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만한 사회적 인간관계는 건강한 노후를 보내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은퇴 이후야말로 사회적 관계가 더욱 중요해지는 시기다.
우재룡 한국형 은퇴설계연구소 소장
성인 남녀 814명의 삶을 70여 년간 추적 조사한 ‘하버드대학교 성인발달 연구’의 총책임자 조지 베일런트 교수는 “한 사람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나이 들어가는 것을 결정짓는 것은 지적인 뛰어남이나 계급이 아니라 사회적 인간관계”라고 강조했다.
자녀를 키우고 직장생활을 할 때는 여러 가지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이웃과 친구의 중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 한국의 중장년은 은퇴를 하면 갑자기 외로워진다. 직장에서 일 중심으로 형성한 공적인 인간관계가 약해지며 사적인 인간관계로 전환하게 된다. 직장 밖 사람이 생활에 만족을 주는 중요한 원천이 된다. 친한 친구와 이웃은 은퇴 후 자아 개념을 재정립하는 데 기준을 제공해주며, 가족 이외의 주요한 지지기반이 된다. 자신의 생각과 관심사를 함께 나눌 몇 명의 친구나 이웃이 있다면 은퇴로 인한 여러 가지 상실과 변화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 은퇴 준비의 일환으로 인간관계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국 베이비 부머들의 공동체 실태
한국 현대 발전사의 주역인 베이비 부머는 매우 취약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다. 일만 하면서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 사회뿐 아니라 가족으로부터도 소외 당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몇 년 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우리나라 베이비 부머들을 대상으로 얼마나 많은 친구가 있는가를 조사하였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 가족과 친척뿐 아니라 친구로 대표되는 공동체 관계도 매우 중요하다. 조사결과 베이비 부머들은 평균 2.6명의 친밀감을 느끼는 친구를 가지고 있었다. 이 중 7.6%는 친밀감을 느끼는 친구가 전혀 없었으며, 6명 이상이라는 응답을 한 사람은 6%를 차지하고 있다. 베이비 부머들의 친밀감을 느끼는 친구 수가 2.6명에 불과하다는 점은 매우 충격적이다.
친구 수는 남성이 평균 2.7명, 여성이 2.6명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학력별로 보면 학력이 낮을수록 친구 수가 적다. 문제는 소득별이다. 월평균소득이 낮을 수록 친구가 적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월소득이 500만 원이 넘는 고소득자 중 친구가 없거나 1~2명에 불과한 경우가 매우 높다. 이는 소득이 높을수록 친구가 적다는 점을 나타내주고 있다.
실태조사에서 나타났듯이 우리나라의 중년은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한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친구나 이웃을 사귀는 일이 어려워지면 은퇴생활이 행복하지 못하게 된다. 좋은 사회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만큼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은퇴설계는 노후자금을 마련하는 재무적인 준비 외에 비재무적인 준비가 있다. 비재무적인 준비는 다양하게 이루어지지만 이 중에서도 좋은 사람들과의 교류라는 공동체 생활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다양한 계층과 취미 여가나 사회적 활동을 주제로 많은 사람들과 활발하게 교류한다면 매우 행복한 삶이 가능해진다. 사회관계가 단절되어 외롭게 지내면 자아를 실현하기 어려우며 고독감으로 건강이 악화될 수도 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은퇴설계에서 공동체 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하도록 권장하는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은퇴자들은 전반적으로 공동체 생활이 원활하지 않다.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첫 번째로 가장 주된 공동체 생활의 기반이 되는 학연, 지연, 혈연과 같은 기본적인 네트워크의 의미가 점차 변화한다는 점이다. 친한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지만, 만남 자체가 자아실현의 토대가 되지 못한다는 약점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좋은 공동체란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인 마크 그라노베타 Mark Granovett 가 말한, 일정한 주제로 만나 서로 인사하고 왕래하는 약한 연결(weak tie)의 다양한 계층을 말한다. 그라노베타는 ‘약한 연결망의 강함’이라는 논문에서 직업을 구하고, 창업하고, 최신 유행이 퍼질 때를 분석해보면 매우 친한 관계를 가진 강한 연결의 사람들이 아니라 약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렇듯 은퇴 후 생활은 강한 연결고리의 사람들을 벗어나 얼마나 약한 연결고리의 다양한 계층과의 만남을 얻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째로는 은퇴를 맞이한 중장년층들은 직장에서 만난 관계를 너무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은퇴 후 집에서 수천 장의 명함과 주소록을 뒤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은퇴를 했다는 사실을 알리면 식사나 음주와 같은 가벼운 대접을 받을 수는 있지만 진지하게 재취업이나 창업의 도움을 받기란 어렵다. 이런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은퇴자 자신이 원하는 방향의 삶이 아니면 큰 도움이 되기는 어렵다. 과거 직장이나 조직에서 사귄 인맥을 중심으로 은퇴 후 일자리와 창업 동지를 구하려고 지나치게 의존하면 곤란해진다.
세 번째는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크게 변화한다. 가장 크게는 부부관계가 변화하며, 자녀관계 역시 많은 변화가 불가피해진다. 국내 한 은퇴연구소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은퇴를 하면 부부 사이에는 갈등이 고조되며, 자녀와 대화는 은퇴 전보다 더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저출산 고령화 사회의 국민인식 조사’에 따르면 여성의 71.8%가 ‘늙은 남편 돌보는 일이 부담스럽다’고 답변했다. 더구나 이 질문에 남성도 66.4%가 동의했다. 한국 남성들이 스스로 나이 먹으면 아내에게 부담되는 존재라고 자인하고 있다. 또한 은퇴 전에는 직장 동료들을 주 1회 이상 만나는 공식적인 네트워크에 의존하지만, 은퇴 후에는 이웃과 만나는 빈도가 가장 높아지고 있다. 은퇴자의 3분의 1은 직장 동료들을 거의 만나지 않고 있으며, 만나더라도 1년에 몇 번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나타났다. 은퇴 이후 생활의 중심이 일터에서 가정으로 옮겨지며, 직장 중심의 네트워크가 축소되면서 이웃과의 교류가 확대되고 있다.
중년 이후 인간관계는 매우 급변한다. 상당수의 은퇴자들은 이런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적응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다. 다양한 사람과 활발하게 만나면서 뜻이 맞는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일을 같이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공동체에 속해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치밀하게 설계해야 한다.
우선 다양한 연령층과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좋다. 은퇴 후 교육, 취미, 봉사 등의 활동을 통해 친구관계를 넓혀나가야 한다. 친구를 사귈 때는 배경을 따지기보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할 필요가 있다. 페이스북이나 블로거와 같은 소셜 네트워크를 잘 활용한다면 새로운 모습의 사회교류가 가능하다. 중년 이후에 최악의 인간관계를 맞이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좋은 공동체란 일정한 주제로 만나 서로 인사하고 왕래하는 약한 연결(weak tie)의 다양한 계층을 말한다.
우재룡 소장은…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펀드평가대표이사, 동양증권 자산관리컨설팅연구소장,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을 거쳐 현재 한국형 은퇴설계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