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남양주시 도농동에 사는 주부 김슬기(37)씨는 주변 학부모 사이에서 '파워맘'으로 통한다. 6살 아들을 키우며 체득한 쇼핑 노하우를 인근 아파트 주부들에게 소개해준 것이 계기가 돼 지금은 웬만한 지역 유명인사 못지않은 대접을 받는다. 기저귀와 유모차 고르는 법에서부터 청소용품·아동복·화장품까지 망라하는 풍부한 정보력이 김씨의 경쟁력이다.
김씨는 정기적으로 아파트 인근 베이커리 전문점에서 모임을 갖고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에도 수시로 신제품 정보나 백화점 할인행사 등을 소개한다. 김씨는 "취미 삼아 개설한 인터넷 카페가 인근 주부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어느새 지역 최대 커뮤니티로 자리 잡았다"며 "최근에는 각 업체에서 신제품이 출시되기 전에 미리 상품을 보내주기도 해 달라진 위상을 실감한다"고 웃었다.
막강한 소비력을 앞세운 3040세대 주부, 이른바 '현대판 맹모(孟母)'가 새로운 소비권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다. 탄탄한 경제력과 적극적인 소통을 발판으로 제품 개발과 여론까지 주도하면서 외식·패션·영유아용품·명품 등 유통업계의 판도를 뒤흔드는 신흥 소비주체로 떠오른 것이다. 제품 구입에서 나아가 지속적으로 상품평을 작성하고 의견을 공유하기 때문에 맹모는 유통업계에서도 가장 가까운 고객이자 가장 두려운 존재다.
새로운 소비권력으로 부상한 맹모는 단순히 자녀에게 헌신하는 것을 넘어 본인이 소비 주체가 돼 적극적으로 지갑을 열고 시장의 트렌드를 이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 소비주체다. 맹모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으면 단숨에 인기 상품이 되고 권하고 싶지 않은 제품으로 낙인이 찍히면 바로 시장에서 외면받기 때문이다. '원조 맹모'가 어린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하며 자녀에게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모델이었다면 '신흥 맹모'는 자녀를 중심에 두되 자신의 만족감과 자존감도 중시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정연승 단국대 경영학부 교수는 "경제력을 갖춘 3040세대 주부는 경제 발전과 디지털 시대를 모두 경험한 세대이기에 자녀 교육을 최우선시한 기존 주부들과 출발부터 다르다"며 "자녀 교육에 대한 열정만큼 주도적으로 본인이 소비하고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맹모의 영향력은 최근 문을 연 현대백화점 판교점에서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현대백화점이 수도권 최대 백화점을 표방하며 야심 차게 선보인 판교점은 매장 설계와 내부 동선부터 맹모를 겨냥했다. 유모차 3개가 동시에 지나갈 수 있도록 기존 점포보다 매장 간격을 넓혔고 층별로 휴식공간까지 별도로 마련했다.
백화점업계 격전지로 부상한 식품매장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수도권 최대 랜드마크 백화점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업계 최초로 선보인 디저트·베이커리·음료 등의 브랜드도 10여개에 달한다. 육아와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은 맹모를 끌어들이기 위해 기존의 문화센터보다 교육과정을 세분화한 '현대어린이책미술관'도 주부 고객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김준영 현대백화점 홍보팀장은 "판교점 개점 이후 고객 이용률을 분석한 결과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의 기혼여성의 비중이 수도권 기존 점포보다 10%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며 "판교점이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주부들 사이에서 각종 육아정보를 나누고 친목을 다지는 일종의 '문화허브'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라고 전했다.
외식업계에서도 맹모는 이미 큰손으로 자리 잡았다. 재일교포인 김미화 대표가 일본에서 창업한 롤케이크 브랜드 '몽슈슈'의 국내 진출은 사실상 서울 강남에 거주하는 맹모가 주도했다. 몽슈슈는 출시하자마자 오사카의 명물로 불릴 만큼 현지에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국내에는 여전히 생소한 브랜드였다. 기존 롤케이크의 절반에 불과한 크기에 가격은 2배 이상 비싸 백화점 식품 바이어들조차 몽슈슈의 상품성을 인정하면서도 선뜻 국내 도입에는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 여행에서 몽슈슈를 접한 맹모들이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 후기를 올리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몽슈슈를 맛보기 위해 하나둘 일본 여행을 떠나는 주부들이 늘고 급기야 공동구매까지 진행하자 백화점 3사가 일제히 유치전에 뛰어든 것이다. 몽슈슈는 지금도 일찌감치 줄을 서야 구입할 정도로 국내 백화점 디저트매장의 간판 제품이 됐다.
서울 양천구 목동에 위치한 맥도날드 파리공원점은 '목동 맹모의 메카'로 불린다. 목동아파트단지에 둘러싸인 이곳은 24시간으로 운영되고 자동차에서 제품을 주문하고 수령하는 드라이브스루 서비스도 이용할 수 있다. 교육열이 상대적으로 높은 목동 주부들이 수시로 학부모 모임을 갖고 반상회를 열기에 최적의 장소인 셈이다. 이 때문에 맥도날드 파리공원점의 낮 시간 매출은 전체 300여개 매장보다 10~20% 높다.
맹모를 겨냥한 특화 매장과 전용 메뉴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CJ제일제당 본사가 있는 서울 중구 쌍림동 CJ제일제당센터의 '라뜰리에 뚜레쥬르'는 맹모들 사이에서 꼭 방문해봐야 하는 매장으로 꼽힌다. 기존 뚜레쥬르보다 실내를 고급스럽게 꾸미고 브런치 메뉴를 다양화한 이곳은 길 건너 충무초교와 덕수중 등도 있어 자녀를 학교에 보낸 후인 오전10시와 오후1시쯤 고객들이 몰린다.
커피전문점 할리스는 맹모를 겨냥해 최근 독일식 팬케이크인 '더치 베이비'를 점심과 저녁 사이에 먹을 수 있는 간편식 메뉴로 내놓았다. 자녀 하교를 기다리는 주부들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도록 오후3시부터 4시 사이에는 할인도 해준다. 패밀리레스토랑 TGI프라이데이는 올 2월 평일 오전11시부터 오후5시까지 1만원인 디저트바를 50% 할인해주는 이벤트를 상시 진행 중이다. 5,000원만 내면 케이크 10조각과 커피를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어 젊은 주부들의 발길이 잇따르고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신흥 소비권력으로 부상한 맹모는 육아용품의 유통구조까지 바꾸고 있다. 주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는 소셜커머스 전문업체 쿠팡이 대표적인 사례다. 쿠팡은 미국 영화배우 제시카 알바가 창업한 유아용품 브랜드 '어니스트'가 현지에서 인기를 끌자 지난 5월 국내 총판 계약을 단독으로 체결해 화제를 모았다. 어니스트의 주력 제품인 친환경 기저귀를 해외에서 직접 구매하는 주부들이 늘자 백화점보다 발 빠르게 국내 유통권을 따낸 것이다.
7월에는 젊은 주부들이 많이 거주하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 지역에 업계 최초로 2시간 배송 서비스까지 도입했다. 아직 시범 서비스인 탓에 대상 제품이 기저귀·분유 등 육아상품에 한정되고 배송비 5,000원도 추가로 내야 하지만 반응은 폭발적이다. 쿠팡 관계자는 "인건비와 배송비 등을 감안하면 2시간 배송은 사실상 이익을 낼 수 없는 구조지만 쿠팡의 브랜드 인지도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효율적인 마케팅 수단"이라며 "주부들의 반응이 좋아 장기적으로는 육아용품뿐만 아니라 생필품으로까지 서비스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이 8월 선보인 아동복 'V주니어'도 맹모들의 입소문을 타며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경우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싸 마케팅팀 내부에서도 성공 여부를 둘러싸고 의견이 엇갈렸지만 출시 2주 만에 25종 제품 중 9종이 재생산에 들어갈 정도로 인기몰이다. 기존 아동복과 달리 성인용과 똑같은 디자인으로 만들어 부모와 자녀가 커플룩으로 입을 수 있다는 점이 판매를 견인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주현 신세계인터내셔날 마케팅 매니저는 "고객들이 가장 많이 구입하는 제품은 엄마들이 즐겨 입는 롱카디건, 모직팬츠 순"이라며 "아동복스럽지 않은 아동복이어서 엄마와 아이가 함께 맞춰 입을 수 있다는 점이 V주니어의 인기 비결"이라고 말했다.
맹모가 신흥 소비권력으로 급부상하면서 주요 브랜드의 마케팅 전략도 달라지고 있다. 맹모가 주로 활동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와 지역 모임에 참여해 제품 홍보와 체험단 모집 등을 진행하는 식의 입소문 마케팅이 갈수록 확산하는 추세다. 이 때문에 일부 업체들은 정식 출시를 앞두고 하자가 있는 시제품을 체험용으로 전달했다가 오히려 역효과를 거두는 일도 잇따른다.
최근에는 콧대 높던 일부 명품 브랜드까지 나서 육아 커뮤니티에 체험단을 모집하거나 우수 후기를 올린 고객에게 제품을 증정하는 등의 이벤트를 열고 있다. 맹모가 신제품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바로미터이자 시장을 이끄는 핵심 소비주체로 부상하자 명품 브랜드의 마케팅 전략도 바뀌고 있다는 얘기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국민소득 3만달러를 전후해 경제력을 갖춘 주부가 어느 집단보다 강력한 소비주체로 부상하는 것은 선진국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트렌드에 민감하면서 자기 표현을 중시하는 3040세대 주부의 영향력은 갈수록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지성·이지윤기자 engine@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