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섭 사장이 이끄는 유한양행이 2013년 제약업계 시장점유율 1위에 올랐다. 상장 50여 년 만의 일이다. 포춘코리아가 김윤섭 사장과 서면 인터뷰를 갖고 그 비결을 물었다. 그는 ‘바른 경영’을 성공요인으로 꼽았다.
차병선 기자 acha@hk.co.kr
"임직원 개개인이 한 분야 혹은 한 지역에서 일등이 되면 회사는 당연히 일등이 된다고 믿습니다.”
김윤섭 유한양행 사장은 2013년 내내 유독 ‘1등’을 강조했다. 지난해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김 사장은 새로운 경영 슬로건으로 ‘도전, 일등 유한’을 내걸었다. 임직원을 만날 때에도 김 사장은 늘 “1등이 돼라”고 주문했다. 그에겐 1위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절호의 찬스였다. 유한양행은 1962년 상장 이후 한 번도 업계 1위를 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2013년에 전세를 뒤집을 기회가 찾아왔다. 수십 년간 제약업계 선두를 고수해온 동아제약이 1위 자리를 내놓고 물러났다. 동아제약은 2013년 초 지주사로 전환하며 기업을 분할, 매출 규모가 줄었다. 그 후 1등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한 유한양행과 녹십자 간의 치열한 경합이 있었다. 하지만 유한양행의 우위가 확정적이다. 아직 정확한 결산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유한양행의 2013년 매출은 9,300억~9,400억 원, 녹십자 매출은 8,600억 원으로 추정된다.
역풍 속의 기회
상황이 녹록한 건 아니었다. 제약업계는 커다란 역풍을 맞고 있었다. 정부가 2012년 4월 일괄적으로 약값을 인하하고, 리베이트를 규제해 제약업계가 전반적으로 위축된 상황이었다. 유한양행도 약값 인하로 300억 원 매출 감소가 예상됐다.
하지만 난세에 인물이 나는 법. 매출과 수익성 타격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김 사장은 이를 타개할 대책을 고심했다. 김 사장은 말한다. “모든 문제에는 해결책이 있습니다. 유한양행에 몸담은 37년 동안 수많은 문제에 부딪혔지만, 저는 이 소신을 품고 문제를 해결하며 지금의 자리까지 왔습니다. 사람들이 안 된다고 말할 때, 나는 왜 안 되는지 생각하며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요.”
김 사장이 찾은 해결책은 다국적 선진 제약기업과 파트너십을 맺는 것이었다. 우선 그들의 신약을 들여와 함께 판매했다. 유한양행은 베링거인 겔하임의 트윈스타(고혈압 치료제), 트라젠타(당뇨병 치료제), 길리어드의 비리어드(간염 치료제), 화이자의 프리베나(폐렴구균 백신) 등을 들여와 국내 시장에서 공동으로 마케팅을 펼쳤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다국적 제약사 약품은 올 1~3분기 동안 1,462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유한양행의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5%(2013년 상반기 기준)에 이른다. 상반기 매출 1~3위가 모두 이들 제품이었다. 최대 효자 상품으로 떠오른 것이다.
특히 트윈스타가 반기 매출 382억 원을 기록했다. 약값 인하로 인한 연매출 감소분 300억 원을 트윈스타 하나로 반기만에 상쇄한 것이다. 트라젠타의 경우, 경쟁 제품보다 국내 출시가 늦었지만, 출시 1년 반 만에 국내 당뇨 시장에서 선두를 차지했다. 김 사장은 말한다. “탁월한 제품 성능에 유한양행의 차별화된 마케팅이 더해져 이 같은 결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있다. 다국적 제약사의 벤더로 전락했다는 질시 어린 시각이다. 수익률도 경쟁사에 비해 다소 낮다. 일견 수긍이 가지 않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김 사장은 좀 더 멀리 더 길게 볼 것을 요구한다. “물론 도입된 신약이 매출에 큰 기여는 하고 있지만 전략적으로 이는 단기적인 성과일 뿐입니다. 우리는 다국적사와의 파트너십을 토대로 글로벌 진출을 늘리고 R&D 역량을 다져간다는 중장기적인 복안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 같은 전략은 이미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유한양행은 2013년 처음으로 원료의약품 수출 규모 1억 달러를 넘겼다. 국내 최대 규모다.
유한양행은 항생제, 에이즈치료제, C형간염치료제, 당뇨병 치료제 등의 원료의약품도 해외에 공급하고 있다. 다른 원료의약품 업체가 주로 복제약 원료를 수출하는 것과는 달리 유한양행은 신약 원료를 직접 생산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신약 개발에 동참함으로써, 신약의 공급자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장기 공급선을 확보하고 높은 마진도 챙길 수 있다. 이는 모두 공고한 파트너십에서 비롯되고 있다.
일례로 유한양행은 미국 제약사 길리어드가 개발한 에이즈치료제 ‘트루바다’의 주요 원료 중 하나를 직접 생산해 해외 시장에 공급하고 있다. 또한 트루바다의 국내 판권도 보유하고 있다. “다국적사와 오랫동안 좋은 파트너십을 가져왔기 때문에 국내유통을 맡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반대로 유한의 새로운 신약이 해외에 진출할 때에도 다국적사와의 제휴 마케팅을 통해 더 빠르고 유효하게 현지화 전략을 펼 수 있습니다.” 김 사장의 말이다.
파트너십은 또한 R&D 역량을 강화하고 원천기술을 공유하는 토대가 된다. 유한양행 전체 수출액 중 원료 의약품 비중은 90%(2012년 기준)가 넘는다. 반대로 말하면, 완제 의약품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다. 김 사장은 말한다. “국내 제약사의 신약 개발 능력은 매출 수십조 원의 다국적 제약사보다 30년 정도 뒤처졌다고 봅니다. 10년은 우리가 메운다고 치더라도 20년 간격을 따라잡으려면 기술 제휴라는 사다리를 타야 합니다. 최종 목표는 완제 의약품인 글로벌 신약을 수출하는 것이죠.”
기술력을 키우는 또 다른 방법은 M&A다. 김 사장은 원천기술을 보유한 국내외 기업을 인수 합병함으로써 유한양행의 기술 역량을 극대화하려 하고 있다. 2012년 유전자 정보 서비스 업체인 테라젠이텍스에 200억 원, 바이오 벤처 한올바이오 파마에 300억 원을 투자해 미래 기술을 확보했다. 현재에도 4,000억 원대에 이르는 유보 자금을 활용해 언제라도 유망한 국내외 벤처기업을 M&A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김 사장은 끊임없는 변화를 요구한다. “시장이 변하고 경영환경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해답을 찾고 길을 만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죠. 유럽을 정복한 칭기즈칸은 ‘성을 쌓는 자는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와 ‘혁신’입니다.” 신약도입과 M&A도 칭기스칸 경영의 결과다.
정도 속의 기회
유한양행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저력은 탄탄한 영업력에서 나온다. 당초 다국적 제약사가 사업파트너로 유한양행을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 사장은 영업 일선에서 바른 영업을 끊임없이 주문한다. 당장 매출을 올리는 것보다 고객과 신뢰를 쌓고 파트너와 관계를 유지하는 걸 더욱 중시한다. 김 사장은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영업 방식을 최고로 삼고 있다. 고전적이지만 가장 정석이라는 것. 남들보다 한발 더 앞서려면 한 번이라도 더 마주하고 한 번이라도 더 좋은 인상을 심어주라고 강조한다. 실제로 유한양행은 클리닉 방문율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김 사장은 말한다. “영업에 왕도는 없습니다. 다양한 마케팅 전략과 전술이 존재하지만 이는 보조적인 수단일 뿐입니다. 기본에 충실하는 방법이 혼을 담을 수 있고 이것이 곧 마음을 움직인다고 믿습니다.”
이는 사원으로 시작한 김 사장이 대표이사에 이르기까지 직접 경험하며 체득한 원칙이다. 김 사장은 1976년 유한양행에 입사해 영업과 마케팅에서 잔뼈가 굵었다. 과거 김 사장과 함께 영업 부서에서 근무했던 하정만 홍보 이사는 말한다. “김 사장님은 조용하지만 꾸준하게 바른 영업을 실천하는 분이셨어요. 기록적인 영업실적을 내신 분도 많았지만 돌아보면 그 분들은 오래가지 못했죠. 탈이 나기도 했어요. 김 사장님이 대표이사에 오르고, 유한양행이 1위에 오른 건 바른 영업의 힘이라 할 수 있겠죠.”
김 사장은 4년 반째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3년은 공동대표, 1년 반은 단독 대표로 일했다. 남은 임기는 1년 반이다. 유한양행은 CEO 최대 임기를 6년으로 정해 이를 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취지에서 나온 제도다.
남은 기간 김 사장의 목표는 국내 제약사 처음으로 매출 1조 원을 달성하는 것이다. 2013년 기록을 보면 2014년에는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 또 1위를 유지하는 것도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김 사장은 말한다. “창업주인 유일한 박사의 어록 중 ‘기업은 사회의 것이다. 개인은 관리를 할 뿐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은 임기 동안도 기업가치를 극대화 하고, 최고의 기업으로 키우는 것을 제 소명으로 삼을 겁니다. 원칙과 판단에 근거해 최고의 위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제약업계의 자정 활동도 이루고픈 비전이다. 제약업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제약사들이 과잉 경쟁을 하며 그릇된 영업을 해온 탓이다. 김 사장은 제약업체 모두 투명한 정도 경영을 실천해 부정적 이미지를 쇄신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를 개선하면 현재 제약업계의 발목을 잡고 있는 여러 규제도 풀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 사장은 제약업계 일원으로서 정부에 바람을 표현했다. 제약사가 국민 보건을 위해 노력해온 만큼, 정부가 산업 육성책을 펼쳐주기를 요청했다. 특히 약값 인하와 같은 일괄 규제 정책보다는 제약사 특성을 고려한 세심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예컨대 현재 임상 2상까지 지원해주는 기존 연구개발 정책을 실제 큰 비용이 소요되는 임상 3상까지 확대해 달라는 것. 또 해외 진출을 하려는 기업에게 해외임상 비용을 지원해주는 것도 산업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김 사장은 말한다. “세계적인 신약이 나오려면 오랜 시간과 막대한 자금이 필요합니다. 한 기업의 노력만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정부의 지원이 절실합니다.” 이 말 속에 맏형다운 비전이 녹아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