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 디지털 경제 vs 아날로그 정책


조경엽 한국경제연구원 금융재정연구실장 디지털화는 글로벌 생산구조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고 있다. 노동자의 경험과 지식에 의존하면서 모든 부품을 단일 시설에서 생산하던 시대는 끝났다. 애플의 아이패드도 세계 곳곳의 기업에서 생산된 부품을 대만에 본사를 둔 제조사가 중국 노동자와 생산시설을 이용해 조립한다. 모듈화로 정의되는 이런 생산방식은 거의 모든 산업에서 일어나고 있다. 새 디자인 발굴, 시시각각 변하는 주문에 신속 대처하지 못하는 기업은 언제라도 모듈화된 공급사슬에서 추방될 수 있다. 기업 발목잡는 간섭ㆍ규제 첩첩 대부분의 중국 기업들은 모듈화된 글로벌 생산체계에서 공급사슬의 맨 아래 단계인 단순 조립업무를 담당하지만 선도기업이 요구하는 세부규격, 품질표준, 납품일정ㆍ단가 등을 맞추는 과정에서 상당한 수준의 기술을 축적했다. 하이얼ㆍ화웨이ㆍ레노보 등 일부는 세계적인 브랜드를 가진 기업으로 성장했다. 중국 기업들이 제조업의 강자로 등장하면서 과거 첨단제품으로 분류되던 컴퓨터ㆍTVㆍ디지털카메라 등의 가격은 크게 낮아졌다. 이에 따라 선진 혁신기업들은 독점적이고 코드화되지 않은 노하우를 적용할 수 있는 분야를 개척, 독점적 부가가치를 창조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이들은 대규모 설비투자보다 여러 업계를 손쉽게 넘나들고 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지식개발 투자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애플이 제조업에서 손을 떼고, IBM이 컴퓨터 제조업을 중국 기업에 매각한 이유도 새로운 글로벌 생산구조에서 선도기업으로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국 정부나 국민들은 제조업 시설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이전된다고 해서 애플이나 IBM을 탓하지 않는다. 애플이 창출하는 부(富)가 직ㆍ간접적으로 막대한 고용창출과 투자촉진 효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모듈화 생산 과정에서 창출되는 대부분의 수익이 이를 선도하는 선진기업의 몫으로 돌아가지만 하위 단계의 중국 기업들도 글로벌 생산체계를 부정하거나 선도기업의 경영전략을 죄악시하지 않는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우리나라의 대부분 기업들도 글로벌 생산체계에서 선도기업, 납품업체 또는 조립업체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 스마트폰, 스마트TV, 반도체 메모리칩 등 생산공정을 주도하고 새로운 표준을 설정해가는 제품도 적잖다. 하지만 투자ㆍ고용ㆍ이윤폭, 심지어 가격 설정까지 간섭받는 환경에서 선도기업으로 살아남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한계 없는 혁신이 요구되고 여러 업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어야 하는 모듈화 세계에서 설비투자를 강요하고, 생산성이 낮은 인력을 의무적으로 고용하고, 수익의 한도를 정하려는 아날로그적 정책이 넘쳐나는 나라에서 글로벌 경제를 주도할 선도기업이 탄생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과욕일 것이다. 하청사 보호정책이 毒 될수도 납품업체가 수많은 경쟁사들을 제치고 선도기업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려면 끊임없는 기술개발을 통해 보다 빠르고 저렴하게 생산할 수 있는 노하우를 축적해야 한다. 나아가 보다 효율적인 부품을 개발, 선도기업이 계약을 끊을 수 없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공생발전이라는 명목으로 하청업체를 보호하려는 정책은 오히려 이들의 경쟁력을 저하시키고 글로벌 생산체계에서 퇴출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중소기업의 미래는 중국ㆍ대만 등지의 기업과 당당히 경쟁하고 글로벌 공급사슬의 한 축을 담당할 때 보장될 수 있다. 초과이익공유제, 청년의무고용할당제, 중소기업 적합업종, 공생발전을 위한 각종 규제 등 디지털 시대에 걸맞지 않는 아날로그 정책이 만연하는 환경에서 선도기업이 설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제 정책도 디지털화를 도모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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