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26년 전인 지난 1989년 5월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은 "미국 뉴욕 근처의 뉴저지주에 롯데월드 같은 테마파크를 짓겠다"고 선언했다. 신격호 총괄회장은 당시 5,000억원을 투자해 놀이공원과 숙박시설 등을 모두 갖춘 테마파크를 5년 내 만들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1988년 미국 포브스가 세계 4위 부호로 꼽은 그에게는 어려울 것도 없어 보였다. 미국 동부에 디즈니랜드가 있다면 서부에서는 한국인이 구상한 한국형 테마파크로 전 세계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겠다는 것이 신 회장의 계획이었다. 일본 도쿄에 롯데월드 같은 시설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던 그였지만 그의 꿈은 이렇게 더 큰 무대를 향해 있었다.
보수적 경영으로 일관했어도 글로벌 무대를 향한 열정은 어느 총수를 능가했다. 개인적으로도, 사업상으로도 연고가 없는 미국에서 사업 허가부터 따내기가 어려워 결과적으로 수포로 돌아갔지만 신격호 총괄 회장은 한국인이 만든 무언가를 해외로 수출한다는 데 자부심을 갖고 이를 더 늘리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신격호 회장이 한국인으로서, 수출 역군으로서의 자부심에서 해외 사업을 추진했다면 26년이 흐른 지금 롯데는 해외 시장이 아니면 더 이상의 성장이 불가능한 상황에 몰렸다.
이를 주도한 것은 바로 그의 둘째 아들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었다.
현재 롯데그룹 전체의 매출 90%는 한국·일본 두 개 나라에서 나온다. 국제 감각을 갖춘 신동빈 회장의 지휘 아래 해외 진출이 본격화된 지 오래다. 성장성이 높은 'VRICI(베트남·러시아·인도·중국·인도네시아)' 5개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 20여국에 5만여명의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롯데백화점과 마트·롯데리아·롯데호텔·롯데제과뿐만 아니라 롯데케미칼 등도 꾸준히 해외 사업 영역을 확장해왔다.
신동빈 회장은 직접 각국을 돌며 해외 사업을 챙기고 있다.
올해 5월 1조원 규모로 진행되는 중국 청두의 롯데몰 주상복합타운 프로젝트 현장을 방문해 직접 둘러봤으며 6월에는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소비재포럼(CGF)에 참석해 세계 최정상의 소비재 기업 최고경영자(CEO)들과 함께 다가올 시장 트렌드를 모색했다. 3월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는 쯔엉떤상 베트남 대통령을, 5월에는 잇따라 국빈 방한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을, 7월에는 후안 오를란도 에르난데스 온두라스 대통령을 만나 앞으로의 협력 강화와 추가 진출 방안 등을 논의했다. 직접 각국 수장들을 만나 롯데의 글로벌 사업을 챙겼다.
신격호·동빈 부자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든든한 인맥으로 글로벌 사업에 덕을 많이 봤다.
신격호 총괄회장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 등과의 인맥을 자랑한다. 1990년 롯데월드의 '매직 아일랜드' 개장식에 나카소네 부부가 직접 참석해 축하해줬을 정도다. 신격호 총괄회장은 양국 정치인의 소통과 만남을 주선해가며 경제적·정치적 협력 강화를 이끌었다. 1985년 신동빈 회장이 시게미쓰 마나미씨와 결혼했을 때는 중매를 맡았던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가 주례로도 나섰으며 당시 현직 총리였던 나카소네가 축사를 낭독하기도 했다.
신동빈 회장은 신격호 총괄회장 때부터의 인연으로 현재 아베 신조 총리와도 막역한 사이다. 6월에도 일본을 찾아 아베 총리와 면담했다. 신동빈 회장은 일본 정·재계 외에도 영국 금융권 등에 인맥이 넓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치로 봤을 때 현재 롯데의 해외 사업은 여전히 제 궤도에 오르지 못했다는 평가다.
최근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밝혀진 롯데의 중국 사업 손실이 대표적인 경우다. 롯데는 최근 4년간 중국에서 총 1조원의 손실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롯데쇼핑홀딩스 홍콩은 지난해 3,439억원의 손실을 냈고 롯데마트차이나는 1,396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현지 경쟁사나 온라인 유통서비스와의 경쟁을 이겨내지 못한 탓이 컸다. 롯데그룹이 주력 시장으로 꼽는 베트남·인도네시아 등지에서도 적자가 늘어나고 있다.
롯데는 이로 인한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롯데 관계자는 "해외 사업장 확장뿐만 아니라 러시아·인도네시아 등지에서의 인수합병(M&A)을 추진하면서 자금 조달도 활발히 이뤄져야 하는 상황"이라며 "이 와중에 터진 경영권 분쟁이 롯데의 해외 신인도에 악영향을 미칠지 주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글로벌 롯데'의 꿈을 실현하는 데 절박한 시기에 너무나 뼈아픈 일을 겪고 있는 것이다.
롯데그룹 계열사의 한 중역은 "중국 등 해외 유통 시장에서의 초기 투자 단계가 어느 정도 끝나 이제 겨우 흑자 전환을 기대하고 있던 상황"이라며 "무사히 이번 사태를 극복해야 해외 사업을 본궤도에 올리기 위한 작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