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IT

괴짜 과학자 챔피언십

과학의 본질은 진실을 탐구하는 불굴의 정신이 아닐까. 그런데 과학의 역사를 보면 탐구 정신이 과도하게 발동한 나머지 무모한 수준의 실험에 온몸을 내던진 연구자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의 행동은 종종 조롱의 대상이 되지만 통념을 깨는 혁신적 연구성과 창출로 이어지기도 한다. 천재와 바보는 백지 한 장 차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우구스트 비어 (August Bier)
조수를 고문한 척추마취의 아버지


좋은 마취제는 외과 수술의 필수품이다. 독일의 외과의사 아우구스트 비어는 지난 1898년 기존보다 효과가 뛰어난 마취기술을 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척수 주변에 코카인을 주사하면 전신마취를 하지 않고도 척추수술이 가능하다는 가정을 정립했다.

이후 몇몇 환자들에게 테스트를 해봤음에도 확신이 들지 않았던 그는 조수를 불러 자신의 척추에 액체 코카인을 주사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조수가 머뭇거리며 주사를 놓지 못하자 주사기를 빼앗아 조수의 하반신을 마취시켜 버렸다. 이뿐만이 아니다. 마취효과를 확인한다는 이유로 정강이를 담뱃불로 지지고, 망치로 때리는 등 고문 수준의 폭력을 휘둘렀다. 이 일을 계기로 조수는 그의 곁을 떠났으며, 비어는 가학적 척추마취의 아버지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베르너 포르스만 (Werner Forssmann)
멀쩡한 자신의 심장에 카테터 찔러 넣은 강심장


심장 수술이 초창기였던 1929년. 당시 의사들은 절개 등을 통한 환자의 신체적 손상, 즉 침습(侵襲)을 줄이면서 수술을 진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독일의 의사인 베르너 포르스만은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수술 대신 환자의 정맥에 얇고 유연한 튜브, 즉 카테터(catheter)를 삽입해 심장까지 밀어 넣는 방식으로 심장병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환자가 숨질 수도 있다며 극구 만류하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그는 이 아이디어를 실행키로 결심했고, 다행히 한 간호사가 피실험자로 자원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드라마틱한 일이 벌어진다. 간호사를 마취까지 시킨 포르스만이 심경 변화를 일으켜 간호사가 아닌 자신의 팔 정맥에 카테터를 꽂아 넣은 것이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X레이로 확인해보니 카테터가 심장까지 안전하게 도달해 있었다. 심장병 진단과 치료에 획기적 발전을 불러온 심장 카테터법이 개발되는 순간이었다. 포르스만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56년 노벨 의학상을 수상했다.



스터빈스 퍼스 (Stubbins Ffirth)
전염병 환자의 토사물을 눈에 비빈 엉뚱맨


전염병인 말라리아 환자의 토사물과 소변을 상처에 바르고, 눈에 비빌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179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의 의대생이었던 스터빈스 퍼스는 아무렇지 않게 이런 짓을 했다. 그것도 모자라 환자의 혈액을 자신의 혈관에 주입하기도 했다. 말라리아가 전염성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그는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았고, 천수를 누렸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말라리아는 분명 전염병이다. 도대체 어떻게 감염되지 않았던 걸까. 전문가들은 토사물을 제공한 환자가 말기여서 전염성이 없었고, 혈액도 혈관에 정확히 주입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실로 운이 더럽게도 좋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토르 헤위에르달 (Thor Heyerdahl)
뗏목으로 태평양을 횡단한 터프가이



노르웨이의 인류학자이자 탐험가인 토르 헤위에르달은 현실 속의 인디아나 존스 같은 인물이다. 인류학은 물론 생물학, 지리학, 식물학에도 능통하다. 그는 원래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불물을 가리지 않았지만 최고의 결정타는 손수 DIY한 뗏목 ‘콘-티키(Kon-Tiki)’호 타고 태평양을 횡단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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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모한 행동 또한 주류 학계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함이었다. 고대인들이 무역을 위해 뗏목으로 대양을 건넜으며, 이 과정에서 DNA 교환이 일어났다는 이론이었다.

급기야 1947년 그와 동료 5명은 페루의 카야오항에 콘-티키호를 띄웠고, 101일간 6,900㎞ 이상을 항해한 끝에 남태평양 투아모투제도에 도착함으로써 고대인들의 태평양 횡단 가능성을 열었다.

주류 인류학자 대부분은 여전히 언어학적 증거가 부족하다며 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티코 브라헤 (Tycho Brahe)
자존심을 지키려다 코가 잘린 수학자


덴마크의 귀족 티코 브라헤는 망원경이 없던 시절부터 천문을 정밀하게 관측했던 유명 천문학자이자 수학자다. 이런 그가 평상시 가장 즐겼던 것은 수학 토론이었다.

1566년 어느 파티에 참석한 브라헤는 수학공식을 놓고 다른 귀족과 논쟁을 벌였고, 그 귀족이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자 화가 치밀어 올라 돌이킬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진검 결투를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브레헤의 검술 실력은 수학자의 자존심을 지키기에는 태부족이었고, 결투 중 코가 잘려나가고 말았다. 이후 평생토록 그는 귀금속으로 만든 가짜 코를 달고 살아야 했다.



배리 마셜 (Barry J. Marshall)
치료법 개발을 위해 병원성 세균을 먹은 사나이


인간의 위(胃) 속에서는 강한 산성 때문에 박테리아의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게 과거 학계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호주의 생리학자 배리 마셜 박사는 생각이 달랐다. 위 속에도 박테리아가 살고 있으며, 이들이 위궤양과 위암 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겼다.

이에 그는 위궤양 환자들에게 항생제를 투여하는 실험을 통해 위 속의 박테리아를 사멸시킴으로써 궤양이 치료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학계는 그의 논문을 믿지 않고 싶어 했다. 결국 마셜 박사는 연구결과를 실증하고, 치료법도 찾기 위해 추후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로 명명된 위궤양 유발 박테리아를 직접 먹는 특단의 행동을 단행했다. 그렇게 스스로 급성 위궤양에 걸린 뒤 자신의 위를 생검(生檢)하여 박테리아를 분리했고, 항생제를 복용해 치료에도 성공했다.

배 아프게 자신의 연구를 입증해낸 그에게 학계는 2005년 노벨생리의학상으로 화답했다.



헨리 헤드 (Sir Henry Head)
팔의 운동기능과 학문적 갈증 맞바꾼 통증학자


영국의 신경학자 헨리 헤드는 인간이 느끼는 고통의 메커니즘을 밝히고 싶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신경손상 환자들을 인터뷰했음에도 실체에 다가서지 못했다. 환자들은 그의 연구에 관심이 없었고, 진술도 너무 불명확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동료 의사에게 부탁해 자신의 요골 신경을 제거해버렸다. 이후 그는 스스로에게 다양한 실험을 했고, 그때마다 느낀 고통을 후대연구자를 위해 상세히 기록해놓았다. 팔의 필수 운동기능과 학문적 갈증을 맞바꾼 셈이다.



파퓰러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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