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역술경영 무엇이 문제인가

최고경영자는 늘 불안하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커지는데 자신은 끊임없이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 불안이 기업경영에 역술이 스며드는 지점이다. 역술경영은 적잖은 세월 동안 한국 기업 경영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끼쳐왔다. 뿌리 깊은 기업일수록 역술과의 인연도 깊다. 그러나 항상 끝이 좋지 않았다.

신기주 기자 jerry114@hk.co.kr

최태원 회장과 김원홍 고문의 관계는 처음엔 인연이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늘 사면초가였다. 아버지 최종현 회장이 1998년 8월 폐암으로 사망하면서 서른여덟 살의 나이에 재벌 총수가 되었지만 지지 기반이 너무 취약했다. 선대 회장이 갑작스럽게 타계한 탓에 후계 준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였다. 회장 자리를 물려받을 당시 최태원 회장이 보유한 (주)SK의 지분은 고작 0.07%에 불과했다. 최종현 회장이 최태원 회장에게 물려준 지분은 0.04%뿐이었다. 다 합해봐야 0.13%였다. 당시만 해도 SK그룹은 (주)SK, SK텔레콤, SK네트웍스, 다시 (주)SK로 이어지는 순환 출자 구조로 유지되고 있었다. 순환 구조의 핵심인 (주)SK의 지분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하지만 최태원 회장에겐 현금 자산도 별로 없었다. 상속세 700억 원도 5년 동안 분할 납부했을 정도였다. 최태원 회장은 돈이 필요했다.

최태원 회장과 SK그룹은 해결책을 파생금융 상품 투자에서 찾았다. 단기간 안에 합법적으로 큰 자금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1997년 SK증권의 다이아몬드 펀드 거래가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SK증권은 이 거래로 천문학적인 손실을 봤다. 파생상품 판매자였던 JP모건과는 법적 분쟁까지 갔다. SK증권이 이 손실을 다른 계열사들로 떠넘겼던 게 2003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SK글로벌 분식 회계 사건의 단초였다.

결국 최태원 회장은 계열사를 통한 공식 투자가 아니라 비공식적인 개인 투자로 방식을 바꿨다. 최 회장은 2001년 무렵부턴 브이소사이어티란 금융계 친목 모임을 만들어서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브이소사이어티를 통해 알게 된 투자 전문가들을 통해 몇몇 부실채권 인수에까지 뛰어들었다. 그러다 다시 사달이 났다. 또 다시 해외 선물 투자에서 큰 손실을 봤다. 당시 최태원 회장을 대신해서 SK그룹을 이끌던 손길승 회장이 1998년부터 2002년까지 5년 동안 SK해운을 통해 1조 원을 조성해 7,800억 원을 투자했다가 6,300억 원 이상을 날리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 투자가 손길승 회장의 개인 비리일 리가 없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끝내 최태원 회장은 2003년 2월 분식 회계 혐의로 구속 수감됐고 손길승 회장 역시 2004년 1월 수인복을 입어야 했다.

잇따른 무리수는 외부의 적을 문 앞까지 끌어들이는 악순환을 낳았다. 최태원 회장이 경영권을 방어할 여력이 넉넉하지 않다는 걸 알아차린 소버린이 2003년 4월 (주)SK에 대한 적대적 인수 합병을 선언한다. 자신이 구속된 상황인 데다가 실탄도 넉넉하지 않았다. 비장의 무기로 꺼내 들었던 해외 선물 투자까지 실패하자 최태원 회장은 소버린과 표 대결까지 가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크레디트스위츠를 통해 (주)SK의 지분 14.99%를 매입한 소버린은 당당하게 최태원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때 최태원 회장과 SK그룹 일가가 선택한 돌파구 가운데 하나가 공연제였다. 쉽게 말해 굿이었다. 2003년 8월은 최종현 선대 회장의 5주기였다.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최종현 회장의 5주기 추모 행사는 사실상 무속인이 주관하는 위령제였다. 무속인이 몇 시간씩 제사를 지내면서 기원을 했다. 고 최종현 회장이 단전 호흡에 매료됐고 영혼 문제에 해박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파생상품 투자와 역술은 SK그룹과 최태원 회장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 관계가 있었다는 얘기다.

최태원 회장과 김원홍 SK해운 전 고문이 처음 만난 건 이 무렵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원홍 고문은 역술인이자 선물 투자 전문가였다. 김 고문은 1990년대 증권사에서 근무했다. 투자에 눈을 뜬 것도 이때였다. 김원홍 고문은 직접 투자에 나섰고 강남 물주들의 돈을 불려주면서 명성을 얻었다. 특이한 건 김원홍 고문이 역술인을 자처했다는 점이었다. 실제 역할은 투자 자문사나 자산 운용사와 흡사했지만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김원홍 고문은 선물 투자를 전문으로 삼았다. 선물 투자란 미래의 일정 시점에 주식이나 실물을 약속한 가격에 팔거나 사기로 계약하는 파생상품이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주가나 실물 가격이 얼마가 될지를 점 찍는 짓이기 때문에 역학이나 도박과 닮은 구석이 있다. 주가를 예견하는 게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원홍 고문은 선물 투자를 통해 고수익을 올렸다. 불가항력적인 예측력은 신통한 신통력으로 채색됐다. 이틀 뒤 주가 지수를 미리 알아맞혔다는 전설도 이때 생겨났다. 김원홍 고문은 경주 태생, 고졸 출신으로만 알려져 있다. 익명을 요구한 증권가 관계자는 말했다. "고졸이든 아니든 일반적인 조건만 보면 재력가들에게 거액의 뭉칫돈을 투자받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신통력이니 역술인이니 하는 외피는 일종의 마케팅 전략이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러다 최고 대어인 SK그룹 총수를 고객으로 만나게 됐겠죠." 최태원 회장은 김원홍 고문을 통해 초기엔 상당한 수익을 거뒀다. 선물 투자로 10배 가까운 수익을 낸 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원홍 고문은 최태원 회장과 SK일가의 이목을 끌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는 얘기다. 역술인이었고 선물 투자 전문가였고 성공적인 트랙 레코드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때까지 최태원 회장을 괴롭혀왔던 모든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해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최태원 회장은 2010년 김원홍 고문의 선친이 작고하자 직접 조문을 갔다. 가족이 아닌데도 49재 때 다시 문상을 갔다. 그만큼 최태원 회장은 김원홍 고문을 지근거리에 뒀다. 최태원 회장과 김원홍 고문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재벌과 역술

최태원 회장처럼 무속인을 조언자로 곁에 두는 경우는 재계에선 드문 일도 아니다. 최태원 회장이 유달리 가까이 뒀을 뿐이다. 2000년 3월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이 현대그룹 경영권을 놓고 왕자의 난을 벌일 때도 역술이 등장했다. 정몽구 회장이 먼저 정몽헌 회장의 측근인 현대증권 이익치 회장을 인사 조치하면서 촉발된 왕자의 난은 당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난국이었다. 사실 현대그룹 내부적으론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의 역할 분담이 끝난 상황이었다. 정몽구 회장이 자동차 부문을 이끌고, 정몽헌 회장이 전자와 건설을 맡고, 정몽준 의원이 중공업을 이끄는 큰 그림이었다. 문제는 현대증권을 위시한 금융 부문이었다. 정몽구 회장이 이익치 회장을 고려산업개발로 전보 조치하면서 금융 부문 쟁탈전의 선전포고를 한 셈이었다. 하지만 지분 구조만 놓고 보면 정몽헌 회장이 한 수 앞서 있었다. 정몽헌 회장은 현대그룹의 자금줄인 현대상선의 지배주주였고, 현대상선은 현대증권의 대주주였다. 정몽헌 회장은 이익치 회장의 전보 조치를 원점으로 돌려놓으면서 거꾸로 형인 정몽구 회장을 해임시켜버렸다.

수세에 몰린 정몽구 회장의 측근이 강남의 유명 역술인을 찾은 건 그 무렵이었다. 당시 역술인은 정몽구 회장 측에게 이렇게 조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7월까지만 버티면 길이 보일 겁니다." 사실 현대가는 역술인들이 오히려 기피하는 재벌가로 꼽힌다. 익명을 요구한 강남의 재계 전문 역학자는 말한다. "정주영 선대 회장 시절부터 현대가는 역술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보통 재벌가가 역술인을 찾는 방식은 안주인을 통해서인데, 현대가 안주인들은 함부로 바깥 출입을 잘 안 하는 편이었거든요. 집 안으로 역술가를 불러들이는 일 같은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죠. 그러니 회장님들과 마주 앉아서 사주 풀이를 하는 건 있을 수 없었어요. 어느 역술인이 현대가의 기를 이겨낼 수 있겠어요." 하지만 그런 현대그룹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측근을 통해서나마 역술의 조언을 구했던 셈이다. 실제로 유명 역학자인 용회수 씨는 생전에 정주영 회장을 몇 번 독대한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용회수 씨는 최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 회장이 사람을 시키지 않고 직접 전화를 걸어와서 몇 차례 독대했습니다. 이름에서 '주' 자를 보면 길한 기운을 덮고 있는 형국이니 서명을 할 때 글자의 세로 획이 위로 뚫고 나오게 쓰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정 회장이 껄껄 웃더니만 그 뒤로 그렇게 서명을 하면서 해외 사업을 곧잘 했었지요."

삼성그룹도 선대 이병철 회장 시절부터 역술과 오랜 인연이 있다. 신입 사원 면접을 볼 때 역술인을 동석시켰던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용회수 씨 역시 이병철 회장한테 삼성그룹의 여러 건물터를 조언했다고 증언했다. 동양철학과 동양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이병철 회장은 역학이나 풍수지리에도 해박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이 작고한 뒤로 삼성그룹과 역학의 인연은 공식적으로는 멀어졌다. 익명을 요구한 강남의 유력 역학자는 말한다. "이건희 회장은 이쪽엔 도통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홍라희 여사님이 불교 쪽과 깊은 인연이 있으셔서 인연이 닿는 무속인이 좀 있는 것으로는 알고 있습니다만, 그것도 선대 회장님처럼 경영과 연관되는 일은 아닌 것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고 이병철 회장과 역술에 얽힌 일화는 재계 전반에 역술이 퍼지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익명을 요구한 역술인은 말한다. "한때는 꽤 많은 회사의 신입 사원 면접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곤 했었습니다. 물론 응시자들은 제가 누군지 모르죠. 그저 면접관이거나 회사 임원인 줄 알았겠죠. 저 역시 평범한 질문들을 던집니다. 대신 저는 답변보다는 답변할 때 드러나는 관상이나 사주 같은 것을 봤어요." 이병철 회장이 신입사원 면점을 볼 때 관상을 봤단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다른 기업인들도 일종의 벤치 마킹을 한 셈이었다. 풍수지리 역시 마찬가지다. 삼성그룹의 반도체 공단이 자리한 기흥은 이름 그대로 도자기가 흥한다는 의미다. 반도체는 세라믹인 만큼 기흥과 인연이 깊을 수밖에 없다. 이병철 회장이 기흥과 수원 일대를 중요시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에버랜드 자리를 정하고 건물 위치를 정할 때에도 지관을 대동했었다. 기흥이 지명을 바꾸려 하자 삼성그룹 측에서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풍수지리는 재계에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역술이다. 중견 건설사들 대다수가 아파트 단지를 정할 때나 사옥을 건립할 때 풍수지리를 활용한다. 풍수지리에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고 볼 수 있어서다. 풍수지리에 따라 위치를 선정하면 실제로도 에너지 효율이 높고 쾌적한 경우가 많다. 도시 계획을 할 때도 풍수지리가 이용된다. 충남 계룡시 대실지구의 경우엔 상업지역을 일부러 풍수지리상 재물이 모인다는 지역에 배치했다. 이병철 회장의 장손인 이재현 회장이 이끄는 CJ그룹 역시 풍수지리를 널리 활용해왔다. CJ그룹은 소유한 멀티플렉스 체인 CGV가 새로운 극장 자리를 잡을 때 기문둔갑 전문가에게 의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문둔갑이란 손자병법을 쓴 손자가 창시하고 촉나라의 재상 제갈공명이 완성한 일종의 병법이다. 땅의 지세를 살펴서 전략적으로 가장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술법이다. 기업 경영의 측면에서 보자면 도심 안에서 가장 재물의 기운이 높은 건물을 찾아내는 데 활용할 수 있다. CJ그룹이 돈과 사람이 모이는 곳에 극장 자리를 잡아놓은 셈이다.

결국 풍수지리, 관상, 사주, 기문둔갑, 택일, 점괘 같은 역술 원리들이 실제로도 기업 경영에 적잖은 영향을 미쳐왔단 얘기다. 하지만 대부분 겉으론 드러나지 않는다. 역술이 기업 경영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언제나 최고경영자와의 개인적이고 은밀한 소통을 통해서였다. 최고경영자의 가족이나 측근을 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드물게는 최고경영자 본인과 직접 통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업은 조직이지만 CEO는 인간이다. 역술은 조직에겐 안 통하지만 언제나 사람에겐 먹힌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조직을 움직일만한 힘이 있다면 기업 활동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기업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래왔다. 익명을 요구한 강남의 유명 역술인은 말한다. "분명한 건 지금도 적잖이 역술이 행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사업하는 집안치고 부적하나쯤 없는 집이 없죠. 중견 기업들은 물론이고 이름난 대기업들일수록 더 은밀해지고 있어요. 재벌가를 상대하는 역술인은 일반 고객은 상대 안 하는 게 관례죠. 아마 이번에 이름이 알려진 김원홍 씨도 그런 경우였을 겁니다. 상당수 뿌리 깊은 재벌가들이 왕래하는 뿌리 깊은 역술인들이 한두 사람 정도는 있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이른바 역술경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역술 경영은 뿌리 깊은 나무다.

경영과 역술

휴먼멘토링의 노해정 대표는 경제 관련 역학자로는 대표 주자다. 단순히 주역만 공부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서강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주가 지수와 사주의 상관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노해정 대표는 역술경영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노해정 대표의 이론은 간결하다. 기업의 재운은 기업에 근무하는 임직원들 재운의 총합이다. 따라서 임직원들 하나하나의 사주를 다 뽑아서 재운을 분석하면 해당 기업의 내년 전망을 해 볼 수 있다는 논리다. 실제로 노해정 대표는 이런 원리에 따라서 일반 기업체의 입사 면접에 참여한 적도 있었다. 노해정 대표는 말한다. "기업 오너들은 특히 임원들의 사주에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아무래도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그걸 실행할 임원들의 재운이 어떤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노해정 대표는 주가 지수 역시 시장에 참여한 투자자들 전체의 재운에 따라 변화한다고 본다. 경영대학원에서 발표할 논문 주제 역시 주가 지수와 투자자 재운의 상관 관계다. "실제로 코스피 지수와 재운의 변화 사이에 인과 관계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걸 활용하면 내년 전망은 좋지 않은 편이죠. 재운이 사그라지는 형세니까요. 육십갑자를 따져봐도 큰일이 많이 일어날 해입니다."

익명을 요구한 중견 금융사 CEO는 말한다. "역술경영이랄 것까진 없지만 많은 CEO들이 역술인을 찾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좀 다릅니다. 판단을 해달라고 가는 게 아니라 판단을 확인하러 가는 거니까요." 그는 덧붙인다. "제가 아는 CEO 가운데 한 사람은 실제로 많은 역술인을 찾아다녀요.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답변이 나오지 않으면 또 다른 역술인한테 가죠. 이미 마음속에 답이 있으니까 원하는 답이 맞다는 얘기를 들을 때까지 점을 보는 겁니다. 그게 무슨 역술입니까." 노해정 대표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저를 찾아오는 대부분의 기업인들도 이미 결정을 내려놓고 오는 경우가 많아요. 오랜 검토 끝에 결정을 내려놓고 자신의 결정이 음양오행의 이치와도 일치하는지 확인하려고 오는 거죠. 그러니까 역술인을 찾는 기업인은 요행수를 바란다기보단 거꾸로 더 치밀하다고 봐야 합니다."

역술경영은 전략적인 차원보다는 심리적인 차원에서 작용하게 된다는 뜻이다. 역술이 의사 결정 과정에서 반드시 느낄 수밖에 없는 불안감을 해소시켜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단 얘기다. 그래서 제조업 분야에선 오히려 역술경영이 순기능을 할 수도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타당한 공장 부지를 찾는다거나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면서 이미 전술적 검토를 다 끝낸 다음 역술적 확인 절차를 밟으면서 심리적 불안을 해소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자동차든 철강이든 반도체든 제조업은 하루하루 시황이 바뀌지는 않는 데다 과학적인 시장 분석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에 중장기적인 판단이 요구되는 분야다. 한국 기업들은 수십 년 동안 이 분야에서 사업을 전개해오면서 상당한 데이터를 축적해 왔다. 예측이란 결국 과거의 패턴이 반복될 것이란 가정에서 출발한다. 제조업 분야에선 패턴 예측이 가능하고 분석력도 상당하다. 점괘 때문에 오늘 내린 결정을 내일 뒤집을 수 없는 분야란 의미다. 많은 대기업들의 선대 회장들이 역술경영을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도 사업 성격에 따라 이용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역술경영은 한국 재계만의 특징은 아니다. 익명을 요구한 중견 금융사 CEO는 말한다. "미국에서도 레이건 대통령의 영부인 낸시 여사가 백악관에서 수정 구슬 주술을 했었다는 일화가 유명하죠. 일본 역시 신사가 발달한 만큼 기업인들이 다양한 종교적 조언을 구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결국 불안감과 스트레스가 문제인 겁니다. CEO는 외로운 자리입니다. 결국 혼자라는 걸 알게 되죠. CEO들은 저마다 그 중압감을 이기기 위한 자기만의 방법을 갖고 있어요. 훌쩍 산에 가기도 하고 운동을 하기도 하죠. 역술 역시 그런 방법 가운데 하나일 수 있는 겁니다."

금융과 역술

하지만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선친이 남겨준 SK그룹을 외국계 헤지펀드에게 통째로 빼앗기게 되는 상황이라거나, 역시 선친이 남겨준 한화그룹을 명동의 사채 업자에게 넘겨줄 위기라거나, 대규모 선물 투자를 할 작정인데 주가 향방을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라면, 역술경영은 단순한 확인 차원을 넘어선다. 불안감 해소 차원을 넘어 의사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금융과 부동산은 제조업과 달리 장기 예측이 어렵다. 과학적인 변화보단 심리적 변인이 더 큰 분야다. 시장 참여자들의 심리에 따라 비이성적으로 부풀어올랐다가 식었다를 반복하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역술 전문가도 늘어나는 추세다. 제조업 분야와 달리 불확실성이 상존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금융 분야에선 블랙스완이 자꾸만 늘어나는 추세다. 예외적인 상황이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면 시장은 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익명을 요구한 자산운용사 전직 대표는 말한다. "증권가에서도 역술투자가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여의도 안에도 역술원이 있습니다. 다만 드러내놓고 고객들을 상대하지는 않죠. 역술이 관여하게 되는 순간은 매수 타이밍과 매도 타이밍을 결정할 때입니다. 펀드 매니저들의 전문성도 이때 드러나게 되니까요. 역술투자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타이밍 선정을 할 때 자신감을 얻는 방책으로 쓰이긴 하죠." 노해정 대표는 말한다. "주가 흐름과 사주의 변화와 별자리의 운행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선물 투자 같은 고위험 투자를 할 땐 이런 관련성을 따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자산운용사 대표는 말한다. "2011년 장세처럼 변동성이 큰 유동성 랠리가 이어질 때는 단타 매매를 하는 투자자들이 역술원을 찾는 일이 잦아집니다. 시장 주기에 따른 투자를 오래 해온 투자자라면 시장을 예측할 수 있다고 믿게 되기보단 시장을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믿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운칠기삼을 믿게 되죠. 물론 역술원에 간다고 팔라 말라 얘기를 해주진 않죠. 대신 큰 투자를 앞두고 자신의 운을 확인해볼 순 있어요." 음양파동론과 주가의 상관 관계에 대한 연구는 여의도 펀드 매니저들 사이에서도 흥밋거리로 널리 읽힌 적이 있었다. 모두가 예측 불가능한 시장을 예측해보려는 시도였다.

한국밸류투자의 이채원 부사장처럼 주기적 투자가 아니라 장기 가치 투자를 하는 펀드 매니저는 역술 자체를 경계한다. "여의도 안에 그런 역술원이 있단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주식과 관련된 점을 전문적으로 치는 역술원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제 주변에서 그곳을 찾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처럼 가치 투자를 하는 투자자들에겐 사실 시장 예측은 의미가 없어요. 기업의 진짜 가치를 보고 투자하는 것이지 오늘과 내일의 주가 변동성을 따져서 시세차익을 노리는 게 아니니까요." 피데스 투자자문 자산운용의 김한진 부사장 역시 같은 얘기를 한다. "주식 투자는 주가 지수를 예측하는 일과는 다릅니다. 과학적인 분석에 따라 하는 일이죠."

이렇게 증권가 안에서도 역술경영에 관한 전혀 상반된 인식과 이해가 존재하는 상황이다. 어느 쪽에선 금시초문이란 입장이지만 다른 쪽에선 시장을 움직이는 심리적 변인 가운데 하나라는 견해를 보인다. 분명한 건 장기 가치 투자를 추구하는 쪽에선 역술에 무관심한 반면, 도박성이 강한 파생 상품 투자에 손을 댄 경우엔 역술경영에 흥미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결국 관건은 사람이다. 경제는 심리이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말한다. "시장 참여자들이 내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많이 느낄 때 역술적 조언을 구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모든 정보를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죠. 그 불안감은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모릅니다." 역술경영은 시장의 불안을 조종하는 요소다.

불확실성의 시대

"삼성경제연구소 탓이죠." 익명을 요구한 금융사 CEO는 말했다. 키코 얘기였다. 키코는 환율변동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파생 상품이다. 환율이 일정 구간 안에서만 변화하면 안전하지만 지나치게 높아진다거나 지나치게 낮아지면 거꾸로 계약한 기업이 손실을 보도록 설계돼 있다. 애당초 키코 상품은 계약자에겐 불리한 구조였다. 하지만 사실 키코 상품 같은 파생 상품의 설계 원리 자체가 도박성이다. 예측이 불가능한 환율이 일정 구간 안에서 움직일 것인지 아니면 크게 변동성을 보일 것인지 내기를 걸어서 진 쪽만 손실을 입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대다수 금융 파생 상품들이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놓고 내기를 붙이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 기업인들이 불안하게 여기는 건 언제나 미래다. 파생 상품은 잘만 하면 미래의 불확실성을 제거해줄 수 있다는 식으로 투자자들을 유혹한다. 금융사 CEO는 말한다. "확실한 정보만 있다면 이런 내기에 누구나 뛰어들게 됩니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건데, 키코의 경우엔 삼성경제연구소가 내놓았던 환율 예측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요. 당시 키코 판매를 할 때 삼성경제연구소의 환율 예측치를 제시하면서 안전하다는 식으로 마케팅을 했었거든요. 그렇다고삼성경제연구소가 키코 상품 판매의 도의적 책임을 졌느냐면 그렇지 않죠. 그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사실 대다수 한국 기업인들은 미래를 예측할 정보도 분석력도 부족한 상황에 처해 있다. 대기업들처럼 미래전략실을 만들어 시장 예측을 할 수 없다면 결국 언론이나 경제연구소들의 전망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실제로 공개된 전망치들이 맞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키코의 사례처럼 치명적인 손실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국민대학교 기업경영학과 유지수 교수는 말한다. "한국의 경영인들은 항상 정보 부족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언제나 판단의 근거는 모자란 상황이죠. 역술경영은 그럴 때 등장하는 겁니다. 그건 거꾸로 시장의 불확실성이 자꾸만 커지고 있다는 얘기와도 통하죠." 익명을 요구한 자산운용사 전 대표도 이에 동조한다. "한국 경제는 항상 불확실성이 너무 커요. 좋게 말하면 다이내믹하다는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거죠. 아무리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해도 그 판단이 불합리하게 어긋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까요. 키코의 경우도 그런 거 아니겠어요. 합리적 근거에 바탕을 두고 신뢰할 만한 금융 기관이 판매한 상품이었는데 사실상 사기에 가까웠잖아요."

탈역술경영의 시대

마이클 레이너는 저서 '위대한 전략의 함정' 에서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오히려 예측 자체를 포기하는 게 낫다는 주장을 펼친다. 유지수 교수는 말한다. "아무리 치밀하게 준비해도 돌발 변수가 발생하더란 거죠. 오히려 치밀하게 준비한 계획 때문에 임기응변이 늦어지는 경우가 있더란 겁니다." 그는 덧붙인다. "한국의 오너 리더십은 아직도 스스로 많은 걸 예측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어요. 1세대 경영인들은 예측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어요. 미래 자체가 없었으니까요. 미래는 만들어가야 하는 거였죠. 2세대 경영인들은 예측이 가능했어요. 대신 자신의 예측이 맞을지에 대한 엄청난 중압감을 짊어져야 했죠. 아마 이 때 역술경영이 등장했을 겁니다. 그 심리적 중압감을 이겨내야 했으니까요. 또 예측이 빗나갔을 땐 재빨리 임기응변으로 전략을 바꿔야 했기 때문에 비대한 조직이 요구됐죠. 항상 플랜B를 준비하고 있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앞으로 3세대 경영인들에겐 그런 식의 예측이나 대응이 어려워질 겁니다. 스스로가 역술인처럼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있다고 자처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역술경영이 진짜 역술경영인 이유는 기업인이 역술인에게 판단을 의존하기 때문이 아니다. 유명 역술인들과 중견 CEO들이 한목소리로 얘기하는 건 언제나 판단은 최고경영자의 몫이라는 사실이다. 역술인이 판단을 대신 내려주는 경우는 없다. 심적 영향을 끼칠 뿐이다. 판단의 근거 가운데 하나로 활용될 뿐이다. 그건 이미 최고경영자가 역술인 못지않게 미래를 내다보고 있단 뜻이다. 자기 혼자만의 판단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이미 스스로 미래 통찰력이 있다고 믿는다는 얘기다. 익명을 요구한 중견 금융 CEO는 말한다. "항상 망하는 경우는 최고경영자가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100% 확신할 때 일어납니다. 확신을 갖고 베팅을 크게 할 때 무너지죠." 유지수 교수는 말한다. "앞으로 3세대 경영인에게 요구되는 건 자신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모두 함께 결정하게 만드는 능력일 겁니다. 수평적 리더십인 거겠죠. 한국 기업도 더 이상 탁월한 한 사람이 모든 걸 책임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습니다." 역술경영의 많은 사례들이 1세대나 2세대 경영자들과 얽혀 있는 이유다. 1세대와 2세대 경영자들은 역술경영이라도 해야 할 만큼 초월적인 능력을 요구받았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예측하고 없는 미래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CEO가 더 이상 장군이거나 예언자일 수는 없다.

CEO의 중압감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도 필요하다. 결정을 내리는 자리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으려면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익명을 요구한 외국인CEO는 조언한다. "한국에서 기업인들이 연말 같은 때에 점을 치러 가는 걸 보면서 처음엔 동양적인 문화인가 보다 싶었어요. 나중엔 그게 불안해서 라는 걸 알았죠. 미국 기업 문화에선 이런 불안을 경영자들끼리의 인적 교류로 해소하는 것 같습니다. 내 판단이 옳은지는 내가 확인해 줄 수 없죠. 주변의 CEO들과 정보를 나누고 의견을 교류하면서 자기 판단에 대한 확신이 서는 겁니다. 고립된 채 혼자서 판단하려는 CEO일수록 다른 힘에 의지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겁니다." 결국 다음 세대 경영진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전지전능한 예언력이 아니라 인간적인 소통력이란 얘기다.

역술의 악연

최태원 회장과 김원홍 고문의 관계는 결국 악연으로 끝났다. 최태원 회장과 동생 최재원 부회장은 김원홍 고문에게 선물 투자를 일임했다. 결국 1,000억 원대의 큰 손실을 봤다. 소버린의 적대적 인수 합병 도전을 가까스로 뿌리쳤지만 최태원 회장은 여전히 지지 기반이 취약한 상태였다. SK C&C를 상장시키고 (주)SK를 지배하게 만들어 다소나마 지배력을 강화하긴 했지만, 지주회사인 (주)SK 위에 다시 지주회사의 지주회사 격인 SK C&C가 자리한 기형적인 구조가 형성됐다. 최태원 회장이 SK C&C 지분 44.5%를 보유하고, SK C&C가 (주)SK의 지분31.8%를 확보하는 형태다. 최태원 회장의 (주)SK 지분이 고작 0.13%였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많이 안정됐다. 그러나 이중 지주회사 구조인 탓에 내부나 외부에서 누군가 적대적 인수합병을 시도할 경우에 방어할 현금이 필요하다.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이 10년 전처럼 다시 한번 선물 투자에 손을 댄 이유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론 10년 전 실수를 반복한 꼴이 됐다. 갖고 있는 계열사 주식 대부분을 처분하고 담보까지 잡혀서 4,000억 원대 현금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검찰은 총수 일가가 회사 돈을 빼돌려 개인 투자에 활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손길승 회장의 혐의와 같은 내용이다. 10년 전엔 SK증권의 투자 손실을 계열사로 전가했다가 분식 회계 혐의로 사법 처리됐었다. 그리고 10년 전처럼 이번에도 선물 투자 실패가 문 앞으로 적을 불러들인 꼴이 됐다.

올해 초부터 SKC의 최신원 회장이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신원 회장은 최종건 SK그룹 창업주의 장남이다. 최태원 회장의 사촌 형이다. 최종건 회장이 일찍 별세하면서 SK그룹의 경영권은 동생 최종현 회장한테로 넘어갔다. 최종현 회장은 통신과 정유 사업에 뛰어들면서 지금의 SK그룹을 일궈냈다. 최신원 회장은 오랫동안 은둔의 경영자였다. 언론 노출도 극도로 꺼렸다. 그러다 올해 초 갑자기 최태원 회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SK의 창업 정신이 흔들리고 있다" 는 폭탄 발언을 했다. 그땐 이미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의 선물 투자 실패가 공식화된 시기였다. 창업주의 적자가 현 회장의 실책을 비난하고 나선 셈이었다. 10년 전 소버린 역시 최태원 회장의 경영 실책을 적대적 인수 합병의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거기 어디에도 김원홍 고문은 없었다. 선물 투자 실패만 없었다면 최태원 회장은 다시 사면초가에 빠지지 않았다.

역술경영은 늘 끝이 안 좋았다.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은 실패자였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애써 지켜냈던 한화종금은 외환위기 와중에 사라졌다. 역술경영이 실패하는 이유는 역술이 미래를 잘못 예측했기 때문이 아니다. 미래를 예측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역술경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자신만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이 역술경영의 약점이다. 최태원 회장과 김원홍 고문은 악연일 수밖에 없었다.

역술경영의 사례들

1996년 12월부터 1997년 2월까지 이어졌던 한화종금 경영권 분쟁은 사실상 한화그룹의 경영권까지 달린 치열한 싸움이었다. 한화종금의 원래 이름은 삼희투자금융이었다. 1980년대 한국 증시를 주물렀던 전설적인 큰 손 백할머니와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공동 출자해서 설립한 회사였다.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도 백할머니에게서 투자 기초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애초에 우호적이었던 백할머니와 김승연 회장은 삼희투자금융이 덩치를 키우면서 패가 갈렸다. 김승연 회장 측은 증자 과정에서 지분율을 유지하면서 지배 주주가 된 반면에 백할머니 측은 2대 주주로 내려 앉았다. 결국 김승연 회장은 삼희투자금융을 한화그룹 계열사로 편입시키면서 한화종금으로 간판까지 바꿔 달았다. 백할머니 측은 반발했다. 신극동제분을 백기사로 삼아 지분 대결을 시도했다. 백할머니의 아들 박의송 회장이 전투를 진두 지휘했다. 몇 차례 법적 공방이 오간 뒤 결국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로 승패가 갈렸다.

한화종금 주주총회는 1997년 2월 13일 종로구 수운회관에서 열렸다. 김승연 회장 측이 주주총회 장소를 일부러 수운회관으로 정했다. 이유가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말한다. "주주총회를 앞두고 김승연 회장의 모친이 무속인을 찾아가 점을 쳤어요. 그랬더니 한화 김승연 회장은 바다의 용이고 백할머니의 아들 박의송 회장은 육지의 용이란 점괘가 나왔다지요. 그러니까 수룡이 육룡을 이기려면 어찌해야 되겠어요. 물이 있는 곳에서 주총을 치러야 한다는 거였죠. 그래서 구태여 한화종금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수운회관에서 주주총회를 열었던 거죠." 수운회관은 이름 그대로 물과 인연이 있다. 재계 관계자는 덧붙였다. "그 때 역술인을 찾아간 쪽은 한화 김승연 회장 측만이 아니었나 봅니다. 백할머니 측도 같은 역술인을 찾아가서 만났던 모양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재계에서 점집에 다니는 건 공공연한 일이었단 얘기죠." 결과적으로 한화 김승연 회장 측이 주총 표 대결에서 이기면서 한화종금 경영권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수룡이 수운회관에서 육룡을 물리친 꼴이었다.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은 스스로도 역학에 정통했던 인물이다. 성명학을 신봉해서 본명인 정태준을 정태수로 바꿨을 정도였다. 사업을 시작한 연유도 역술인의 점괘 때문이었다. 역술인은 대번 정태수 회장을 보더니만 "음양오행상 토의 운세를 타고 났으니 흙과 관련된 사업을 하라" 고 조언했다. 그 때 정태수 회장의 나이는 쉰 살에 가까웠다. 20년 넘게 세무공무원으로 일했다. 사업하긴 늦은 시기였다. 하지만 정태수 회장은 역술인의 말에 자극을 받아 공무원 자리를 때려 치우고 정말 흙과 관련된 사업을 시작했다. 결국 강원도에서 연산 1,000톤 규모의 몰리브덴 광산을 발견했다. 이걸 밑천 삼아 아파트 분양 사업을 했고 대치동에 은마아파트 단지를 지어 떼돈을 벌었다. 덕분에 한보그룹은 일약 재계 30위권 재벌로 급성장했다.

한보그룹 본사는 은마아파트 상가 3층에 있었다. 30대 재벌의 본사가 아파트 상가 안에 있었단 얘기다. 풍수지리 때문이었다. 정태수 회장은 평소에 "은마아파트 자리는 물이 들어오고 바람의 기운이 모이는 곳이라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명당" 이라고 말해왔다. 실제로 정태수 회장은 은마아파트에 자금을 올인했지만, 미분양 사태로 부도 직전까지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이런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정태수 회장은 더더욱 역술을 믿게 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태수 회장이 금호그룹으로부터 금호철강을 인수해서 한보철강을 세운 것도 역술 때문이었다. 점괘가 "이젠 쇳가루를 만질 때" 라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해운 회사를 인수할 기회가 왔을 땐 "수는 토와 금의 기운과 어긋난다" 며 거절한 적도 있었다. 정태수 회장은 1987년 충남 당진에 일관 제철소 건설을 추진했다. 그것도 풍수지리와 역술에 따른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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