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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맞은 대한민국 과학 상아탑

학생 자살과 KAIST 사태

국내 최고 이공계 영재들의 전당인 카이스트(KAIST)가 학생들의 잇단 자살로 큰 충격에 빠졌다.

올해 들어서만 전문계 고교 출신 로봇영재, 과학고, 일반고, 영재고 출신 학생 등 4명이 목숨을 끊은데 이어 이들을 지도해야 할 교수마저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


전문가들은 지나친 경쟁과 불안한 미래 등으로 대학생들의 정신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지만 학교측의 대처가 미흡했다며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지난 4월 7일 오후 1시 20분께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의 한 아파트에서 KAIST 2학년 박모 씨가 21층 옥상에서 투신, 숨진 채 발견됐다.

이에 앞서 올 1월 8일에는 지난해 입 학사정관제로 KAIST에 입학한 전문계 고교 출신의 조모 씨가 저조한 성적 등을 비관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3월 20일 경기 수원시에서 과학고 출신의 2학년생 김모 씨, 같은 달 29일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서 4학년 장모 씨가 각 각 자살이라는 길을 택했다.

올해 들어 4개월 동안 총 4명의 KAIST 학생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1월 조모 씨의 사고 이후 KAIST는 '자살 사고 방지 대책 위원회'와 '새내기 지원단'을 운영하는 등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했지만 연이어 터진 학생들의 자살 소식에 충격에 휩싸 였다.

이승섭 KAIST 학생처장은 "매우 당혹스럽다"며 "현재 KAIST 학생들 전원은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어 일반 대학 생들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 말했다.

한양대 구리병원 정신과 박용천 박사는 "정확한 자살 동 기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명문대 학생들은 성적이나 성공 에 대한 스트레스를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받는다"면서 "늘 잘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다가 외부에서 조금이라도 비난과 자극이 가해지면 이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 진다"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국내 대학(원)생 자살자 수는 2007년 232명, 2008년 332명, 지난해 249명 등 매년 200명을 크게 웃돌고 있다. 전문가들은 극심한 취업난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 감이 커지고 등록금 마련, 성적 경쟁 등에 대한 스트레스가 우울증으로 발전하면서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 우가 많은 것으로 보고 시급한 대책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 이다.

무한 경쟁이 원인?

이번 KAIST 학생들의 잇따른 자살 사건 이면에는 서남표 총장 부임 이래 실시 중인 차등 수업료 부과제도와 100% 영 어 수업 진행이 주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학생 들의 자살이 서 총장의 교육개혁 정책과 직접적 관련은 없 더라도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심각한 경쟁체제로 몰아갔 던 것은 사실인 만큼 간접적 개연성은 충분하다는 것. 일명 '징벌적 등록금제'로 불리는 차등 수업료 부과제는 원칙적으로 수업료를 내지 않는 KAIST 학생들에게 성적에 따라 최저 6만원, 최고 600여만원의 수업료를 부과하는 제도다.

서 총장은 2006년 취임 당시 학생들이 무상교육의 혜 택 아래 성적이 저조한 과목을 거듭 재수강하며 졸업을 하 지 않아 면학 분위기를 해치는 모습을 보고 '미래 지도자가 될 학생들이 주어진 책임을 다하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이 같은 제도를 도입했다.

도입 초기부터 무거운 경제적 부담과 징 벌적 속성 탓에 많은 학생들이 반발했지만 지난해 실질 납 부액이 축소됐을 뿐 제도 자체는 지금껏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1월 숨진 조모 씨는 일부 과목에 학사경고를 받 았던 것으로 알려졌고 4월 세상을 떠난 박모 씨도 "등록금 만큼은 내면 안 된다, 부모님께 미안해서 안 된다"고 입버릇 처럼 말해왔던 것으로 전해지는 등 징벌적 수업료가 학생 들에게 큰 심적 부담을 준 것으로 파악된다.

이 제도로 작 년에만 전체 학생 7,805명 중 1,006명(12.9%)이 1인당 평균 254여만원의 수업료를 냈으며 수업료 부과 대상 학생의 비 율도 2008년 4.9%, 2009년 8.0% 등 해마다 상승하고 있는 추세다. 전 과목 100% 영어 강의에 대해서는 구성원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경쟁력 제고를 위해 현재의 영어 강의를 찬 성하는 학생들이 있는 반면 전공에 더해 일어, 철학 등의 교 양과목마저 영어 수업을 진행하는 정책에 적잖은 부담을 느 끼는 학생들도 다수다.

KAIST의 한 재학생은 학내 커뮤니 티 사이트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영어 강의로 4년을 살았는 데 수업을 제대로 들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며 "많은 친구가 수업 때 멍하니 있다가 혼자서 공부하는 것을 힘들어 한다" 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개혁정책 영향 분석과 반성 시급

KAIST의 한 교수는 전체 교수들에게 보낸 메일에서 "그동 안 카이스트 교육전반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며 "이 같은 변화가 정말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할 때"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올해들어 이어지고 있는 일련의 자살 사건은 이러한 변화가 끼친 영향에 대한 분석과 반 성이 시급한 과제임을 말해주고 있다"면서 "징벌적 성격의 등록금 부과는 학생들의 교육환경을 더욱 열악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수는 "학생들을 자살로 이끌어간 징 벌적 등록금제는 경쟁과 협력이라는 상생의 가치가 아니라 승자와 패자의 논리를 교육에 도입한 것에 가깝다"며 지난 5 년간 학내에서 행해진 부적절한 정책과 스캔들의 책임을 지고 서총장이 용퇴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전산학과 3학년 한기종 학생은 교내 게시판 대자보를 통 해 "무한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을 배우는 교육이 아닌 창의 성을 함양하고 도덕적이고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는 교육을 제공해 달라"며 학부교육정책의 기조변화를 강력하게 요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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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에서 만난 한 학생도 "징벌적 등록금제와 영어수 업 강행 등이 이 같은 사고를 초래한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 는다"면서도 "학생들과의 소통이 없는 일방적이고 무리한 경쟁 위주의 개혁정책은 반드시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목 소리를 높였다.

이와 관련 학내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기존 정책을 대체 할 새로운 대안으로서 엄격한 부·복수 전공 신청 및 유예기 간 제공, 절대평가로의 전환 등이 거론되고 있기도 하다.

학사제도 개선 해결책 될까

KAIST 이사회는 4월 15일 오전 JW메리어트호텔에서 전체 이사 16명 중 15명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 임시이사회를 열 고 최근의 사태와 관련한 학사운영 개선 방안을 학교 측으 로부터 보고 받았다. 이날 KAIST는 지난 12일 발표했다가 5시간 만에 철회 한 학사제도 개선안을 그대로 보고했다.

개선안에는 성적과 연동해 등록금을 차등 부과하는 제도를 폐지, 학부 기간 동 안 수업료 전액을 면제하고 100% 영어강의도 교양과목은 제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학사과정의 학업 부담을 약 20% 경감하는 한편 입학 이후 2학기 동안에는 학사경고 를 면제한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다만 학점 2.95점 미만일 경우에는 수업료를 제외한 기 성회비를 납부해야 하며 입학 4년이 넘은 연차 초과자들의 경우에도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높이기 위한 차등 수업료 부과제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수업료를 징수하는 안을 추진 하기로 했다.

이사회에 참석한 대부분의 이사들은 서 총장 이 주도한 대학 개혁은 계속돼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학사운영 개선안은 교수와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해 완성된 내용을 추후 보고받기로 했다. KAIST는 또 학생들간의 과도한 경쟁을 방지하고 자유 로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같은 과 학생끼리 기숙사를 사 용할 수 있는 제도를 2~4학년까지 확대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학생들의 부담감 경감을 위해 물리, 수학 등 기초필수 과목을 줄이는 방안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같은 제도적 변화만으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을지는 미지수다.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동의를 얻는다 하 더라도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미명 하에 어쩌면 이런 논의에 서조차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소수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KAIST는 이번 사태가 현 상황이 주는 스트레스를 극복할 능력이 있고, 실제로 극복해 나가고 있던 절대다수의 학생들이 아닌 그 반 대상황에 놓인 극소수의 학생들로 인해 초래됐음을 인식해 야 할 것이다.

이들을 보듬지 못한다면 백약이 무효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박 박사는 "미국·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국내 대학의 자 살 방지 예방 프로그램은 상당히 취약하다"며 "'베르테르 효 과'를 차단하려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도 필요하지만 대학들 이 학생들의 정신건강을 다루는 정신보건센터를 강화하고 전문 상담요원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HOT] '징벌적 등록금제 폐지' 찬반 의견 팽팽




징벌적 등록금제의 폐지 여부를 놓고 KAIST 학생들의 의견이 팽팽하다. 폐지를 주장하는 학생과 현 상태를 유지하며 개선방향을 모색하자는 의견이 엇비슷한 비율을 보이고 있다.

4월 19일 KAIST 교수협의회에 따르면 학생 1,334명과 교수 42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성적이 일정 수준 이하의 학생에게 학비를 부과하는 차등 등록금 제도에 대해 학생들의 45%가 폐지에 찬성했으며 44%는 개선방향 모색, 8%는 대안 제시가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45%의 학생들이 징벌적 등록금제 폐지를 주장하고 있지만 현행 제도를 유지하면서 개선방향이나 대안을 찾자는 의견이 전체의 52%로 과반수를 획득한 것이다.

교수의 경우 57%는 폐지, 32%는 개선방향 모색을 원한다고 답했다. 영어 강의와 관련해서는 학생들의 53%가 지정과목에 한해서 실시, 34%는 교수에게 일임해야 한다고 답했으며 현행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은 13%에 머물렀다. 징벌적 등록금제보다 영어 수업에 많은 학생들이 더 큰 부담을 갖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교수들은 52%가 과목 특성에 맞춰 지정과목에 한해 실시해야 한다고 응답했고 38%는 담당교수에 일임해야 한다고 답했다. 현행 제도 유지는 10% 선이었다.

또 신입생들에게 일률적으로 선택하도록 하고 있는 디자인 과목에 대해서는 교수의 79%, 학생의 66%가 전공분야, 장래 희망 등을 고려해 학생 스스로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덧붙여 학생들의 정서함양과 인성교육 강화를 위한 조치로 교수들의 22%가 자발적인 체육·학술 및 창작 프로그램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답했고 21%는 창작 관련 과외활동 지원, 16%는 전문적인 심리 카운슬링, 15%는 졸업생 등 선배들과의 멘토 제도 활성화 등을 꼽았다.

동일한 질문에 학생들은 26%가 다양한 문화 및 창작 관련 프로그램 지원, 22%는 교수와의 만남 시간 증대를 위한 제도적 노력, 18%는 졸업생 등 선배들과의 멘토 제도 강화 등의 의견을 피력했다.


대덕=구본혁 기자 nbgkoo@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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