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를 되돌아보자. 2,500년 전 유럽을 탐구하면 자신의 내면을 깨닫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강의: 장재성 서울대 인문대학장
정리: 차병선 기자acha@hmgp.co.kr
유럽 문화는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관에 정신적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스인은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자유 민주주의를 추구했고, 로마인은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는 공화정을 중시했다. 민주(Demo Cratia)란 민중에게 힘이 있다는 말로 그리스적인 개념이다. 그리스는 산악지방이다. 땅이 척박하다 보니, 페르시아전쟁 전까진 외부 침입이 거의 없었다. 그리스인은 왕국이 아닌 폴리스를 세워 내부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평화를 추구했다. 민중의 힘을 추구하는 게 그리스의 이상, 그리고 행복이었다.
공화(Res Publica)란 ‘참정권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일’이란 뜻으로 로마적 개념이다. 로마는 출발부터 엄청난 전쟁을 치르며 커 나갔다. 외부로부터 공공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정권을 가진 사람들의 일이며 이는 곧 전쟁이냐 평화냐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민주와 공화는 현재 유럽뿐 아니라 대부분 사회에 보편화 되었다.
유럽은 언제부터 형성됐을까? ‘유럽’이란 말을 가장 먼저 쓴 건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다. 그는 유럽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 “그리스 본토를 제외한 그리스 북서쪽 너머의 땅들”이라고 썼다. 실제 유럽의 의미는 ‘문명화된 그리스를 넘어 야만인들이 사는 땅’이란 뜻이다. ‘유럽=야만’이란 공식은 15세기 전까지 통용됐다. 이전의 역사가들은 프랑스 역사, 독일 역사를 쓸 때도 유럽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유럽인들이 ‘유럽적 가치’, ‘유럽적 동질성’을 의식하고 유럽이란 단어를 사용한 건 15세기, 정확히 말해 1453년 이후부터였다.
1453년은 유럽인이 싫어하는 해다. 이슬람 세력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해다. 이슬람 세력이 집권하자 유럽 사람들은 비로소 유럽을 종교와 영토적 개념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유럽적 가치, 동질성, 그리스 로마 문화유산의 계승자라는 유럽인의 공동의식은 이때 태동했다.
유럽 문명의 핵심은 헬레니즘과 크리스챠니즘이다. 유럽 역사 초기 300년은 헬레니즘이 지배했고, 이후 1,000년은 크리챠스챠니즘이 대두했다. 다시 헬레니즘이 등장하는데, 이를 르네상스라고 한다. 그리고 헬레니즘과 크리스챠니즘이 이상하게 결합해 18~19세기 제국주의가 나온다.
이 두 사상적 조류의 기원은 헬레니즘 문명의 창시자이자 전파자인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기독교 복음 전파자인 사도 바울에서 출발한다. 알렉산드로스 이전 그리스인들은 세상을 헬라인과 비헬라인 둘로 나눴다. 비헬라인은 바르바로이, 즉 그리스어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리스인은 자신들이 만든 문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뒤집은 것이 바로 알렉산드로스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 전쟁을 벌였다. 그렇지만 이 전쟁은 땅을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서였다. 실존적인 자기실현을 위한 전쟁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왜 서쪽으로 가지 않고 동쪽으로 갔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당시 그리스의 시대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는 폴리스 체제로 운영됐다. 아테네 인구는 기껏 1만 2,000명 수준이었다. 전쟁 규모도 작았다. 이들에겐 폴리스가 이상적 체제였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외부에서 페르시아의 80만~100만 대군이 몰려오자 폴리스는 쑥대밭이 됐다. 그때 그들의 이상이 흔들렸다. 그전까지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는 폴리스가 이상적이었다. 그렇지만 외부 침략을 당해낼 수 없었다. 계속 폴리스를 유지해야 하나, 왕 체제로 바꿔야 하나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수많은 소피스트와 철학가, 역사가가 등장했다.
이들이 논쟁하는 사이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립포스가 그리스를 점령하고 폴리스 유지파를 모두 죽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부자에겐 약점이 있었다. 이들은 마케도니아, 즉 야만인 출신이었다. 진정한 왕으로 인정받으려면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복수를 해야 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는 동쪽으로 떠났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고 유능한 이를 장군으로 중용했다. 이방인에게 그리스 병사의 생사여탈권을 준 것이었다. 그리스 인들이 불만을 터뜨렸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개의치 않았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현지인들의 협조가 꼭 필요했다. 그는 헬라인과 비헬라인으로 나뉜 세상을 모두 평등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는 세상을 신과 신민으로 나누었다. 자신을 신격화하는 동시에 모든 신민은 평등하다는 놀라운 평등 개념을 만들었다. 바로 코스모폴리타니즘이다. 그렇게 그가 죽은 뒤 남은 신민은 모두 평등한 사람이 됐다.
로마에선 레스푸블리카, 즉 참정권자들이 모여 전쟁과 평화를 결정했다. 로마는 왕이 존재하지 않는 국가였다. 집정관 임기가 1년일 때 로마는 가장 위대한 국가를 건설했다. 로마가 가장 비참해진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로마가 가장 부유했을 때였다. 기원전 3세기 로마는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지중해 상권을 거머쥐었다. 식민지를 확장하면서 엄청난 부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불과 800명에 불과한 원로원 귀족이 부와 땅을 독식했다. 그리고 평민들이 분배를 요구하면서 나라가 갈라졌다. 100년 동안 핏빛 내전이 벌어졌다.
그걸 종식시킨 게 바로 카이사르다. 그는 이 비참한 전투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런 의미에서 카이사르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문제는 그후 독재자가 된 것. 로마에서 황제는 최고 명령권자, 곧 생사여탈권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로마인은 그에게 생사여탈권을 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카이사르를 죽였다. 알렉산드로스가 헬레니즘을 남긴 자리에 300년 뒤 자기가 신이라고 말하는 또 한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예수다. 그는 세상을 신과 죄인으로 나눴다. 예수가 태어난 이스라엘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에겐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사람을 나누는 인간관이 있었다. 편협한 세계관이었다. 그런데 예수가 나타나서 이걸 산산조각 냈다. 신과 죄인으로 인간을 나눴다. 그 후 바울이 서쪽으로 가면서 그리스와 로마를 통해 기독교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렇게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난 후에 그랬던 것처럼 예수가 하늘로 간 후에 모든 사람이 평등해졌다. 노예를 풀어주고 형제라 불렀다. 당시 세계관으로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유럽의 전 역사를 통해 헬레니즘과 크리스챠니즘은 서로 경쟁하고 융합하면서 정신세계를 이끌어 나갔다. 인간의 평등과 행복 추구, 이것이야말로 서양 정신체계의 근본이다. 알렉산드로스와 예수 사상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떠나라.” 이는 내 강의의 핵심이기도 하다. 편협한 세계관에서 떠날 때 자기 자신과 행복을 찾을 것이다. 세계관에 예속되면 자기 개념의 노예가 된다.
장재성 교수는…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7대학 언어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겸 인문대 학장을 맡고 있으며, 최고지도자 인문학과정(AFP) 운영도 책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