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디자인학 교수에게 패스트 패션 시대의 명암, 이를 통해 국내 기업들이 얻을 수 있는 인사이트에 대해 물었다. 그는 브랜드 이미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들고 다니기에 자랑스러운 쇼핑백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부혁 기자 yoo@hmgp.co.kr
사진 한평화 info@studiomuse.kr
간호섭 홍익대학교 패션디자인학과 교수는 2012년 한 케이블 방송에서 제작한 신진디자이너 발굴 프로그램 ‘프로젝트 런어웨이 코리아’에 출연하면서부터 대중과 친숙해진 인물이다. 당시 조용히 예의 바르게 말하지만 할 말은 다하는 그를 두고 ‘간멘토’, ‘간쓰나미’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 정치 지도자의 패션을 분석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각국 정치 지도자의 방한이나 우리나라 대통령 해외순방 때마다 신문의 정치면이나 경제면에서 그의 이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부동산과 벤처기사에도 등장한다. 명동에 위치한 눈스퀘어 쇼핑몰 ‘레벨5’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으면서 공간 디자인에 대한 컨설팅도 했기 때문이다. 또 ‘바이박스’라는 패션 큐레이션 벤처 사업을 하며 신진 디자이너에게 시장 진입 기회를 제공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하다. 최근에는 현대홈쇼핑에서 신진디자이너 제품을 소개하고 패션 트렌드를 짚어주는 역할도 맡고 있다. 그는 자신의 다양한 이력에 대해 “내 모든 커리어는 한국 패션을 위한 길로 향하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한국 패션산업에 대한 그의 열정과 애정이 묻어나는 말이다.
한국의 패션산업은 현재 상황이 좋은 편이 아니다. 2000년대 초 동대문 의류 상가가 호황을 누리며 한국 패션산업이 부흥을 맞는 듯했지만, 이내 그 열기는 사그러들었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뛰어난 인물은 많지만 뛰어난 브랜드가 없었기 때문”이라며 “한국 패션이 글로벌 패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간호섭 교수 역시 한국 패션산업의 가능성과 저력을 인정하면서도 “아쉬운 점이 많다”고 말했다.
세계는 지금 패스트 패션 열풍이다. SPA 업체 H&M이 세계 최대 패션기업으로 군림하고 있다. 과거에는 디자이너나 패션쇼장에 찾아가야 알 수 있던 패션 흐름이 지금은 명동 패스트패션 매장에만 가봐도 알 수 있게 됐다. 패스트 패션이 세계 패션계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주도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패스트 패션 업체들이 1~2주마다 새로운 옷들을 쏟아내는 걸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ZARA는 일주일에 두 번씩, H&M은 거의 매일 매장에 새로운 옷들을 내걸고 있다. 어떤 이들은 “아무리 쇼핑을 해도 뒤처지는 느낌이 든다”고 말할 정도로 패스트 패션 브랜드의 제품 사이클이 엄청나게 짧아지고 있다. 간호섭 교수도 과거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패스트 패션, 다시 말해 SPA 브랜드의 성공은 소비자의 니즈가 변하고 있다는 점을 재빨리 캐치한 결과”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는 이어 “그 덕분에 패션계의 패러다임이 변했다. SPA의 탄생은 레볼루션(혁명적)이었지만, 이제는 패션산업의 에볼루션(진화)을 이끌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SPA 브랜드의 폐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량생산에 의한 환경파괴, 산업 생태계 교란, 값싼 노동력 착취 같은 허점을 주장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어떤 이들은 “냉정하게 보면 유통이 패션을 삼킨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간호섭 교수는 패스트 패션 시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그는 우선 “SPA 브랜드 성공에 대한 평가는 과거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패스트 패션 시대의 명암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소비자들은 왜 패스트 패션에 열광할까? 우선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우선 패스트 패션은 가격이 저렴하지만 싼티가 나지 않는다. 디자인은 콜렉션과 흡사하다. 백화점 같은 멋진 공간에서도 구매할 수 있다. 소비자는 구매하는 브랜드와 자신을 동일시하는데, 패스트 패션 브랜드는 가격이 저렴한데도 구매자에게 괜찮은 이미지를 제공한다. 1만 9,000원짜리 티셔츠를 사도 쇼핑백을 들고 다니기 창피하지 않다.
문제는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옷이 귀한 선물이었다. 옷 한 벌 얻어 입는다는 것이 큰 선물이었다. 오죽하면 명절에 ‘추석빔, 설빔’이라고 했겠는가. 하지만 요즘은 입고 버리기 바쁘다. 소비사회, 대량사회의 단면인 셈이다. 더이상 간직하고 추억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패스트 패션 시대가 되면서 옷이 소장품이 아닌 소모품이 된 것이다. 최근에는 패스트패션 브랜드가 확장되면서 쇼핑도 획일화되고 있다. 그곳에 가야만 살 수 있는 옷들이 쇼핑을 즐겁게 만들었는데 이젠 그런 즐거움은 거의 사라졌다.
SPA 브랜드와 함께 럭셔리 브랜드도 고성장을 거듭해왔다. 이를 놓고 우리사회의 양극화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동의하지 않는다. 둘 다 보편화·대중화 되었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에르메스도 더 이상 초럭셔리 브랜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내 SPA 브랜드를 글로벌 브랜드와 비교했을 때 경쟁력이 있다고 보나?
여러 측면에서 경쟁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선 한국 패션 산업에는 디자이너가 설 자리가 없다. 위에서 치이고 아래서도 치이는 형국이다.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는 백화점에 입점하지 못한다. 기성화 된 제도권 유통에서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한국 패션 기업 가운데 루이까또즈, 메트로시티, MCM이 피혁 제품으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이 기업들도 피혁제품에 머물러선 안 된다. 의류제품으로 넘어가야 한다.
대기업 패션브랜드와 SPA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해 달라.
한국 소비자의 눈높이는 글로벌화 되어 있다. 과거 일본에 가면 사고 싶은 제품들이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요즘은 일본에 가도 살 제품이 별로 없다. 하지만 옷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옷은 기술과 품질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이미지다. 그러나 우리 패션 산업은 이미지 면에서 앞서 있지 않다. 단적으로 우리 소비자들은 국내 SPA 브랜드의 쇼핑백을 자랑스럽게 들고 다니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대기업이 그들만의 특기를 갖고 디자이너나 브랜드를 집중 육성해야 하는데 지금 당장 돈 되는 잡화에만 신경쓰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예전에는 체력이 국력이었다면 이제는 문화가 국력이다. 대기업이 자본과 인프라를 활용해 좋은 브랜드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또 소비자 만큼 글로벌한 시각과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다. 늘 해답은 소비자가 가지고 있다. 이는 다른 영역의 기업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나라 브랜드 중 눈에 띄게 잘하는 브랜드가 있다면?
루이까또즈, MCM, 메트로시티가 잘하는 것 같다. 알찬 기업이다. 특히 MCM은 중국시장에서 상당한 반응을 얻고 있다. 피혁 제품으로 4,000억 원 이상 매출을 올리는 걸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채로운 쇼를 열고 옷에 상당한 투자를 하는 구찌나 프라다도 가죽 제품의 판매 비중이 상당하다. 지금 잘 하고 있는 국내 기업들도 이 같은 점을 고려해 이젠 카테고리를 조금 넓혀야 한다.
패션 산업적 측면에서 최근 트렌드는 무엇인가?
부쩍 늘어난 편집숍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다양한 개성을 반영하는 브랜드가 확장되고 있다. 획일성을 거부하는 개성 있는 소비자의 파워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랜드가 세분화 된 소비자 니즈를 제품으로 표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려면 자본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최근 편집숍은 자본력을 가진 대기업이 주도하고 있다. 나는 컨설팅을 하면서 늘 도전, 열정, 매진이란 말을 즐겨 쓴다. 나이 순으로, 단계별로 그에 걸맞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기업은 새로운 분야 도전에만 머물지 말고 브랜딩이나 디자이너 발굴에 매진해야 한다. 디자이너는 도전하고, 중소 패션기업은 열정을 가지고 시장을 만들면 된다.
최근 CEO들이 PI를 많이 한다. 패션과도 무관치 않은 것 같다.
가장 좋은 수단이라 생각한다. 예전에는 CEO들이 패션에 관심 갖지 않았다. 요즘에는 정치인부터 이미지 메이킹을 한다. 가르마 염색, 성형 등 과감한 도전을 서슴지 않으며 PI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말하지 않고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패션이다. 패션은 소통의 언어이고 배려의 도구이기도 하다. 경영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공인의 이미지는 패션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패션과 경영성과의 상관관계가 높은 경영자는 어떤 분인가?
누구나 정태영 사장을 꼽을 것이다. 이번에 현대카드가 지난 5월에 진행한 트래블 라이브러리를 보라. 소비자 니즈를 정확히 짚어냈다. 여행 가서 쇼핑할 땐 소비자들이 관대해지니까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알려진 대로 현대카드는 카드를 패션의 영역으로 만들어 버렸다. 제2의 신분증처럼 PI 도구로 만들기도 했다. 라이프 스타일을 주도하고 있는 셈이다. 개인으로 보면 조금 뻔하지만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도 꼽을 수 있다. 모두가 동의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서현 사장은 화려함보단 절제를 아는 것 같아 멋지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