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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장들이 모이는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한국은행 임원들은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이 어떻길래 재정을 더 풀고 금리를 낮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고 한다. '대략 3% 중반'이라고 대답하면 "디플레이션 가능성이 오르내린다던데 1% 중반이 아니냐"고 재차 반문한다. "3% 중반이 맞다"고 하면 그제서야 "한국은 정말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반응이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한은은 지난 10월 올해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을 3.5%로 낮췄다. 3% 중반의 GDP 성장률은 수치상으로 결코 나쁘지 않다. 2012년 2.3%는 물론이고 2013년의 3%보다 높다. 그럼에도 대다수 국민들은 지난해와 재작년보다 경기가 좋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외환위기 때보다 더 나쁘다고 하소연하는 상공인이 한둘이 아니다.
실제로 성장을 이끌 주요 축인 내수는 물론 기업의 투자 등은 좋지 않은 상황이다. 더구나 수출 전선마저 불안해 기업 매출 증가율이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뒷걸음질(상반기 기준)할 정도로 기업의 살림도 극과 극으로 갈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성장률만 3% 중반을 찍을 것으로 보여 도대체 경제가 어디에서 성장한 것인지 궁금증마저 증폭되는 실정이다. 한은의 3·4분기 국민소득(잠정)을 보면 올해 1·4~3·4분기 GDP 성장률은 지난해 동기 대비 3.53%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1·4~3·4분기의 2.73%에 비해 0.8%포인트나 높다. 한은은 올 전체 성장률도 3.5%로 지난해(3.0%)에 비해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수출 이외 심리부터 실물까지 지표가 좋은 게 하나도 없는데 성장률이 더 높아질 수 있느냐는 근본 물음이다.
비밀은 재고에 있었다. 재고가 늘어나면 GDP도 늘어난다. 수요가 부진해 재고가 늘어났고 이것이 역설적으로 GDP를 끌어올리고 있다. 재고 증감 및 귀중품 순취득의 경제성장률 기여도는 지난해 -1.87%포인트에서 올해 0.5%포인트(15.6%)로 플러스 반전됐다. 지난해는 재고가 성장을 까먹었다면 올해는 성장을 이끌었다는 얘기다. 김성자 한은 지출국민소득팀 과장은 "재고가 늘어나면 경제성장률에는 플러스, 줄어들면 마이너스"라며 "올해는 재고가 늘어나 경제성장률에 보탬이 됐다"고 말했다. 물론 적정 재고는 필요하다. 하지만 수요위축에 쌓이는 재고는 '자산'이 아닌 '미래의 부채'다. 기업이 공격적 투자를 할 수 없는 이유다. 여기에다 설비투자가 기저 효과로 반등한 것도 GDP 증가에 영향을 있었다. 한마디로 '질 나쁜 성장'을 한 것인데 올해 성장률이 지난해보다 높아지는데도 체감은 악화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GDP의 성장기여도를 보면 재고, 설비투자, 민간소비 등 8개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민간소비나 정부소비 등은 경제위기의 상황이 아닌 이상 큰 변화가 없다. 지난해와 올해 3·4분기를 비교해 봐도 이는 명확하다. 지출항목별 경제성장률 기여도를 분석한 결과 민간소비(1.03→0.97%포인트), 정부소비(3.37→0.4%포인트), 지식재산생산물투자(3.37→0.33%포인트)는 지난해와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재고나 설비투자, 수출 등은 매년 수치의 변화가 많다. 성장을 이끌기도 하고 또 끌어 내리기도 한다. 강중구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GDP는 크게 내수와 순수출로 구성되는데, 내수도 부진하고 수출도 부진해서 성장을 이끌 요소는 별로 없다"고 말했다.
◇수요 부진형 재고 급증…GDP에는 되레 플러스=반면 재고증감 및 귀중품 순취득 부문은 지난해에 성장률을 -1.87%포인트나 깎아 먹었는데, 올해는 0.5%가 늘어나는데 도움을 줬다. 생산량 확대로 증가하는 재고는 경제에 긍정적이다. 하지만 수요 감소에 따른 것이면 부정적 요소가 강하다. 김성자 과장은 "현재는 국내는 물론 수출로도 제품이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3·4분기 제조업 재고지수는 지난 분기 129.7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2010년 재고가 100개였다면 현재는 129.7개라는 뜻이다. 또 제조업 평균가동률도 75.8%로 1년래 최저다. 현재의 재고가 공장이 돌아가지 않아서 쌓이고 있다는 의미다. 소비와 수출이 부진한 게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역설적인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 재고가 경제성장률에 영향을 미치는 사례는 종종 있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일본의 3·4분기 경제성장률이 연율기준 1.6% 역성장한 가장 큰 이유로 재고가 감소한 것을 들었다.
◇설비투자 역시 기저효과에 의한 착시=지난해 성장률을 깎아 먹은 설비투자도 올해는 성장세에 일조했다. 지난해 1~3분기 설비투자의 성장률 기여도는 -0.53%포인트였으나 올해는 0.57%로 플러스 반전됐다. 배병호 한은 조사총괄팀 차장은 "설비투자는 지난해가 워낙 안 좋아서 올해 기저효과로 늘어난 것으로 보일 뿐 2012년과 비교했을 때 호조는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올해 1~3분기 설비투자의 명목생산액은 94조 6,400억원으로 전년 동기(91조 4,300억원)에 비해 3.5%늘었으나 2012년(98조 4,500억원)에 비해서는 3.9% 줄었다.
지난해 2.73%의 성장률 중 2.37%포인트의 기여도(86%)를 자랑했던 순수출은 올해 0.47%포인트(로 쪼그라들었다. 순수출의 성장기여도가 작년대비 6분의 1토막 난 셈이다. 순수출이란 수출액에서 수입액을 뺀 것으로 지난해는 수출이 호조를 보인 반면 수입은 저조해 경제성장률에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올해는 수출 증가세가 둔화한 반면 수입 증가세는 빨라져 결국 순수출 기여도가 줄었다. 지난해 1~3분기 평균 수출은 전년 대비 4.7% 성장한 반면 올해는 3.57% 늘어나는 데 그쳤다. 반면 수입은 지난해 0.47% 증가에서 올해 2.97%로 확대됐다. 이와 함께 지난해 성장률 중 1%포인트 보탬이 됐던 건설투자는 올해 성장률을 0.3%포인트 높이는 데 그쳤다.
◇위기 강조한 경제부총리 발언도 체감도 낮춰= 수치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취임 이후 '일본식 불황 초입에 와 있다'는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발언도 체감경기를 낮추는 데 상당한 몫을 했다는 지적도 있다. 막대한 재정을 쏟아 붓고 확장적인 통화정책을 이끌기 위한 '정치적' 발언이었지만 결국 그것이 되려 경제주체들의 심리를 얼어 붙게 해 투자나 소비 등의 위축을 불러 일으켰다는 얘기다. 또 대외 여건상 전망이 비관적인 것도 실제 경기와 체감 경기를 괴리시키는 원인으로 지목된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4% 이상의 성장을 위해서는 민간소비가 최소 1% 중반은 나와야 하는데, 작년에 이어 올해도 1%를 밑도는 수준"이라면서 "GDP 기여도가 0.5%를 밑도는 정부의 소비로는 성장을 이끄는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