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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사가 던지는 우리시대의 화두

[FORTUNE'S EXPERT] 서울대 최고위 과정 인문학 강좌 지상중계

한국 사회에서 불교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의 생애를 돌아보며 해답을 찾아보자.
강의: 남동신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정리: 차병선 기자 acha@hmgp.co.kr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해 중국을 거쳐 4~5세기경 한반도에 들어왔다. 그리고 7세기에 들어오면서 비약적으로 도약했다. 의상은 불교가 꽃피기 시작하던 이 시기의 사람이다.

당시 사회와 종교는 운명 공동체였다.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진 종교와 사회가 서로 밀착되어 있었다. 사회유지를 위해 종교가 필요했고, 종교를 위해 사회 지원이 필요했다. 불교 발전을 주도한 건 불교 지식인인 승려였다. 선비가 세속 사회의 지식인이라면 승려는 불교 사회의 지식인이었다. 왕은 관료를 통해 세속을 통치하고, 승려를 통해 영적인 세계를 관할했다. 달리 말해서, 백성이 출세하려면 공자를 공부해 관료가 되거나,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야 했다. 지식인들은 국가에 협력하거나 혹은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체제에 순응하고, 통치 이데올로기를 백성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의상 역시 한동안 전제왕국의 이념가라는 오해를 받았다. 이 같은 학설이 1970년대 이후 1980년대까지 정설처럼 통용됐다. 논거는 다음과 같다. 의상의 출신성분이 당시 특권 귀족인 진골이었다는 점, 유학 도중 귀국한 동기가 당나라의 침공 사실을 신라 조정에 알리기 위함이었는 점, 부석사 창건 과정에서 왕명을 받들었다는 점, 의상이 주도한 화엄십찰이 신라의 국가 성지와 밀접했다는 점 등이다. 그리고 화엄사상의 핵심인 원융사상이 전제왕권 체제에 부합한다는 점도 있다. 원융사상은 ‘하나가 곧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一卽多 多卽一)’라는 철학인데, 여기서 ‘하나’를 전제군주로, ‘전체’를 백성으로 해석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다분히 자의적 해석에 의존하고 있다. 우선, 진골 출신이라 왕과 귀족을 위했다는 논거부터 잘못됐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아버지는 공장주였지만, 그 아들들은 계급 타파에 일조했다. 출신계급이 중요하지만 반드시 자기 계급을 위하는 건 아니란 얘기다. 둘째, 국가를 위해 귀국했다 하더라도 이것이 반드시 국왕을 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셋째, ‘왕명을 받아 창건했다’는 점은 당시 불교가 국왕에 의해 통제받고 있다는 실상을 보여주는 예에 불과하다. 당시 왕실은 전쟁 전후 재정낭비를 막기 위해 불교 행사를 통제했는데, 부석사를 짓기 위해선 반드시 왕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넷째, 화엄십찰은 신라 후대에 성립됐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어 의상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일즉다 다즉일’이라는 명제를 정치 질서에 대입해 해석한 것 자체도 불교 철학에 맞지 않는다. 불교의 교리는 속세를 초월한 성(聖)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의상은 625년 진골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관직에 진출하지 않고 출가해 승려가 됐다. 출가 동기나 시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동안 원효와 동문수학했고 함께 중국 유학길에 오르기도 했다. 직산을 지나던 중 이들은 비를 피해 동굴에서 잠들었는데, 여기서 일명 ‘해골물 일화’를 겪으며 행로가 갈라졌다. 원효는 국내에 남았지만 의상은 초지를 굽히지 않고 중국으로 넘어갔다.

의상이 처음 중국에서 머물던 집에 선묘라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있었다. 선묘는 의상에게 반해 구애했지만 의상은 이를 뿌리치고 장안 종남산으로 갔다. 그리고 지엄 문하에서 수학했다. 의상은 화엄사상을 공부하고 박사논문 격인 ‘화엄일승법계도’를 썼다. 화엄일승법계도는 60권에 이르는 화엄경을 7언 30구 210자 시 형태로 압축한 작품이다. 화엄일승법계도는 바둑판 모양으로 글자가 배열되어 있는데, 이는 남북조 시대에 유행하던 반시(槃詩) 형태를 따른 것이다.

이와 관련한 재미난 일화도 있다. 의상은 원래 10여 권에 이르는 졸업논문을 썼지만 지도교수가 번잡스럽다고 이를 불태웠다. 그중 타지 않고 남은 글자 210자를 수습해 화엄일승법계도를 남겼다고 한다. 이른바 ‘불에 타지 않는 시’란 것이다.

화엄일승법계도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일즉다 다즉일이다. 전체와 개체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며, 본질적으론 모든 개체가 차별이 없고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등은 화엄사상의 핵심이다. 화엄사상이 태동하던 시대와 사회 환경을 살펴보자. 화엄경은 꽃으로 장식한 부처 말씀이란 뜻이다. 전설에 따르면 부처의 깨달음을 설파한 것이지만, 사실 석가모니와는 무관하다. 화엄사상은 부처가 사망하고 1700년이 지난 후 중앙아시아 호탄에서 성립됐다. 호탄은 실크로드 거점 도시였다. 전 세계에서 상인, 여행가, 불교 승려가 모였다. 도시민들이 가진 이념은 코스모폴리타니즘이었다. 종족, 성별, 나이를 뛰어넘는 평등성을 보였다. 모든 사람이 돈 앞에 평등했다. 만물의 무차별성, 이를 철학적으로 발전시키고 경전으로 만든 것이 바로 화엄경이다.

화엄일승법계도를 내고 얼마 안 돼 의상은 귀국했다. 스승이 입적했고 체류허가기한도 거의 만료됐기 때문이었다. 당시 당과 통일신라 사이엔 전쟁발발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의상은 선묘에게 한 마디 기별 없이 중국을 떠났다. 10년간 의상을 기다렸던 선묘는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의상을 보호하는 용이 될 것을 염원하며 투신했다. 나중에 의상이 영주에 절을 지을 때 누군가 방해하자 용이 나타나 커다란 바위를 공중에 띄워 이들을 위협해 쫓았다고 전해진다. 그게 바로 선묘룡이다. 절 이름도 그래서 부석사(浮石寺)로 지어졌다고 한다.

부석사 창건 뒤 문무왕이 의상에게 토지와 노비를 제공하겠다는 호의를 보였다. 그러나 의상은 정중히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법은 평등하여 지위가 달라도 함께 조화를 이루며 신분이 달라도 도를 같이 합니다. ‘열반경’에서 여덟 가지 부정한 재물을 경계하였거늘, 어찌 전장(田莊)을 소유하며 어찌 노비를 거느리겠습니까. 저는 법계(세상)로 집을 삼고 발우농사(구걸)가 익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법의 몸과 지혜의 목숨이 여기에 의해 생겨날 것입니다.”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왕이다. 강력한 왕권을 쥐고 있었다. 이런 왕의 호의를 거절한다는 건 목숨을 걸지 않고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거부한 이유로 든 평등사상이 골품제에 배치된다는 점에서 신라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교단이 경제적으로 지배계급에 의존하면 정신적으로도 예속된다. 비단 종교만이 아니다. 언론계나 학계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에 대한 우려 중 하나는 너무 자본주의화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력에 의존하면 예속될 수밖에 없다. 해야 할 말도 하지 못 한다.

하지만 의상은 달랐다. 돈을 받지 않은 의상은 나중에 왕에게 직언을 할 수 있었다. 681년 문무왕이 왕실 권위를 세우기 위해 경주에 왕성을 새로 쌓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켰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이 자문을 구하자, 의상은 편지를 띄워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풀이나 흙더미로 경계를 삼아도 백성이 감히 넘으려 하지 않아서, 재앙을 면하고 복이 됩니다. 정교가 밝지 못하면 뭇사람만 수고롭게 할 뿐이지만, 장성을 쌓더라도 재앙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정교란 ‘정도(正道)에 의한 교화’를 의미한다. 화엄경에서는 보살이 국왕이 되어야 한다는 ‘보살위왕설’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이상에 불과하다. 현실에선 혈연, 혹은 칼과 힘이 권력을 쥐었다. 보살이 왕이 될 수 없다면 대신 왕을 보살로 만들자는 게 당시 불교가 주장한 논리였다. 의상도 이런 국왕관에 근거해 자문에 응했고, 문무왕도 즉시 공사를 중단했다.

의상은 백성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교단 내에서 평등사상을 실천하며 노비와 빈민 출신 제자가 10대 제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했다. 사회에선 약자와 소외자 입장에 서서 지배층에게 양보를 촉구했다. 의상은 통일신라와 동아시아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불교적 평등사회에서 찾았다. 이를 위해 세속권력과 거리를 적당하게 유지했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의상은 불교에서 말하는 출가수행 본분에 충실했다. 의상은 불교 지식인의 전범이었다. 우리 시대에는 이런 지식인이 얼마나 존재할까?

“교단이 경제적으로 지배계급에 의존하면 정신적으로도 예속된다. 비단 종교만이 아니다. 언론계나 학계도 마찬가지다. ”

남동신 교수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론 ‘의상 화엄사상의 역사적 이해(역사와 현실 20, 1996)’ 등이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동아시아 구법승과 인도의 불교 유적(사회평론, 2009)’, ‘원효(새누리, 199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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