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깜짝쇼' 끝났지만… 국론분열·민생파탄·국가망신 상처만 남아

■ 그리스 국민투표

"미래 위해 찬성표"vs"얻는게 없어 반대" 팽팽

치프라스 총리 승부수 불구 사태 되레 꼬일 조짐

은행 6일 다시 문 열어도 하루 버티기 힘들듯



#. 그리스에서 관광업체를 운영하는 22세의 청년 창업가 아리스 스필로토포울러스는 5일(현지시간) 오전7시 국민투표가 시작되자마자 투표소를 찾았다. 해외 채권단의 경제개혁 요구를 받아들일지를 묻는 이번 투표에서 그가 던진 표는 '찬성(NAI)'. 20~30년 뒤 자신과 자녀의 미래를 생각한 결정이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 비슷한 시각 다른 투표소를 찾은 체육교사 알키비아디스 코치스는 '반대(OXi)' 표를 행사했다. 해외채권단의 재정긴축 요구로 그리스가 경제난에 시달렸다고 주장하는 그는 "(채권단으로부터) 얼마나 돈을 빌리든 (긴축에 따른 경제난으로) 생산활동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얻는 게 없다"고 꼬집었다.


그리스의 운명이 걸린 국민투표가 숱한 논란 속에 결국 5일 치러졌다. 이번 투표는 채권단이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내건 증세·연금삭감·재정긴축 등을 받아들일지 민심에 묻겠다며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 정부가 연출한 깜짝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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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0만여명의 유권자 표심을 놓고 그리스 정부가 단행한 이번 도박판을 벌이기 위해 들어간 비용은 지난 1월 실시했던 국회의원 총선거의 절반에 육박했다. 가뜩이나 재정난에 처한 정부가 큰돈을 들여가며 던진 승부수였지만 개표 결과에 관계없이 사태는 풀리기보다는 오히려 꼬일 조짐을 보이고 있다. 투표는 끝났지만 논란은 더 커지고 국론분열, 민생파탄, 국가 망신의 깊은 상처만 늘었기 때문이다. 니코스 마란치디스 마케도니아대 정치학 교수는 "(5일 투표가 끝나면) 월요일부터 그리스가 직면할 문제는 심각한 경제상황뿐이 아니다"라며 "그리스는 매우 깊게 분열된 나라가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무엇보다 갈라진 민심이 가장 큰 문제다. 투표 직전 마케도니아대의 응용사회경제학연구소가 1,042명의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오차범위 ±3.0%포인트)를 보면 채권단 요구에 대한 반대 의견이 43.0%, 찬성 의견이 42.5%로 팽팽했다고 5일 블룸버그는 전했다. 국민들의 의견이 양분된 상황에서는 그리스 정부가 투표 결과를 바탕으로 향후 어떤 정책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다시 뒤집힐 수 있다. 그만큼 정부는 대외신인도를 얻기 힘들어진다. 앞으로 진행될 3차 구제금융협상 과정에서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채권단으로부터 현재의 그리스 정부가 신임을 얻기 힘들다는 뜻이다. 국민투표를 통해 대외협상력을 높이겠다던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의 계산은 빗나가게 됐다.

민생 경제는 한층 망가졌다. 그리스 정부가 이번 투표 단행 방침을 깜짝 발표했던 지난달 26일 이후 시중에 돈이 말랐기 때문이다. 특히 시중은행들은 마지막 자금줄이었던 유럽중앙은행(ECB)으로부터 급전(긴급유동성지원금·ELA)을 추가로 받지 못하게 돼 대출은커녕 예금자들의 인출액마저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 지난달 말부터 줄줄이 임시폐점했다. 은행에서 돈이 돌지 않자 내수는 쇼크 상태에 빠졌다. 관광과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인데 자금 결제난에 처하게 되자 외국인 방문도, 상품 수입도 차질을 빚고 있다. 치프라스 총리는 투표가 끝나면 6일부터 은행을 다시 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지만 정작 현지 은행들은 겨우 하루는 문을 열더라도 다음날인 7일부터는 다시 폐점할 수밖에 없다는 게 CNBC 등 주요 외신들의 전언이다. 현지 은행들의 지불준비금이 지난 3일부터 5억달러에도 못 미칠 정도로 자금난에 처한 탓이다.

무너진 경제를 되살리려면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수밖에 없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치프라스 정부가 지난달 말 16억유로 규모의 IMF 채무를 연체하는 국가 망신을 당한 후 '부도 위험 국가'라는 낙인이 한층 깊게 찍혀 해외투자가도, 채권자도 함부로 그리스에 돈을 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태 악화가 장기화할 수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야누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도 3일 경제난에 대비해 6개월간 버틸 수 있는 음식, 약제, 에너지 원자재 등을 비축했다며 으름장을 놓았다고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소개했다.


민병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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