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세계 석유시장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

세계 최대 규모의 비공개 석유교역회사 비톨 VITOL은 셰브런과 도요타보다 더 많은 매출을 올린다. 이런 얘기를 들어본 적 있는가?

by BRIAN O'KEEFE with Doris Burke


여러분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가장 크고 중요한 기업을 운영하는 한 남자가 활짝 웃으며 방으로 뛰어들어온다. 우아한 감청색 정장을 입은 이언 테일러 Ian Tayor는 쾌활하면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전형적인 영국출신 CEO다. 올해 57세의 이언의 머리는 가운데는 없고 양쪽엔 하얗게 서리가 내려 있다. 하지만 그는 소년 같은 열정으로 빛나는 사람이다. 그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정치, 철학, 그리고 경제학을 공부한 달변가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자신의 회사가 엄청난 규모의 석유 기업 가운데 한 일원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사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간단히 말해 그의 회사는 한 곳에서 원유를 사서 다른 곳에 되팔아 차익을 남기는 일을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일은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테일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 원유 무역회사 비톨 그룹 Vitol Group의 CEO다. 이 회사가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비공개 기업 비톨은 2012년 3,030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비톨은 매출 측면에서 보면 세계에서 가장 큰 비공개 기업이다. 미국 식품전문 업체 카길 Cargill이나 에너지 기업 코크 인더스트리 Koch Industries 같은 동종 원자재 회사보다도 앞선다. 만약 비톨이 기업 공개를 한다면, 지난해 포춘 글로벌 500대 기업에서 7위에 해당하는 매출을 올린 셈이다. 이는 셰브런과 도요타보다 높은 순위다. 교역을 통해 얻는 이윤은 매우 적지만 불과 350명 남짓한 주주들이 이를 나눠 갖는다.

엄청난 매출에도 불구하고 비톨은 원유 업계에서조차 미스터리 같은 존재다. IHS 케임브리지 에너지연구협회(IHS Cambridge Energy Research Associates) 회장이자 저서 '황금의 샘(The Prize)'과 '2030 에너지 전쟁(The Quest)'을 통해 원유 산업의 발전을 설명한 에너지 전문가 댄 예르긴 Dan Yergin도 비톨이라는 이름은 알지만 "솔직히 그 회사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고 말할 정도다.

비톨은 얼마나 중요한 회사일까? 이 회사는 세계 에너지 시장을 이끄는 데 일조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비톨의 주 업무는 실질적인 원유 교역이다. 즉 원유가 넘쳐나는 곳에서 부족한 곳으로 이를 옮기는 것이다. 테일러와 그의 동료들이 단지 파생상품을 이용해 향후 원유가격 변동을 예측하고 수익을 거두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비톨은 매일 500만 배럴 이상의 원유를 사고 판다. 테일러는 "내 생각에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는 아주 중요한 연결 핀 역할을 하는 것"이라며 "그래서 필요한 곳에 원유를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매우 뛰어난 물류 운송 능력을 갖춰야 가능한 일이다. 지난해 비톨은 5,400회 이상 항해를 했다. 또 해상에 매일같이 200척의 유조선­수천만 달러 상당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규모다­을 띄운다. 이 선박들은 해적이나 태풍, 기술적 혹은 날씨로 인한 지연(자주 발생하지만 큰 비용이 소요된다) 같은 모든 잠재적인 위험 상황에 취약하다.

비톨은 셸, 엑손, 거대 국영 원유회사, 그리고 전 세계 수백 개 작은 원유업체 사이의 간극을 메워주는 무역회사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이런 형태의 교역은 지난 몇 십 년간 더 빈번해졌다. 기존 통합 시스템이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다. 예르긴은 "과거에는 단일 기업이 원전에서 가솔린 펌프까지 원유공급을 혼자서 했다"며 "하지만 1970년대 1차 석유파동 이후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오늘날 비톨은 사우디 아라비아에 가솔린을 판매하고, 엑손에는 정제용 원유를 공급한다.

비톨의 에너지 교역량­원유부터 가솔린, 천연가스, 제트 연료, 그리고 석탄까지 모든 종류의 에너지를 사고 판다­은 10년도 안 돼 두 배 이상 증가했다(비톨의 설탕 교역량도 세계 공급량의 5%를 차지한다).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면서 비톨의 매출도 더 빠르게 증가했다. 1995년 테일러가 CEO에 올랐을 때 비톨의 매출은 약 130억 달러에 불과했다. 10년 전 매출도 여전히 500억 달러에 못 미쳤지만, 그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성장세인 이 분야에서 가장 잘 알려진 비톨의 라이벌은 글렌코어 Glencore다. 이 회사는 금융업자 마크 리치 Marc Rich의 사업 파트너들이 만든 스위스 원자재 교역회사다. 2년 전 기업공개를 했고, 글로벌 500대 기업에서 14위를 기록하고 있다. 직전 회계연도에서 에너지 교역 매출 1,150억 달러를 기록했지만, 이 회사는 비철금속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군보르 Gunvor, 머큐리아 Mercuria, 그리고 트라피규라 Trafigura 같은 비상장 기업들이 비톨처럼 에너지 교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규모 면에선 비톨에 미치지 못한다.

테일러와 그의 무역 중개상들은 새로운 제품에 대한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구소련 독립국가 및 아랍국가, 그리고 불안정한 아프리카 국가의 정부 관료와 기업인들의 환심을 사려 하고 있다. 이를 놓고 라이벌 회사들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테일러는 빅토리아 역(Victorian Station) 맞은 편에 위치한 비톨 런던 사무실에서 광범위한 기업 활동을 총괄한다. 비톨은 휴스턴, 모스코바, 두바이, 싱가포르 같은 도시에 주요 지역 센터를 두는 등 전 세계 30개국에서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비톨은 규모와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보수적인 기업들이 회피하는 고객들을 기꺼이 상대해왔다. 예를 들어 보자. 비톨은 지난 2년간 심각한 신용문제가 있는 그리스, 이집트, 예멘의 고객들과 거래해왔다. 리비아 반군의 가솔린과 디젤 수요가 긴급히 나타나자, 유일하게 몇몇 국가의 요청에 따라 위험을 무릅쓰고 에너지를 공급해준 적도 있다.

이 같은 비톨의 거래가 때때로 비판을 받았다는 사실은 새삼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잘 알려진 대로 비톨은 2005년 유엔의 석유·식량 연계 프로그램 *역주: 유엔 경제제재 조치가 가해진 이라크가 6개월 마다 52억 달러의 석유를 팔아 의약품과 식량을 구입할 수 있도록 허용한 프로그램을 활용해 사담 후세인 정권에 추가 금액을 지불하고 석유를 구매한 사실이 폴 볼커 Paul Volcker가 이끄는 독립 조사단에 의해 적발되기도 했다. 때문에 비톨은 2007년 뉴욕 카운티 대법원(New York County Supreme Court)에서 중죄에 해당하는 대형 사기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1,300만 달러의 손해 배상금과 450만 달러의 벌금을 물기도 했다.

최근에는 일부 미국 의원들이 비톨과 이란의 거래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또 비톨이 미국 전략비축유(U.S. Strategic Petroleum Reserve)를 구매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따지고 나섰다. 현재 미국과 EU는 대이란 제재를 가하고 있다. 비톨은 오바마 대통령이 2012년 7월 31일 추가 제재 조치를 승인하는 행정 명령을 내린 이후 이를 완전히 이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로이터 통신은 지난해 9월 비톨이 이란으로부터 중유를 구입했다고 보도했다. 테일러는 이는 단 한 번뿐이었으며, 아시아의 비톨 무역 중개인이 몇 주 전 구매하기로 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제재조치가 적용되는 한 비톨은 이란과 거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원유 한 방울도 거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비톨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정유공장, 터미널 설비, 파이프라인 등 유형자산을 인수하거나 개발해왔다. 테일러는 점차 경쟁이 심화하고 있는 무역 시장에서 이런 투자가 매출을 증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기고 있다. 비톨의 2012년 매출은 2011년에 비해 약간 증가했지만 원유 교역량은 줄었다. 테일러는 "우리가 추가로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는 원유가 그렇게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원유 확보를 위해 매우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양이 정말 풍부하지는 않다."

비톨이 자산을 소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원유업계의 흐름이기도 하다. 주요 원유 회사들은 수익이 낮은 '하류사업(downstream)' *역주: 원유를 정제·가공해 운송하는 사업을 접고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상류사업(upstream)' *역주: 원유의 시추, 개발, 탐사 사업의 탐사 프로젝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비톨과 다른 무역회사들은 많은 자산을 획득해 유연성을 높이고 있다. 그들은 이런 개념을 '선택성(Optionality)'이라고 부른다. 이는 에너지 시장에서 비톨과 그의 파트너들이 앞으로 더 큰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톨을 이해하면 어떤 과정을 거쳐 가솔린이 소비자에게 전달되는지, 그리고 세계 원유 시장이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상세히 알 수 있다.

지난해 봄 제네바의 한 비톨 무역 중개상은 러시아 판매자로부터 72만 배럴의 우랄 Urals 원유를 구매하기로 했다. 계약에 따라 그는 5월 초 약 8,000만 달러 상당의 원유를 가져오기 위해 러시아로 유조선을 보낼 예정이다. 양측은 이 원유값을 5월 브렌트 원유 평균값­유럽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원유가격 산정 기준이다­에 근거해 최종 결정하기로 합의했다.

비톨 무역 중개상들은 마치 잘 훈련된 미식축구팀의 쿼터백 같은 역할을 한다. 계약을 하면 곧바로 조직 내 다른 사람들을 일련의 행동에 착수시킨다. 계약서가 발송돼야 하고, 임명된 조사관들이 원유가 잘 적재되는지 확인하도록 해야 한다. 지불을 증명할 수 있도록 은행에서 신용장도 받아야 한다. 또 선박을 빌리고 검사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세부사항들이 거래의 수익성을 크게 좌우하기 때문에 이 모든 과정을 감시해야 한다. 어떻게 화물 운송비를 관리하느냐에 따라 종종 이윤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모든 구매나 매출에서 발생할 수 있는 금전적 손실을 막기 위해 위험도 낮춰야 한다.

그 무역 중개인은 우랄 원유 구매 직후 카리브해 지역 바이어에게 팔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그래서 러시아에서 원유를 가져온 후 몇 주 후에 보내주기로 했다. 판매가는 5월 서부 텍사스산(WTI) 원유의 5일간 평균 가격을 기초로 해서 만든 공식에 따라 정해지게 되어 있었다. WTI는 북미 원유가격 산정에 가장 흔히 이용되는 기준이다. 거래가 체결됐을 당시 WTI는 브렌트유보다 15달러 정도 낮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었다.

그가 브렌트유 가격으로 원유를 사서 WTI 가격으로 판매하게 되면서 헤징 *역주: 현물의 시세 하락으로 생기는 손해를 막기 위하여 현물을 선물로 팔아 버리는 일이 더욱 복잡해 졌다. 비톨은 5월 들어 23거래일 동안 매일 브렌트유 구매가를 낮추기 위해 브렌트유 가격에 선물을 매도해야 했다. 또 반대로 WTI 판매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5일간의 가격산정 기간 동안 WTI 가격에 선물을 매수해야 했다. 5월 한 달 동안, 원유가격이 급락하면서­브렌트유 가격은 배럴당 120달러에서 103달러로 떨어졌다­더욱 정교한 헤징이 필요해졌다.

비톨의 교역사업 본부는 제네바 시내에 위치해 있다. 8층 건물의 2개 층을 사용하는데, 나이트클럽 바로 위에 있다. 무역 중개상들과 보조직원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오픈 스페이스 식 *주석: 고정벽 대신 이동식 가구나 칸막이를 두는 형태의 사무실 공간은 책상들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필자가 이곳을 방문한 날 아침, 중개인들은 전날 발생한 브렌트유 가격 급락 사태를 분석하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큰 키에 마르고 안경을 쓴 영국 출신의 데이비드 프랜슨 David Fransen은 비톨 교역부서를 이끌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무역 중개상들은 과연 무슨 일을 할까?"라고 반문하며 "그들은 단지 '원유가격이 오를 것 같으니 사둬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대신 '이쪽에서 원유를 일단 산 뒤 저쪽에서 헤징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들은 '비용은 얼마나 들까?', '수익과 손실은 얼마인가?', '어제 헤징 상황은 어땠지?', '시장이 활발히 돌아가는 것으로 보아 헤징에 성공한 것 같은데, 손실을 봤는지 수익을 얻었는지 알아볼까?', '나는 유럽과 뉴욕 거래소의 차익을 추구해왔는데 이것이 과연 옳은 방법일까?', '아니면 변화를 줘야 할까?' 같은 질문을 한 후 대응방안을 결정한다."

물리적인 교역의 마진은 매우 적다. 1% 이하가 보통이다. 물론 총매출이 상당하다면 약간의 마진도 큰 익익을 보장한다. 예컨대 금융정보제공업체 톰슨 로이터가 발표한 수치에 따르면, 2010년 비톨은 2,060억 달러의 매출과 15억 달러의 순수익을 올렸다. 이는 0.7% 마진에 불과하다. 하지만 2006년 상황은 이보다 좋은 편이었다. 신용정보회사 던 앤드 브래드스트리트 Dun & Bradstreet의 수치에 따르면, 비톨은 정유공장 매각으로 활력을 찾았고, 1,160억 달러 매출에 1.9%의 마진을 남겨 22억 달러의 이익을 올렸다.

비톨은 1966년 네덜란드 출신의 헹크 비터 Henk Vietor와 자크 데티저 Jacques Detiger가 로테르담 Rotterdam에서 회사를 창립한 이후 줄곧 그 기술을 발전시켜왔다. 그들은 라인강을 통해 석유 제품 무역을 했다(비톨 Vitol이라는 이름은 비터 Vietor의 'V'와 석유의 'oil'을 조합한 것이다). 몇 년 후 이들은 원자재 교역의 허브로 떠오른 제네바에 사무실을 열었다. 테일러는 그들을 도미노 게임을 좋아하던 예의 바른 신사들로 기억하고 있다.

테일러는 1985년 다국적 에너지 기업 셸을 떠나 무역중개상으로 회사에 처음 합류했다. 그는 셸에서 석유교역 기술을 익혔다. 생산한 석유와 비축 에너지를 정유공장으로 옮기기 위해 셸과 BP는 비톨보다 훨씬 더 큰 교역 사업을 운영했다. 이는 오랫동안 비톨을 비롯한 여러 무역회사의 '훈련소' 역할을 했다.

비톨에서 거의 30년가량 일한 테일러는 은퇴하고도 여유롭게 살 수 있을 정도 이상의 충분한 부를 쌓았다. 결혼 후 그는 4명의 자녀(11살부터 24살까지)를 두었고, 현재 왕립 오페라 하우스 (Royal Opera House)의 이사직도 수행하고 있다. 6년 전 그는 아우터 헤브리디스 제도 (Outer Hebrides islands)의 최고급 울 원단 브랜드인 해리스 트위드 Harris tweed를 살리기 위해 엔젤 투자자로 나서기도 했다. 이 지역에 사는 전 영국 교역·에너지 장관이자 친구인 브라이언 윌슨 Brian Wilson의 요청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면, 그가 이 교역 사업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테일러는 비톨의 위기관리에 대해 "상대적으로 비공식적"이라고 말한다. 위기평가를 전담하는 부서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톨은 합자회사이기 때문에 구성원 모두가 항상 위기를 분석하고 평가를 내리고 있다. 테일러는 "많은 사람들이 회사 방향을 바꿀 때마다 관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1990년대 말 비톨이 고안한 '전매 교역 및 운영 시스템'은 모든 거래를 추적한다. 비톨은 하루에 두 번씩 위험보고서를 발행해 얼마나 많이 특정 거래 당사자나 국가에 위험이 노출돼 있는지 무역 중개상들이 평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2011년 테일러가 카타르 정부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으면서 비톨의 위험 내성(Risk Tolerance)이 시험대에 올랐다. 카타르는 비톨에 가다피 정부와 싸우는 반군을 위해 가솔린과 디젤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신 반군이 관리 중인 동리비아 유전에서 생산된 원유를 제공하는 조건이었다. 위험이 예상됐지만 비톨은 미국과 영국 등 여러 국가들의 요청을 받고 에너지를 제공하기로 했다. 심지어 대가로 받기로 한 원유공급이 지연됐음에도 계속 에너지를 공급해줬다. 결국 비톨은 반군이 약속한 원유를 모두 받았고, UN에서 자금도 지원받았다. 테일러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며 "실제로 하루 이틀 잠을 못 이룬 날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모든 거래가 성공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러시아에서 우랄 원유를 사서 카리브해 지역에 판 무역 중개상은 실질 거래에서 500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헤징을 통해 5,430달러의 이익을 남겼다. 이 거래를 위해 비톨은 391개의 공시자료를 제출해야 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것이 무역 중개인의 전체 전략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는 어쩌면 우랄 원유를 카리브해 지역에 팔아 유럽에서 이용 가능한 우랄 원유를 줄이고, 가격이 상승하면 거기에서 큰 수익을 얻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습하고 흐린 남 플로리다의 아침이었다. 필자는 10만 배럴의 제트 연료 위에 서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케이프 커내버럴 Cape Canaveral의 씨포트 커내버럴 Seaport Canaveral 터미널 설비에 있는 24개 저장탱크 중 하나인 T-150-9의 천장 위였다. 지름 150피트인 이 저장 탱크의 3분의 2가량에 기름이 차 있다. 내부에는 증기를 억제하고 증발을 막는 알루미늄 '천장'이 제트 연료 위에 떠있다. 필자가 지금 서 있는 실제 천장은 얇은 철로 만들었는데, 놀랍게도 딱딱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이 시설을 관리하는 네덜란드 출신의 주리안 스틴랜드(36) Juriaan Steenland는 "바로 저곳이 과거 우주 왕복선이 이륙했던 장소"라며 인근 NASA 발사장을 가리켰다. "먼저, 로켓이 점화되는 것이 보이고 몇 초 후 이 발 밑 천장이 진동하는 게 느껴집니다. 얼마나 진동이 강했는지 짐작하시겠습니까?"

필자는 현재 원자재 교역 시장의 유행어가 된 '선택성(Optionality)'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터미널로 향했다. 이 용어는 환경변화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무역 중개인의 바람을 나타낸다. 유럽에서 수요가 증가할 때 뉴욕으로 향하는 원유 화물선의 스케줄을 변경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가격이 오를 때를 기다리며 한 달간 디젤을 터미널에 보관하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여러분이 최근 디즈니 월드에 갔거나, 디즈니 크루즈를 탔거나, 중부 플로리다 그 어느 곳에서든 가솔린을 주유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비행기와 선박, 자동차는 십중팔구 씨포트 커내버럴에서 공급하는 원유를 사용했을 것이다. 2010년 문을 연 이 터미널은 비톨이 건설했다. 현재 플로리다 주 최대 규모다. 최첨단 통제실에서 직원은 비축 에너지를 섞거나 통합하기 위해 기솔린이나 제트 연료를 한 탱크에서 다른 탱크로 옮긴다. 전통적인 형태의 터미널은 직원 수백 명을 필요로 하지만 이곳에선 불과 26명이 운영하고 있다. 비톨 중개인에게 가솔린을 구입한 기업들의 탱커 트럭이 도착하면, 운송 직원은 ID카드를 이용해 인증을 한다. 가솔린 ATM기기라 할 수 있다. 그들은 25분가량 트럭에 가솔린을 넣고 그곳을 떠난다.

시포트 커내버럴은 2006년 설립한 자회사 비톨 탱크 터미널스 인터내셔널 Vitol Tank Terminals International(VTTI)이 소유하고 운영한다. 3년 전 비톨은 이 사업의 지분 50%를 7,350만 달러에 말레이시아 거대 선적기업 MISC에 매각했다. 합자회사인 VTTI는 현재 5개 대륙에서 13개 석유·가스 저장 터미널을 운영한다. 이곳에는 거의 540만 배럴의 에너지가 저장돼있다. 비톨은 또 다른 합자회사를 통해 텍사스 주 미드랜드 Midland에 새 저장 터미널을 건설하고 있다.

저장 탱크 사업 외에도 비톨은 지난 몇 년 동안 벨기에, 아랍에미리트, 스위스에서 정유공장을 인수했다. 구소련 국가와 서부 아프리카에서도 석유를 탐사·생산하는 2개의 자회사를 통해 '상류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2011년 말 비톨은 아프리카 14개국에 있는 1,300개의 셸 주유소를 인수하기 위해 합자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부르키나 파소 Burkina Faso에 있는 셸 정유소에서 주유를 하면, 비톨과 거래하게 되는 셈이다. 이런 모든 사업들을 합치면, 비톨은 교역 파트너인 통합 석유회사와 비슷한 모습을 띠게 된다.

비톨의 라이벌 기업들도 비슷한 전략을 취하고 있다. 컨설팅 회사 올리버 와이먼 Oliver Wyman은 '원자재 교역의 새 시대가 열리다(The Dawn of a New Era in Commodity Trading)'라는 이름의 보고서에서 무역회사들의 자산 축적으로 이 업계가 30년 만에 가장 큰 변화에 직면했다고 밝혔다. 트라피규라 Trafigura의 설립자이자 이 보고서의 공동 작성자인 그레이엄 샤프 Graham Sharp는 "전통적으로 교역은 자산을 거의 갖추지 않은 산업이었다"고 설명한다. "자산이라고 해봐야 직원들이 전부였다. 때문에 이 업계 기업들은 항상 비상장 상태였다. 공개 시장에서 가치가 별로 높지 않았다. 사실 교역활동을 하는 데 장기 자금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도 않다. 하지만 이제 이들은 장기 자금을 요하는 장기 자산을 갖춘 대기업이 되어가고 있다. 갑자기 기업공개의 매력이 더 커진 것이다."

그렇다면 비톨 역시 글렌코어의 뒤를 이어 기업공개를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테일러는 현재로선 아니라고 말한다. 비톨에는 투자자금이 풍부하고, 출자자들도 그다지 주주들이나 애널리스트들의 요구에 응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비톨은 "우리의 주 업무는 교역"이라고 말했다. "'공개시장에 나가는 것이 설명하기 어렵고 항상 단순히 성장가도만 달리지 않는 교역 사업에 적절한가'라는 질문을 늘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비톨이 언제나 성장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톨은 이미 상당히 커져서 테일러와 출자자들이 더 이상 배후 세력으로만 머물 순 없는 상황이다. 순수 교역회사는 곧장 화물선을 띄우고 출발하면 된다. 하지만 장기 자산을 보유한 통합 에너지 기업들은 규제 당국, 의회, 그리고 대중들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테일러는 비톨이 위화감을 주는 기업이 아니라, 에너지업계가 좀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데 '상당히 유용한 역할'을 하는 기업으로 인식되길 바란다. "가솔린 가격이 상승하면 사람들은 '이런, 누굴 탓해야 하지? 무역회사? 아니면 다른 대상?'이라는 질문을 한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말한 뒤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테일러는 "행운을 빌어요"라고 말한 후 들어왔을 때처럼 활짝 웃으며 방에서 뛰쳐나갔다.


한눈에 보는 비톨

매출
2012년 3,030억 달러(비공개 기업 중 최대)

직원
30개국 1,000명

주주
350명의 출자자들이 기업 소유

교역량
하루 평균 500만 배럴 이상 석유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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