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종 업계에서 제 2의 삶 꾸린 이재완 쌍용차 부사장
이재완 쌍용차 부사장. 현대차와 기아차 상품기획을 총괄했던 그가 은퇴를 하고도 동종 업계에서 다시 뛸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한정연 기자 jayhan@hmgp.co.kr때로는 인연이 세컨드 커리어를 결정 짓는다. 6월 10일 평택 본사 5층 집무 실에서 만난 쌍용차 기술개발 부문장 이재완(58) 부사장 얘기다. 그는 쌍 용차와 촘촘하게 엮여 있다. 하지만 지난해 1월 부사장으로 영입될 때까지 만 해도 쌍용차와는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현대자동차 출신이다. 2008년 계열사로 이동하기 전까지 현대자 동차 부사장으로 상품전략총괄본부장과 마케팅총괄본부장, 전략기획실 장까지 요직을 두루 거쳤다. 부회장만 여럿인 지금처럼 직급 인플레이션 이 없었던 때다.
“부사장을 4년 하니까 CEO로 가든 계열사로 이동을 하든 뭔가 일이 있을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2008년에 계열사인 다이모스로 이동 했어요. 직장생활 32년을 정리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재완 부사장은 1년 후 다시 현직으로 돌아왔다. 회사 규모 는 첫 직장과 비할 수 없지만,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는 곳이었다. 내색 은 하지 않았지만 격무를 즐기는 그에게 잘 어울리는 역할이었다.
당시 이재완 부사장의 쌍용차행은 업계에서도 화제였다. 국내에서 거 의 유일한 자동차 상품기획 전문가인 그를 뽑아가려는 대학도 여럿이었 다. 편안한 대학 교수직을 마다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뚝뚝한 이 부사장이 “인연이라면 인연”이란 한마디 말을 던지고 다 시 창 밖을 내다봤다. 쌍용차는 지난해부터 올 초까지 상하이차의 먹튀 사건과 안팎의 충격으로 조직 자체가 크게 흔들렸다. 이 회사 법정관리 인은 이유일 현 사장이었다.
연구개발 R&D비용도 인력도 없이 보낸 시간이 오래였다. 쌍용차에겐 한 방이 필요했다. 중장기 제품 라인업도 다시 짜야 했다. 이유일 사장은 지난해 1월 상품기획 전문가인 이재완 부사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야 인으로 돌아가려던 이 부사장은 고민 끝에 이 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였 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시선도 곱지 않았다. 그래도 맺은 인연은 저버 릴 수 없었다. 쌍용차는 올 3월 인도 대기업인 마힌드라에 팔렸다. CEO 에는 이유일 사장이 낙점됐다. 이 부사장도 유임됐다.
이재완 부사장과 이유일 사장이 인연을 맺은 곳으론 흔히 미국기술연 구소를 꼽는다. 하지만 이들의 인연은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대 공대를 나오면 백지에 이름만 써도 합격이라던 말이 있던 시절이었다. 이 부사장은 대학 동기와 함께 현대그룹에 지원했다. 군대에 가기 전 사회 경험을 잠시 쌓자는 생각이었다. 지원회사도 현대건설 사업부에서 갓 독 립한 현대시멘트였다.
합격자 발표가 났다. 자신은 붙었는데 같이 간 친구가 떨어졌다. 회사 에 찾아가 항의를 했다. 한 젊은 과장이 두 친구의 항변을 가만히 듣고 있 다가 뜬금없이 “앞으론 자동차가 큰 산업이 된다”며 지원 회사를 바꾸라 고 설득했다. 이 젊은 과장이 바로 이유일 사장이다.
일단 진로가 정해지자 이재완 부사장은 특유의 추진력을 발휘했다. 그의 손에서 국내 첫 승용차인 포니가 나왔다. 소나타는 물론이고 기아 차를 살렸다는 평을 듣는 쏘울도 그의 마법이 걸려 있는 작품이다. 현대 기아차 모델 대부분이 그의 손을 거쳤다. 이 부사장의 대표작은 현대차 가 2000년 내놓은 SUV 싼타페다. 쌍용차를 일으켜 세웠던 뉴코란도의 아성을 무너뜨린 차다.
“세계 시장에 내놓을 차니까 해외에서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어요. 처음 디자인 품평을 하는데 영업부서와 여타 부서의 반대가 심했어요. 그만큼 혁신적인 제품이었습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밀어붙였죠.”
이 부사장은 싼타페로 당시 SUV 열풍의 진원지였던 쌍용차의 뉴코란 도를 잡았다. 10년 만에 200만 대가 팔렸다. 그는 이사에서 상무로 다시 전무로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최연소 진급이었다.
이재완 부사장에게도 실패는 있었다. 그 실패를 다시 기회로 바꿔준 것 이 쌍용차의 모기업이 있는 인도다. 이 부사장은 경차 시대를 일찍이 예감 했다. 가격이 저렴하면 수익도 적기 때문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았지만 1997년 9월 아토스를 출시했다. 첫해 반짝 성과를 보였지만, 불과 5년 만 에 단종이 됐다. 하지만 1998년 현대차가 인도 첸나이 1공장을 준공하면 서 아토스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소형차 비중이 80% 가까이 되는 인 도에서 상트로라고 불리던 이 차는 곧 ‘인도의 국민차’가 되었다. 인도에 서만 연 10만 대씩 팔려나갔다. 인도 기업인 마힌드라가 이 차의 개발 주 역인 이재완 부사장에 거는 기대가 큰 이유다.
동종 업계에서 여전히 같은 직급으로 왕성하게 일을 하고 있으니 그 가 은퇴를 한 적이 없는 듯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 오랜 직 장생활을 정리하고 학계에 투신할 참이었다. 지금 그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불과 1년 만에 다시 현장에 서있다. 그가 이제껏 일궈낸 성과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가 이례적으로 이재완 부사장의 쌍용차행을 대놓고 반대했던 이유도 마찬가 지다. 토요타가 이재완 부사장이 총괄하던 현대차 상품기획부문을 벤치 마킹할 정도로 그의 능력은 탁월했다.
동종 업계에서 은퇴 후에도 계속 중용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에 대해 이 부사장은 “이 사람 하면 떠오르는 성과를 내야 하지 않겠나” 하고 충고했다. 성과를 내려면 통찰력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자동차 산업은 제품 개발에 몇 년이 걸리는 고단한 분야입니다. 3년 후에 어떤 디자인이 유행하고 경쟁사가 어떤 제품을 낼지를 미리 예측하 려면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지식을 습득하는 것만으로는 힘들겠죠. 생각 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쌍용차에서 어떤 통찰력을 발휘하게 될까? 이 부사장은 쌍용차 부활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4륜 구동의 명가로서 스페셜 리스트가 되야 한다는 것과 규모가 크지 않으니 고급화 전략을 택해야 한 다는 것, 그리고 직원들의 통찰력이다.
그가 오기 전부터 개발 중이던 코란도C는 시장에서 큰 바람을 일으 키진 못 했다. 시장은 그에게서 뉴코란도와 렉스턴의 계보를 이을 새로운 SUV를 기대하고 있다. 체어맨의 후속작도 이재완 부사장의 숙제다. 인 도에서 1945년 지프차 조립업체로 시작한 모기업 마힌드라의 기대도 있 다. 순전히 그의 머리에서 시작될 차기작은 무엇일 될지 궁금한 것은 기 자만이 아니다.
이 부사장은 평소 균형을 중시했다. 현대차의 소비자 연령이 기아차보 다 조금 높아지면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 시작한 게 쏘울 프로젝트였다. 이 차는 결국 기아차로 갔지만 적어도 단초는 그랬다.
“쌍용차는 경차를 만들어야 탄소배출량을 적정 수준으로 맞출 수 있 습니다. 하지만 모델을 다양화하기보단 특화해야 하기 때문에 대형화와 고 급화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 점이 고민입니다.”
이 부사장은 “전기차를 만든다면 해결되겠지만...”하고 말끝을 흐린 다. 그라면 새로운 개념의 전기차를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업계에서 은퇴를 하자마자 동종 업계에서 같은 일을 했던 전례가 없던 것처럼, 그가 만든 전기차라면 달라도 한참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재완 부사장의 세컨드 커리어 관리법1/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라2/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하라3/ 실패에서 얻는 기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