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IT

종이 없는 세상이 온다

종이는 서기 105년 중국 후한시대 환관이었던 채륜에 의해 처음 발명된 이래 2,000여년간 인류와 동고동락을 함께 해온 동반자다. 역사를 담는 그릇으로, 문화예술가의 혼이 스민 작품으로, 소식을 전하는 소통의 도구로서 우리 곁을 지켰다.

이런 종이가 IT 기술의 발달로 사라지고 있다. 아니 종이 없는 세상이 구현되고 있다. 정보통신 기업을 중심으로 그동안 종이문서에 의해 처리했던 업무들이 전자문서로 대체되고 있는 것. 특히 스마트폰, 태블릿 PC, 클라우드 컴퓨팅 등의 등장은 그 이동에 가속도를 더해주고 있다.



김청한 기자 best@hmgp.co.kr

회사원 노종이 씨. 그는 얼마 전 건강검진 결과, 간에 이상이 있다는 소견을 받고는 정밀검사를 위해 대학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 도착한 그는 곳곳에 배치된 ‘u-Paperless 서비스’ 전용 태블릿 단말기를 찾아 검진 신청서부터 작성한다. 순서를 기다려 검진을 마치고 진료실에 들어서자 의사가 태블릿 PC를 살펴보고 있다. 단말기에는 그의 간 상태가 나와 있었다. 의사는 과음·과로에 의한 스트레스로 간수치 가 높으니 당분간 약을 먹으며 안정을 취하라고 진단했다. 그와 동시에 종이 씨의 스마트폰에 처방전 번호가 전송된다. 종이 씨는 병원 1층의 약국에서 이 번호를 제시하고 약을 받았다.

병원에서 나온 종이 씨는 스트레스도 풀 겸 오랜만에 여자 친구와 영화를 보기로 했다. 영화관에는 디지털 인포 메이션 디스플레이(DID) 시스템이 설치돼 있어 영화 포스터 관람, 티켓 정보 안내 서비스를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가방에서 태블릿 PC를 꺼내 내일 오전 예정된 회의 자료를 정리한다.

다음날 출근 후 종이 씨는 태블릿 PC를 들고 회의에 참석했다. 종이문서를 출력해 배포할 필요는 없다. 어제 정리해 놓은 자료가 사내 클라우드 서비스에 저장돼 있어 누구나 다 자유롭게 다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회의를 마치고 웹팩스로 거래처에 발주서를 넣는 것으로 종이 씨는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갔다.

종이 신문, 2026년 멸종?
이러한 종이 없는 사회는 사실 30년도 더 전인 1975년 이미 주창됐을 만큼 오래된 개념이다. 당시 제록스 팔로알토 연구소의 조지 페이크 소장이 유명 경제지 비즈니스 위크에 이의 도래를 예견했던 것. 이 예상은 빗나갔다. PC의 확산과 프린터의 대중화로 종이 사용량은 오히려 더 늘었다. 이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수치상으로만 보면 종이 없는 세상은 요원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한국전자문서산업협회 진흥사업팀 김진욱 과장은 “현재 업무상 사용 및 유통하는 문서 중 종이문서가 66.5%, 전자문서는 33.5%로 아직 종이문서의 비중이 2배 가량 높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미 종이 없는 사회로의 이행 징후는 사회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한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종이신문의 쇠퇴다. 최근 호주의 미래학자 로스 도슨은 미래전략 컨설팅 기관 퓨처 익스플로레이션 네트워크를 통해 종이신문의 종말을 예견하며 “미국의 종이 신문이 2017년 내로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종이 신문 멸종시기는 2026년경이다.

시점에는 이견이 있겠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도슨의 의견에 공감을 표시한다. 뉴욕타임스의 발행인 아서 슐츠 버거 회장은 작년 10월 “뉴욕타임스의 종이신문 발행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으며 MIT 미디어랩의 네그로폰테 교수 역시 “향후 5년 내 종이 신문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뉴스 뿐만이 아니다. 전자책의 약진은 많은 콘텐츠의 생산 영역이 종이에서 디지털로 옮겨가고 있음을 증명한다. 미국의 경우 올해 초 전자책 출판이 종이책을 앞지른 상태다. 미국출 판협회에 따르면 올 2월까지의 매출에서 전자책은 전년 동기 대비 3배 늘어난 9,030만 달러, 종이책은 8,120만 달러를 기록했다. 우리나라도 점점 전자 책의 비중이 늘어가는 추세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이 최근 조사한 자사의 2사분기 전자책 판매동향 자료에 따르면 전자책 구매를 위해 가입하는 신규 회원이 전체 전자책 구매자의 35%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전자책이 용경험이 있는 고객이 1사분기 대비 4.6배 증가했다. 알라딘 김채희 전자책 MD는 “스마트폰 보급률이 높아지며 전자책 대중화가 이뤄지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밝혔다.

한국전자출판협회가 작년 8월 발표한 전자출판산업동향에서도 국내 전자책 매출이 2010년 1,975억원에서 2011년 2,891억원 규모로 46%의 고도 성장을 전망하고 있다.

페이퍼리스 오피스
이런 트렌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 스마트폰, 태블릿 PC, 클라우드 컴퓨팅으로 대변되는 최근의 정보통신 기술이다. 이들을 활용해 종이 없는 사무실의 구현 노력이 최근 1년 사이 부쩍 늘고 있는 것.

페이퍼리스(paperless) 오피스로의 전환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통신업체다. 일례로 KT는 작년 12월 3만2,000 명에 달하는 전 임직원에게 아이패드를 지급하고 문서 작업, 사내 포털 등 PC로 처리해왔던 모든 업무를 아이패드로 다루도록 했다. 또한 영업·개통·AS 등 현장 업무 역시 아이패드로 가능토록 조치했다. 당시 KT STO추진실 김홍진 부사장은 “KT의 모든 임직원은 클라우드 컴퓨팅과 스마트워킹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이에 질세라 SK텔레콤도 지난 8월 직원 4,500명에게 태블릿 PC를 지급했으며 직원 1인당 50GB의 클라우드 저장 공간을 제공했다. 또 올해 말까지 데스크톱 가상화 인프라(VDI)를 구축해 외부에서도 태블릿 PC를 이용한 업무 수행을 가능케 할 계획이다.

이는 단지 몇몇 대기업의 상황만은 아니다. 작년 삼성경제연구소가 국내 경영진 44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 14%가 이미 모바일 오피스를 도입했으며 25%는 도입 중, 32%는 3년 내 도입 예정이라고 답했다. 종이 없는 사무실의 현실화가 그리 먼 얘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KT경제 경영연구소도 이와 비슷한 전망을 내놨다. 작년까지 3.4조원이던 모바일 오피스 시장이 2014년 5.9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 같은 시대적 변화에 맞춰 IT 기업들은 시장선점을 위한 관련 서비스 제공에 나서고 있다. 한글과컴퓨터는 종합 오피스 솔루션 ‘씽크프리’를 내세우고 있다. PC용 오피스인 씽크프리 오피스, 모바일 디바이스에 최적화된 씽크프리 오피스 모바일, 클라우드 기반의 오피스솔루션인 씽크프리 서버로 구성된 씽크프리는 높은 호환성으 로 MS 오피스의 파일 형식을 완벽하게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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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회사는 지난 9월 5일 국내 최초로 스마트TV 오피스 문서 솔루션 ‘씽크프리 오피스-스마트TV’를 출시하기도 했다. 이는 스마트 TV에서 오피스 문서와 e북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스마트 TV 전용 문서뷰어, 전용 문서 편집기 등을 제공한다.

의료계, 종이 없애기 열풍
또 하나 주목할 만한 바람이 부는 곳은 의료계다. 제약회사에서 속속 태블릿 PC를 이용한 모바일 오피스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 작년 12월 한국오츠카 제약이 아이패드를 영업사원에게 지급한 이후 잇따라 태블릿 PC 보급이 열풍처럼 번지고 있다. 올 3월 보령제약, 7월 동아제약에 이어 최근에는 JW중 외제약과 대웅제약에서 태블릿 PC를 업무에 활용 중이다.



제약업체의 기민한 움직임만큼 병원들도 바뀌고 있다. 이와 관련 중앙대 병원은 각종 신청서 및 동의서를 전자 문서로 대체하는 ‘u-페이퍼리스 병원 (u-Paperless Hospital) 서비스’를 구축, 8월부터 서비스에 돌입했다. 이 서비스는 태블릿 단말기 화면으로 입원 약정서 등 각종 신청서와 동의서에 전자사인을 받아 공인 전자문서 보관소와 병원 내 전자의무기록(EMR)에 보관하는 것이다. 병원 측은 이의 도입으 로 3년간 무려 180만장의 종이문서를 절약, 5억5,000만원 이상의 비용절감을 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에 앞서 지난 6월에도 분당서울대병원이 종이 없는 병원을 선언했다. 수납창구에 비치된 전산기기에 신분증을 스캔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신청이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구축한 것. 이와 함께 삼성창원병원, 미즈메디병원, 제천 명지병원 등 많은 병원들이 최근 1년 내 종이 없는 병원을 천명했다.

진본성 획득 및 법제도 정비 필요
그런데 종이 없는 세상으로의 이행에는 몇 가지 선결과제가 있다. 최대 쟁점은 바로 전자문서의 가독성과 편의성이다. 김 과장은 “종이를 대신해 전자적으로 정보를 표시하는 e-페이퍼는 메모가 어렵고 문서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단점이 있다”며 “ 때문에 고효율 컬러, 동영상 구현,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등의 기술개발이 요구된다”고 역설했다. 김 과장은 또 스마트폰과 태블릿 PC에 채용된 멀티터치, 자동조정 기능 등의 인터페이스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종이문서 사회적 비용 28조원
적지 않은 과제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이토록 종이 없는 세상을 외치고 있는 것은 종이를 사용하지 않는 데 따른 이득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지식 경제부의 분석에 의하면 기존 종이문서의 분류, 보관, 검색, 폐기 과정에 드는 사회적 비용이 연간 28조원에 달한다.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의 2010년 분석에서도 우리나라에서 발생되는 종이 문서는 연간 425억장에 달하며 기업당 평균 3억4,241만원이 종이문서 보관 에 소모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김 과장은 “정부의 전자문서 확산 정책에 의거, 2015년 131억장의 종이 사용을 절감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은 프로세스 개선 효과를 포함할 경우 총 10조3,000억원에 육박한다”고 밝혔다.

당연히 종이의 절약은 환경적으로도 바람직하다. 정보인쇄용지 제작을 위해 매년 425만 그루의 나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탄소배출량이 연 1,220만톤 규모에 이른다.

여기에 신산업 성장은 보너스다. 김 과장은 “전자문서 이용과 유통서비스 활성화로 관련 서비스 시장이 급성장할 전망”이라며 “2010년 2조9,000억원대인 전자문서산업 시장이 2015년 7조2,000억원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종이 없는 사회로의 이행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로 작년 12월 대통령직속 녹색성장위원회는 ‘녹색경제 활성화를 위한 전자문서 확산 방안’을 제시하고 오는 2015년까지 전자문서 사용 비율을 50%까지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안전한 전자문서 유통을 위해 포털의 이메일 주소와 공인전자문서보관소의 문서보관기능을 결합하는 공인 e-메일 사서함 제도, 환자가 병원에서 종이처방전 대신 처방전번호를 부여받아 조제 처방을 받는 e-처방전달시스템 등을 통해 종이 없는 사회 구축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물론 이는 시대적 당위성과 트렌드일뿐 정말로 우리 주변에서 종이가 사라질지는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종이문서를 선호하고 있으며 종이로 된 ‘원본’을 중시하는 관행이 사회 전반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과연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이 인류 문명의 오랜 동반자였던 종이를 역사의 뒤안길로 은퇴시킬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IT 컴플라이언스




전자문서를 활용한 종이 없는 시대의 도래가 예견되면서 향후 전자문서와 관련한 제도가 실질적으로 개인이나 기업의 운신에 큰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이와 관련 가장 먼저 꼽히는 것이 IT 컴플라이언스(IT Compliance)의 강화다. 이는 전자 문서를 통해 기업 회계와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IT 관련법 및 제도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IT 컴플라이언스는 기업의 특정 데이터를 일정기간 보존할 것을 의무화 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고려대 임종인 정보보호대학원 원장이 지난 5월 ‘u-페이퍼리스 코리아 포럼 & 컨퍼런스 2011’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는 데이터 보존을 의무화하는 1만여 개 이상의 규제가 존재하며 그 대상은 스캔자료, 미디어와 같은 콘텐츠 데이터에서부터 이메일, 메신저, 로그 기록까지 광범위하다. 예를 들어 상장기업들은 모든 비즈니스 기록을 최소 5년 이상, 이메일을 포함한 감사관련 문서를 7년간 보존해야 한다. 또 의료기관은 의료기록을 최소 6년, 환자의 사후 2년까지 보존해야 한다. 국내의 경우에도 의료법에 의해 의료기관이 환자명부 5년, 진료기록부 10년을 보관토록 하는 등 다양한 IT 컴플라이언스가 있으며 이는 앞으로 더욱 증가할 전망이다.

한편 전자증거개시제도(E-discovery)라 불리는 소송 관련 디지털 증거 보존 의무는 향후 법정에서 갖게 될 전자문서의 위상을 보여준다. 이는 소송 당사자들이 재판 개시 전 소송과 관련된 모든 증거를 상대방에게 제시할 것을 의무화한 조치다.

미국의 경우 이미 2006년 민사소송법 개정을 통해 소송당사자에게 소송과 관련된 모든 디지털 정보를 보관하고 법정에 제출하도록 법제화 했다. 만약 법정에서 디지털 증거 제출에 실패하면 상당한 벌금과 함께 불리한 판결을 감수해야 한다.

아직 국내는 전자증거 개시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송 서류를 인터넷으로 법원에 제출하는 전자소송제 등이 본격화되면 법 집행에 있어 전자문서의 중요성이 대폭 강화될 것이 자명하다.


파퓰러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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