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IT

데이터 세상에 대한 넋두리

불안감을 느끼고, 불안해한다는 것이 또 불안한 어느 작가가 내놓은 무한한 데이터 팽창에 대한 의견

By Lawrence Weschler

"우선 이 점부터 분명히 하자. 필자도 인터넷과 웹, 그리고 계속 팽창해가는 데이터 세상의 열렬한 팬이다."


언제부턴가 필자는 하루 종일 인터넷의 바다를 떠돌며 데이터를 찾아다녔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이것저것을 다운로드 받거나 복사하여 별도의 폴더에 넣어 놓았다. 하지만 아무리 반복해도 뭔가 부족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런 생활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뉴욕대학 인문학연구소장이자 직업 작가로서 필자는 종종 꺼림칙함과 불안감에 시달린다. 우리가 클라우드라고 부르는 거대한 데이터 창고의 존재 자체와 그 특성, 용도, 의미에 대한 것이다.

과연 데이터의 기하급수적 폭발이 양털처럼 하얗고 폭신폭신한 구름(클라우드)이 될 것인가? 아니면 위험한 물질을 마구 토해내는 화산 폭발이 될 것인가? 필자의 불안감은 단순히 말뿐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이런 디지털 정보의 폭발은 완벽히 비물질적이다. 절망적일 정도로 덧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세상에 영원히 보존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수세기를 지나며 데이터 보존 수단의 수명은 더 짧아지기만 하는 것 같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하드웨어가 옛것을 대체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카세트테이프, 플로피 디스크, 집드라이브, 레코드판 등 과거의 정보전달 매체는 이들을 해독할 기기가 사라질 때쯤이면 모두 노후화돼 해독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소프트웨어의 무자비한 발전 속도도 신경이 쓰인다. 2000년을 앞두고 컴퓨터 연도인식 오류(Y2K) 문제가 터졌을 때 ‘코볼(COBOL)’ 프로그래밍 언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사람은 극소수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기껏해야 수십 년밖에 안 된 코드를 풀고자 은퇴한 노인들을 모셔 와야 했다. 상황이 이러니 10년도 안 된 필자의 워드퍼펙트 파일이 걱정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점에서 클라우드는 일견 불안감을 해소 시켜줄 듯 보인다. 하드웨어라는 물질적 문제를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정보는 계속 업그레이드되는 여러 도메인 속에서 영생을 누리게 된다. 소프트웨어도 마찬가지다. 꾸준히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클라우드 속에서 불변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데이터뿐이다.

하지만 아직은 안심이 안 된다. 클라우드가 지금껏 나왔던 다른 기술적·개념적 해결 책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실례로 필자의 친구 에린 호건은 수년 전 ‘아트크러시(Artkrush)’ 라는 사이트에 뛰어난 평론을 하나 올렸다. 그녀는 최근 그 글을 다시 참고하려고 사이트를 찾았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그 원고는 그녀가 지금 사용 중인 컴퓨터의 세 번째 전 컴퓨터에만 저장돼 있다. 살아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닌 거다.

아마존의 킨들 e-북 콘텐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녀와 동일한 상황을 겪지 않는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아마존이 다른 앱스토어에 밀려 사라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그런 이가 있다면 넷스케이프의 운명을 떠올려보자. 이처럼 데이터의 무상함과 비(非) 실질성은 꽤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실체와 중요성
이게 다가 아니다. 또 다른 비 실질성도 불안감을 높인다. 바로 디지털 데이터 클라우드 자체의 비실질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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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대학생이던 1970년대 초반, 이런 불안감의 ‘초기 버전’에 마주쳐야 했다. 다름 아닌 슬라이드 영사기를 통해서였다. 당시 교수는 추상 표현주의의 대가인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슬라이드로 보여주며 화가로서 그의 삶과 일생을 강의했다.

그러던 중 필자는 한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미술관에서 그의 멋들어진 작품 수십폭을 다 보려면 최소 며칠은 걸릴 텐데. 슬라이드 대신 실제 그림을 본다면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지금과 동일한 관찰이 가능할까.” 그 후로 몇 년 뒤 필자는 미술가 로버트 어윈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수십 년간 자신의 작품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행위를 일체 금지했다. 사진은 절대 작품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게 이유다.

작품의 이미지를 비슷하게 재연할 수는 있지만 결코 작품이 주는 실재감까지 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문제는 인터넷에 의해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제 교수들은 ‘구글 이미지’를 믿고 강의 전 슬라이드를 순서대로 챙기는 일조차 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디지털 디자이너 애덤 톰슨은 “음반점에서 CD를 훔칠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웹에서 앨범 전체를 다운로드받는 것 역시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행동의 도덕적 옳고 그름을 떠나 필자는 그의 말 중에서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 이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는 정확히 맞는 말이다. 현재 그런 행동은 문자 그대로 굳이 생각할 가치가 없는 일로 여겨진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데이터는 실물과 달리 항상 무게감 없는 상태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원심력 대 구심력
세상을 대하는 이런 태도의 반대는 당연히 사물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무엇이 중요할까’, ‘왜 중요할까’, ‘이 물건은 정말 내게 중요해’와 같은 말을 한다. 영어로 ‘중요하다’는 의미의 ‘matter’는 어머니를 뜻하는 ‘mother’의 어원인 ‘mater’와 한 글자 차이다. ‘mater’는 또 물질을 의미하는 ‘material’ 의 어원이기도 하다. 즉 ‘중요하다’는 말은 실체가 있다는 뜻이며 비 실체의 반대라고 할 수 있다.

끝없이 늘어만 가는 데이터들을 생각할 때 필자는 또 다른 일 때문에 골치를 썩는다.

정보를 웹에서 접할 때와 책으로 접할 때의 차이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웹과 책은 근본적으로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책은 독자를 흡인하지만 웹페이지는 누리꾼들이 거역하기 힘든 수많은 링크를 통해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떠민다. 책은 구심력이지만 웹은 원심력인 셈이다.

주지하다시피 웹은 비 물질적이며 클라우드로 가는 통로다. 반면 책은 그 자체가 물질이다. 그래서 독자와 일대일의 관계를 형성한다. 마치 두 팔이 있어 서로 껴안고 춤을 추듯 말이다.

시인 릴케는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 강해질수록 서로를 한 울타리에 넣어 지켜주고 서로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책과 인간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에 비해 웹은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을수록 광란에 가까운 반응을 유발하는 존재에 더 가깝다.

여러 기사와 책을 쓴 필자는 글의 논지를 전개시켜 나갈 때 엄청난 고통을 느낀다. 정확한 단어를 선택하고, 논리를 세워 주장을 펼치며, 미묘한 각운을 띄우는 등의 작업에서 그렇다. 그리고 필자는 클라우드 속에서 누군가 튀어나와 필자의 글 중 일부를 붙잡고 늘어지며 공격해대고 도망가는 행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 기사와 책을 읽는 사람들 역시 자신의 자유로운 생각에 저자나 기자들이 전력을 다해 끼어들어 딴죽을 거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것처럼.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시대에 부는 강렬한 폭풍을 경험하고 있나요. 여러분이 구입한 것들 중에서 과연 무엇이 그 폭풍에 살아남아 견고히 서 있을 수 있을지요.

파퓰러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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