 헤이워드는 콜롬비아에서 BP가 예상보다 적은 양의 석유를 발견했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결과적으론 '환상적인' 투자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BP가 베네수엘라에서 실망스러운 결과를 보인 것은 정치적인 문제 때문이었 다고 말했다.
남미에서의 실패도 그의 상승세를 가로막지는 못했다. 이 후 동료들은 그를 '테플 론 토니 Teflon Tony'라고 불렀다. 그는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는 11년 만에 7번이나 직함을 바꿔 달았다. 2000년 43세였던 헤이워드는 BP 재무 책임자로 임명됐다. 그의 전문 분야는 아니었다. 그러나 브라운 자신이 거쳤던 요직이었고 더 큰 일을 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2003년 헤이워드는 BP의 이사가 되었고, 탐사 및 생산 부문 CEO로 임명 되며 2인자 자리에 올라섰다. 전 책임 지질학자 리처드 허바드 Richard Hubbard는 "브라 운이 헤이워드를 후계자로 선택했다" 고 말했다.
사실, 브라운 경은 누구에게든 CEO직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특히 너무 빨라 선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BP는 브라운이 2008년 12월 60세에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브라운은 BP를 세계 최대 석유회사로 만들 마지막 합병을 성사시키고 싶었다. 그는 쉘과의 합병 안을 띄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사진에 의해 묵살 되었다. 당시 BP 회장이었고, 현재 골드만삭스 인터내셔널 회장인 피터 서덜랜드 Peter Sutherland는 "그것이 성사됐다면 완전히 재앙이었을 것" 이라고 말한다.
몇몇 이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BP는 그때까지 인수한 사업체들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브라운이 너무 과도한 비용절감을 단행하고 인수합병의 시너지에만 의존한다며 우려했다. "그들이 정상 속도보다 좀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고 전 BP 이사는 말했다. 브라운의 핵심 참모 중 한 명이었던 존 모그포드 John Mogford는 "브라운이 BP를 너무 과도하게 이끌다 보니, 아래를 내려다볼 수도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다음 일을 찾았다. 당연히 다음 일은 항상 지난번 일보다 더 큰 것이어야 했다" 고 말했다.
"용납할 수 없는 위험 상황에서"
수년 동안 BP는 재난에 대비해왔다. 24시간 내내, 고위 경영자 한 명을 지정하여 어디에서든 비상 상황을 알리는 전화를 받도록 했다. 미국의 민간 조사연구기관 랜드 Rand Corp.의 컨설턴트들이 경영진들에게 2~3일 동안 지속되는 재난 시나리오를 연출하며,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훈련시켰다. 한 시나리오에선 말라카 해협 유조선이 좌초했고, 다른 시나리오에서는 재앙적인 해양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잘 짜인 각본대로 에피소드가 진행됐고, 질문을 해대며 쫓아다니는 기자들의 역할을 한 배우들이 경영진의 집 앞에 나타나기도 했다.
2005년 3월 23일, BP는 실제로 위기를 맞았다. 텍사스 시 정유공장에 화재가 발생했다. 갤버스턴 Galveston 인근에 위치한 텍사스 시는 BP의 가장 문제 많은 최대 정유공장이었다. 탱크에서 가연성의 가솔린 첨가제를 만들때, 끓어 넘치며 발생한 수증기와 픽업 트럭의 역화가 가세해 불이 붙었다. 이 폭발로 15명이 사망하고, 180명이 부상했다. 10년 만에 터진 미국 최악의 산업재해였다.
BP는 오랫동안 유지보수와 안전조치 업그레이드를 등한시했던 아모코로부터 71년 된 이 정유공장을 인수했었다. 하 지만 1999년 BP가 이 공장을 인수한 후 런던 본사에서 25% 의 예산 감축을 요구했다. 화학물질 유출사고와 소규모 화재는 늘 발생했다. 이 폭발이 있기 전까지 30년 동안 텍사스 시에서 2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2004년에만 3명이 죽어 나갔다. 당시 BP 경영진은 많은 통지문을 받았다. 안전 감사원 과 보고서들은 이 공장이 완전히 붕괴됐고, 용납할 수 없는 위험 상황이며, 대형 현장 사고의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폭발 사고가 나기 한 달 전, 이 공장의 매니저는 BP의 글로벌 정유시설 책임자에게 사고 사망자들의 슬라이드를 보여줬다.
수년 동안 BP는 업계와 규제 당국자들이 면밀히 추적하는 사고 통계인 미끄러짐, 추락, 그리고 며칠씩 일을 할 수 없는 차량사고 등의 급감을 주장하며 자사의 안전 기록을 홍보해왔다. 브라운 재임 시절 BP는 이 기록을 가능하게 한 너무나 많은 규정을 만들었다. 운전중 휴대폰 사용 금지, 난간을 잡지 않고 계단 오르내리기 금지, 뚜껑이 없는 커피잔 사용 금지 등등. BP 경영진들에겐 노동재해 지표와 관련해 보너스를 지급하기도 했다. 브라운은 BP와 아모코의 합병 이후 재해율이 급감했다고 말한다. "텍사스 시의 비극은 상황이 충분히 좋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 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BP의 노동재해 감소는 공정 안전의 실패라는 중요한 문제를 가리고 말았다. 에너지 업계에서 공정안전은 일반적으로 강철 파이프나 탱크 안에 탄화수소를 보관하는 것이라는 하나의 이슈로 귀결된다. 누군가 파이프를 발등에 떨어 뜨리거나, 머리를 부딪친다고 재난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재난은 위험이 누적되도록 만든 잘못된 사업 방식에서 나온다는 얘기다.
미국 화학안전위원회 CSB의 명령에 따라 BP는 텍사스 시와 미국 내 다른 정유공장 4곳을 조사하기 위해 전 국무 장관 제임스 베이커 James Baker를 위원장으로 하는 최고의 조사단을 구성했다. 이들은 "운영 규율의 부족, 안전 운영 수칙으로부터의 심각한 이탈 방조, 공정 안전 위험에 대한 명백하게 안이한 태도"를 확인했다. 조사단은 브라운의 '분산 경영 시스템과 기업가정신을 강조한 문화' 가 안전 문제를 '위탁 Delegated' 했다고 결론지었다. 예를 들면 BP의 글로벌 안전 책임자는 브라운의 대리인에게 보고했다. 341쪽 분량의 보고서에서 CSB는 또 다른 주요 요인인 기업 비용절감을 확인했다.
텍사스 시 폭발사고 후, 브라운은 다른 재앙을 막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텍사스 시 사고가 그의 재임 중 유일한 대형 사고는 아니었다. 불과 4개월 뒤 멕시코 만에 있는 BP의 거대한 새로운 생산 플랫폼인 선더 호스 Thunder Horse가 허리케인으로 거의 침몰할 뻔했다. 10억 달러의 플랫폼 완공을 서두르다 인부들이 밸브를 거꾸로 설치해 밸러스트 탱크에 물이 넘쳤다. 조사 결과 또 다른 부실 시공도 드러났다. 수억 달러의 수리 비용이 든 선더 호스는 3년간이나 사용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2006년 3월, BP의 프루도 베이 송유관이 마모되어 26만 7,000갤런의 석유 유출 사고가 발생했다. 알래스카 노스슬로프 North Slope 최악의 석유 유출사고였다. 이 사고는 BP가 노화된 송유관을 적절히 테스트하고 청소하지 않은 결과였다. BP는 이 송유관 유출사고와 텍사스 시 폭발, 프로판가스 가격 조작 협의 등으로 인한 형사고발 및 민사 청구소송을 해결하기 위해 결국 합의금으로 총 3억 7,300만 달러를 지불했다. BP는 중죄 및 경범죄를 인정했고, 집행유예 합의안에 사인했으며, 보호관찰 3년에 동의했다. 또한 BP는 텍사스 시 폭발 사고 부상자들 관련 4,000건의 소송 합의금으로 무려 21억 달러를 써야 했다.
미국에서 비판이 거세지가 브라운은 정치적인 무마를 시도했다. 믿을 만한 액센트를 가진 인맥 좋은 미국인을 내세웠다. BP아메리카의 신임 회장이 된 밥 말론 Bob Malone은 텍사스 시골 출신으로 BP에서 오래 근무한 베테랑이었다. 브라운은 그를 '나의 인간 방패'라고 불렀다. 말론의 취임으로 BP는 사과하고 수표책을 열어 보상은 하지만 BP 시스템 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강력히 부인하는 전략을 성공적으로 추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BP의 표준 재난대응 방식이 되었다. 브라운은 말론에게 안전 문제가 감지되면 미국 사업체를 폐쇄할 수 있는 단독 권한을 주었다.
2006년 8월 BP의 알래스카 송유관 부식 문제가 또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말론의 권한이 시험대에 올랐다. 말론은 미국의 단일 최대 유전인 프루도 베이의 절반을 폐쇄하고 부식된 송유관을 교체했다. 탐사 책임자로서 유전 운영권을 가지고 있던 헤이워드는 당시 항해 중이라 연락이 닿지 않았다. 헤이워드는 돌아와서 자신과 의논하지 않고 그렇게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며 진노했다. 그러나 브라운은 말론을 지지했다.
인명 피해와 수십억 달러 비용이 든 재난 사고에도 꿋꿋이 CEO직을 유지하던 '태양왕'은 비교적 사소한 실수로 그 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는 영국의 타블로이드지가 그의 사생활을 폭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법정 다툼을 벌이는 도중 거짓말을 했다. 브라운의 전 애인인 27세 제프 슈발리에 Jeff Chevalier가 돈을 받고 신문사에 그의 사생활을 폭로했다. 엄격한 영국의 출판법이 적용돼 비공개로 진행된 법정소송에서, 브라운은 둘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그는 둘이 런던의 한 공원에서 조깅을 하다 만났다고 주장했지만, 법정에서 남성 매춘부 중 개 서비스를 통해 처음 만난 사실이 드러났다. 이 거짓말로 인해 판사는 2007년 5월 그의 사생활 출판을 허용하는 판결을 내렸고, 결국 BP 이사회가 브라운의 즉각적인 사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스캔들로 브라운의 사임이 앞당겨졌지만, 이사회는 이미 그의 후계자를 발표한 상태였다. 당시 회장이었던 서덜랜드는 " 토니 헤이워드는 슬램덩크" 였다고 말했다.
안전 최우선
BP의 신임 CEO헤이워드는 우선 자신이 전임자보다 제왕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헤이워드는 유명인이 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2010년 4월까지 CEO로 재직한 35개월 동안, 헤이워드는 몇 번의 인터뷰만을 했다. 그는 언론을 상대하는 데 관심이 없었고, 인터뷰를 잘 한 적도 없다. 그의 이런 단점은 곧 명백히 드러났다. 또한 헤이워드는 브라운의 적극적인 정치middot;사회 참여의 가치를 보지 못했다. 그는 BP의 정부 담당 직원들을 감원했고, 회사가 "세계를 구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너무 많이 고용했다" 고 공개적인 불만을 토로했다. 헤이워드는 BP가 투자은행이 아니라 사업을 하는 회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브라운이 본사에 설치한 현대 예술작품 대신 정유공장과 시추시설에서 작업복을 입고 일하는 노동자의 사진을 걸 기도 했다.
브라운이 일련의 인수합병으로 BP를 변모시켰다면, 헤이드워드는 회사 운영에 집중했다. 그는 이사회에 새로운 주문 '조용한 경영 Silent Running' 을 약속했다. 실제로 이사회에서 헤이워드에게 내려진 첫 번째 임무는 안전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더 이상의 재난을 피하라는 의미였다. 취임 후 몇 달이 지나고 나서 헤이워드는 BP의 '끔찍한' 수익을 다시 신장시키겠다는 두 번째 약속을 했다. 그는 쉘과의 이익 격차 80억 달러를 줄이겠다고 공언했다. 물론 그것은 예산 감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헤이워드는 고비용이 요구되는 안전과 이익 사이의 긴장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CEO에 취임하기 한 달 전 직원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그는 BP 경영진이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은 일을 하는 미덕"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은 것' 이라는 주문은 우리가 90%의 재원으로 임무를 100%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경우엔 계획대로 만족스럽게 일이 진행될 수 있겠지만, 판단력과 지혜가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고 그는 설명했다.
예상대로 그는 이해가 상충되는 이 일들을 잘 해냈다. 헤이워드는 그가 물려받은 회사가 비효율적이고 과도하게 복잡하다고 생각했다. 관료주의를 제거하면 수십억 달러를 절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회사를 더 잘 운영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2007년 말 그는 5,000명 이상의 감원을 포함한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발표했다. 당시 그는 최전선의 기술 전문성을 보강하는 전략이라고 주장했다.
헤이워드는 브라운이 결코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안전성 문제에 개입했다. 그는 우선 안전 전문가를 고용해 작업 현장 방문 시 어떻게 어려운 질문을 하는지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CEO로서 그는 개인적으로 BP의 위험 위원회 의장직도 맡았다. 헤이워드는 경영진들을 새로 설립한 MIT의 'BP사업운영 아카데미 Operations Academy'에 보내기도 했다. 총 3회로 구성된 이 프로그램에서 경영진들은 더 나은 사업운영과 위험 대응 방법을 교육받았다. 텍사스 시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사례연구도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가르치는 공정 안전 교육은 보편적인 것이다. 중요한 절차는 형식을 갖추어 엄격히 수행되어야 한다. 사고 방지를 위한 여러 단계의 안전 조치를 유지하는 것은 필수다. 즉석에서 내리는 운영 계획 변경은 위험하다. 이례적인 것은 분명히 해결되어야 한다. 작은 사고는 재난이 발생할 여건이 갖춰졌다는 경고다. 심각한 사고 없이 오랜 시간이 지나면 안이해지게 된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잊어버린다 등등.
헤이워드의 새로운 안전 조치의 핵심은 운영관리시스템 OMS이었다. 지금도 헤이워드는 OMS를 '가장 오래 지속될 내 유산' 이라고 부른다. 이론적으론 권고할 만한 시스템이다. 엑손이 발데즈 원유 유출사고 후 성공적으로 했던 방식대로, OMS는 안전 문제를 운영상의 모든 부분에 통합하여 이론적으로 모든 직원이 안전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했다. 이 시스템의 전면 이행은 수년이 걸리는 엄청난 일이었다. 헤이워드는 이 시스템이 BP의 전사적 사업 방식의 단점을 확인하고 교정해 궁극적으로 재난을 예방 해 줄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 BP의 멕시코 만 운영의 심각한 단점을 발견한 것도 OMS였다. 2008년 12월 전략 계획에선 6가지 '우선순위 격차'가 확인됐다. 최우선 순위는 심각한 위험의 경감이었다. 그 계획은 "많은 위험 공정들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공정들이 너무나 복잡하고 다루기 힘들어 효과적인 운영이 불가능하다" 고 지적했다. 한 도표는 이 문제 해결에 실패하면 '다수의 사상자' '대규모 환경 피해' '엄청난 규모의 시설 손실' '회사 명성에 대한 타격' 등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2010년 1월 BP의 멕시코 만 팀은 이 문제를 해결할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그런 '재앙적인 손실'은 불과 3개월 뒤에 발생했다. 부분적으론 OMS의 자체 결함 때문이었다. 대통령 조사 위원회의 한 조사관에 따르면, OMS는 공정 안전을 계획 단계에 통합하는 일에는 탁월했지만, 운영 중 내려지는 결정에 도움을 주는 효과적인 절차를 마련하는 일엔 미흡했다.
OMS가 BP의 공정 안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는 BP가 계속해서 문제에 봉착했다는 점이다. 그 것도 가장 철저하게 이를 이행했고, 개선에 따른 인센티브를 가장 많이 받은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2009년 연방 직업 안전 위생 관리국 OSHA은 텍사스 시 사고에서 지적된 위험을 경감하지 못한 이유로, BP에 기록적인 벌금을 부과할 것을 제안했다. OSHA는 또한 BP가 고의적으로 수백 건의 공 정 안전 위반을 했다고 말했다. 공공청렴센터 Center for Public Integrity에 따르면, 2007년 6월~2010년 2월까지 BP의 정유 시설 안전 위반은 총 829건이다. 동종업계 다른 회사를 모두 합쳐도 33건이다. 2005년 폭발사고 후, 텍사스 시에선 3명이 더 사망했다.
연방 CSB 회장은 OSHA의 기록적인 벌금 부과는 BP가 "아직 효과적인 안전 문화를 달성하지 못했다" 는 증거라고 말했다. 그는 BP가 공정 안전 전문가를 이사에 임명하라는 '특히 중요한' CSB의 권고를 따르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세상은 관심조차 없는 듯했다. 2010년, 텍사스 시와 선더 호스 플랫폼은 완전 생산 체제로 복귀했다. 그리고 헤이워드의 비용 절감은 확고히 자리 잡았다. BP는 쉘 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내는 기업이 되었고, 배당금과 주가도 계속 올랐다. 투자자들과 애널리스트들은 헤이워드를 좋아했다. 그리고 노동 재해라는 전통적인 산업안전 기준으로 봤을 때, BP는 역대 최고의 해를 기록할 예정이었다. 헤이워드는 "우리는 다른 이들이 할 수 없거나 하지 않으려는 어려운 일들을 하면서, 우리의 위험 관리 및 대응 능력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고 2월 BP의 연례 보고서에서 선언했다.
멕시코 만에서 대형 원유유출 사고가 발생한 지 20년이 지났을 때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곳에서의 작업이 안전하다고 판단해 지난해 4월 2일 26년간의 동부 연안 시추 금지를 해제할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이젠 석유 시추시설이 원유유출을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 말했다.
4월 20일 "그게 뭐지?"
4월 20일 화요일은 선원 교대가 이뤄지는 날이었다. 딥워터 호라이즌에 모여든 이들 중에는 시추선의 선장 중 한 명인 커트 쿠차도 있었다. 그는 전날 밤 메릴랜드 집에서 비행기를 타고 뉴올리언스 공항에 도착해 인근 호텔에서 잠을 잤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선원 버스를 타고 루이지애나 주 후머 Houma로 간 후 헬리콥터를 1시간 타고 시추선에 도착했다. 분명 긴 출근길이었지만, 그에겐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21일 일하고 21일 쉬는 이들에겐 매력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어디에서든 기꺼이 일하려고만 한다면, 어디에서든 살 수 있다.
시추선에서 내려 지휘권을 인수받자마자 쿠차 선장은 헬기 이착륙장으로 나와 VIP들을 영접했다. BP와 트랜스오션에서 각각 두 명의 경영진이 야간 방문을 했다. 호라이즌의 '안전 문화' 에 대한 최근 감사에서 '경영진과 시추선 사이의 간극' 을 좁히기 위해 경영진이 더 노력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기 때문이다. VIP들은 또한 딥 워터 호라이즌의 주목할 만한 7년 무사고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 시설을 방문한 터였다.
딥워터 호라이즌에서 진행 중인 마콘도 프로젝트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호라 이즌은 심지어 이 유정을 시추하기로 예정되어 있지도 않았다. 트랜스오션의 마리아 나스 Marianas 시추선이 2009년 11월 허리케인 아이다 Ida로 인해 사용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호라이즌이 2010년 초 이 임무를 인계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문제에 직면했다. 3월 8일 해저 아래 2마일 지점에서 드릴 파이프가 바위에 끼는 사고가 발생했다. BP는 한발 물러나 그 주변을 시추해야 했다. 2010년 봄 내내, 굴착이수 가 유정 구멍의 균열을 따라 흘러내릴 때 발생하는 '일수(逸水) lost circulation'와 유정으로 예기치 않은 가스 압력이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는 '킥 kicks' 문제가 많이 발생했다. 평범한 프로젝트로 보였던 마콘도 유정이 예정보다 45일이나 지연되고 있었고, 초과예산도 5,800만 달러나 들어갔다. 몇몇 선원은 마콘도를 '지옥의 유정' 이라고 불렀다.
쿠차 선장이 VIP들에게 시추선을 안내해주고 있을 때에도, 개별적으론 별 문제가 없지만 일렬로 연결되면 엄청난 재앙이 발생할 수 있는 스위스 치즈 조각들(재앙의 전조)이 쌓이고 있었다. 최종 유정 설계에 따르면, 21개의 센트럴라이 centralizer (*역주: 드 릴 파이프를 유전 구멍 중앙에 위치시켜 주는 장치)를 설치해 봉합 위치(드릴 구멍 내에 있는 탄소 강철 내벽)를 정확히 잡아줘야 시멘트로 유정을 제대로 봉합할 수 있다. BP는 그 정도로 많은 센트럴라이저가 없어 추가 주문을 했다. 그러나 주문품이 도착했을 때 잘못된 제품이 온 듯했다. 유정 봉합작업을 맡은 할리버턴 Halliburton은 너무 적은 센트럴라이저를 사용하면 '심각한 가스 유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작업 지연 및 추가 비용에 직면한 BP는 가지고 있던 6개의 센트럴라이저만 사용했다. "무슨 상관이야, 됐어, 괜찮을 거야"라고 휴스턴에 있 는 BP 굴착 엔지니어 브레트 코케일스 Brett Cocales가 호라이즌에 있는 동료에게 메모를 썼다.
그리고 또 한 조각의 스위스 치즈가 있었다. '시멘트 의 천재 Genius With Cement' 라는 책을 쓴 고 얼 할리버턴 Erle Halliburton이 설립한 할리버턴이 자체 실험실에서도 여러 번 테스트에 실패한 거품 혼합물을 준비한 것이었다. 결과를 본 적이 없는 BP는 이 시멘트가 신뢰할 만한 것인지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또 다른 치즈 한 조각은 BP가 시멘트 봉합 작업을 마친 후에 작업이 더 지연된다며 계획된 테스트를 시행하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이 테스트를 시행하기 위해 시추선으로 날아갔던 슐룸베르거 Schlumberger의 전문가들은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남은 중요한 과제는 석유나 가스가 유정에 침투하지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안된 '부압테스트' 등 이전에 놓친 문제 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 테스트는 봉합할 때 무거운 굴착 이수 대신 더 가벼운 해수를 사용해 유정구멍을 막는 시멘트 플러그를 설치하고 드릴 파이프를 분리하는 등 임시 폐기로 알려진 절차를 계속 진행하는 것이 안전한지를 알려주는 과정이었다. 그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BP는 생산 플랫폼을 보내 이 유정에서 석유를 끌어올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부압테스트는 시행되지 않을 뻔했다. 많은 직원들에게 아버지 같은 인물로 여겨졌던 트랜스오션의 백발 시추 임원 지 미 해럴 Jimmy Harrell은 4월 19일 BP의 일일 작업 계획에서 테스트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어 놀랐다. 그는 그것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부압테스트는 표준 절차였다. 보통 해럴은 BP의 지시를 따르곤 했다. 시추선에 있는 BP 직원은 단 몇 명이었지만, 모든 시추의 최종 결정권자는 BP였다. 그러나 해럴은 이미 많은 문제가 발생했던 후이기 때문에 그 결정에 따르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다시 테스트 일정이 잡혔다. 대 통령조사위원회는 후에 "이것이 변경 과정의 공식 위험 평가나 관리를 거쳤다는 증거는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 더 많은 스위스 치즈 조각이 쌓여간 것이다.
오후 5시경 할리버턴의 라이언 헤어 Ryan Haire는 부압 테스트를 시작했다. 그는 드릴 파이프 속에 선을 넣어 압력을 뺐다. 압력이 떨어지자 액체가 유정에서 올라오기 시작했고, 이를 10갤런 용량의 탱크 2개에 담았다. 약간의 액체가 흐르는 것은 예측된 일이었지만, 이 정도로 많이는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는 시추선에 "내 탱크가 가득 찼다. 이제 유정을 닫아야 한다" 라는 통신을 타전했다.
유정을 닫자, 유정 안의 압력이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압력 상승과 치솟는 액체는 어디선가 탄화수소가 유정으로 침투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선원들은 테스트를 2번 더 했고, 유사한 결과를 얻었다. 시추선에 있던 결정권자들은 당황했다. 엑손 모빌과 달리 BP는 이 테스트를 시행할 절차가 없었고, 그 결과를 해석할 수 있는 과정도 없었다. 한 베테랑 굴착자가 난해한 해석을 하며, 굴착이수가 분출방지장치 blowout preventer의 밸브 에 압력을 가하고 있고 그 압력이 드릴 파이프로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풍선효과 bladder effect'라고 했다. 논의가 이어졌다. 조사관들이 후에 불가능하다고 한 그 해석이 받아들여졌다. 누구도 육지에 있는 안전 전문가와 상의하려 하지 않았다.
BP의 도널드 비드린 Donald Vidrine은 선원들에게 부압 테스트를 다시 하라고 지시했다. 이번에는 '킬 라인 kill line' 이라고 불리는 드릴 파이프 측면에서 테스트를 했다. 이론적으로 킬 라인과 드릴 파이프는 하나의 폐쇄 시스템에 속하기 때문에 각 라인에 대한 테스트는 동일한 결과가 나와야 한다. 그런데 유정은 이번 테스트를 통과했다. 액체도 나오지 않았고, 압력도 오르지 않았다. 조사관들은 후에 킬 라인이 막혀 있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킬 라인에서의 성공적인 테스트 한 번이 드릴 파이프에서의 실패 세 번 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고 판단한 선상의 BP 관계자들은 최종 승인을 내렸다. 유정은 봉인될 수 있었을 것이다.
밤이 오고 있었다. 갑판 아래 회의실에서 VIP들은 선원들과 7년 무사고 기록을 축하하고 있었다. 그들은 2010년의 새롭고 더 야심찬 목표를 논의했다.
저녁 9시가 지나자 VIP들은 휴회를 하고 함교로 향했다. 이곳은 특히 어둠이 내려 앉은 후엔 타는 듯한 스크린과 깜빡이는 전등으로 아주 인상적인 곳이었다. 그들은 시추선이 유정에서 분리될 수 있는 극단적인 상황을 모방해 고안한, 비디오게임처럼 작동하는 훈련용 역동적 위치제어 시뮬레이터 앞에 앉아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게임은 곧 끝날 참이었다.
이 후에 이루어진 실시간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저녁 6시 52분 심해 유정에서 압력 불균형의 초기 증후가 나타났다. 지난 두 시간 동안 처음에는 천천히 그리고 점점 더 강하고 빠른 속도로 탄화수소가 해수면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유정을 모니터하는 선원들은 그 문제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함교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첫 번째 신호는 갑작스러운 고주파 진동 이었다. 모두가 그걸 감지했다. "그게 뭐지?"라고 쿠차 선장이 물었다.
4월 20일 "불이야! 불이야! 불이야!"
호라이즌의 책임 전자기기 기술자인 마이크 윌리엄스가 '주파잡음과 진동' 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아내와 통화 중이었다. 그는 아내에게 전화를 끊어야겠다고 말했다.
배의 3번 엔진이 통제불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전구가 나갔다. 컴퓨터 모니터가 산산조각났다. 시추선은 암흑으로 돌변했다. 1차 폭발로 윌리엄스는 방 저편으로 날아갔다. 2차 폭발 때 그는 또 35피트나 날아가 떨어졌다. 그는 머리에 난 깊은 상처로 피가 범벅이 돼 앞을 볼 수 없었다. 이산화탄소 때문에 입을 막은 상태에서 다친 다리를 끌며 함교로 향했다.
영어 교수에서 소득이 더 좋은 시추 전문가로 변신한 레 오 린드너Leo Lindner는 1차 폭발 당시 잠을 자고 있었다. 2 차 폭발이 있을 때 그는 침대에서 나와 속옷 차림에 맨발로 서서 상황을 판단하려 애쓰고 있었다. 방 안은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린드너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벽이 사라지면서 옆방에 있던 그의 친구 라이언 헤어 Ryan Haire가 보였던 것이다. 그는 인터콤에서 옌시 케플링거 Yancy Keplinger가 "불이야! 불이야! 불이야! 이것은 훈련상황이 아니다!"라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옷을 입으려고 손을 뻗었다. "이러다 속옷만 입고 죽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고 그는 포춘에 말했다.
선원들은 선미에 있는 두 개의 구명보트에 모였다. 후미에 있는 두 개의 구명보트는 화염 때문에 이용할 수 없었다. 클립보드를 든 리더들이 이름을 체크하며 인원을 정확히 파악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가망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몇몇 선원들은 이미 바다로 뛰어내린 상태였다. 끝없는 지연처럼 여겨졌던 상황이 끝나고 두 대의 보트가 출발 했다. 몇몇 선원은 남겨졌다. 바다로 뛰어내릴 게 아니라면,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은 팽창식 구명보트를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심각한 부상으로 고통을 호소하던 굴착작업 감독자 와이 먼 휠러 Wyman Wheeler가 들것에 실려 도착했다. 그러나 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