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일단 거창해야 한다. 가난과 '왕따' 같은 폭력을 극복해야 했던 어린 시절을 담아야 하며 지역과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는 '계시'를 받았거나 남다른 사명감으로 공직을 선택했다는 대목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여기에 로맨스 같은 아내와의 만남, 아니면 일생의 멘토나 거물 정치인과 우연한 기회의 조우 등이 곁들여지면 금상첨화다.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 번쯤 받아봤을 예비후보자들이 자랑하는 책의 내용이 아니다. 미국 정계의 얘기다.
△미국의 정치 전문매체인 폴리티코가 '왜 정치인의 책은 그렇게 끔찍한가(Why are politician's books so terrible?)'라는 특집 기사에서 꼬집은 내용이다. 과거에는 공직을 떠나기 전에 자서전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제는 책이 '대박'을 치지 못하면 아예 공직 선거에 나설 생각을 말라고 폴리티코는 충고한다. 사실 이처럼 별 내용도 없는 책들이 쏟아지는 것 자체가 정치인에게는 홍보 수단, 출판사에는 돈이 되는 이해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출판이 정치나 선거에 이용되는 것은 미국보다 한국이 더 앞서가지 않을까. 우리네 여야 정치권은 출판기념회가 선거자금을 모으는 공식 채널임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실제 공직 선거, 그것도 기초단체장 이상의 공직에 출마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출판기념회를 하거나 저서를 내놓는다고 중앙선관위는 추정했다. 광역단체장과 교육감 예비후보자 186명, 광역의원과 교육위원 3,750명까지 더하면 4,000여명 정도가 지난해 말에서 올 초 사이에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내용의 책을 출판했다는 얘기다.
△지방선거 90일 전인 지난 3월 6일부터 출판기념회는 금지됐고 기부 행위를 금지한 공직선거법 110조에 따라 예비후보자의 책을 공짜로 준 사람이나 받은 사람 모두 처벌받는다. 꼭 법으로 막아야 하나? 뻔한 거짓말로 고물상 폐지만도 못한 '선거 출판'에 대해 이제 유권자들 스스로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때다. /온종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