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어떤 자리에서 A씨와 오간 이야기를 문답식으로 전해드린다. 정치권에서 수십년 잔뼈가 굵은 A씨는 현재 정계의 중립적 위치에 있다. 그는 남도 출신이다.
-그 양반이 그 당 대선 후보가 되려나 봐요.
"경선에서 왜 그 분 지지율이 높게 나오는지 아십니까."
-본선 경쟁력이겠죠. 과거 정권의 맥도 잇고….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그 양반이 그나마 물러나줄 것 같기 때문이죠."
"물러나다니요?"
"양보 말입니다."
"???"
"안철수 씨에게 양보하는 거죠. 그 양반을 올려놓아야 안씨로 단일화되기 쉽다고 보는 심리가 지지계층의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다른 후보, 특히 XXX씨 같은 분은 성향상 절대 자리 양보하지 않을 거라고 보는 거죠."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대선에 나가 필승할 사람을 당 후보로 뽑는 게 아니고 때가 되면 물러설 줄 아는 사람을 밀고 있다는 게 아닌가. 모든 지지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다만 얼마라도 그렇게 '버리는 카드'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정말 기막힌 선거다. 친목 서클도 아닌 역사적 정당의 공식 경선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A씨는 자신도 정치판에서 온갖 풍상을 다 봤지만 이처럼 해괴한 선거는 전대미문이라고 했다.
또 하나의 코미디가 있다. 이것은 많은 국민들도 목격한 일이다. 지난주 안철수씨 측근이 새누리당 대선기획단 위원에게서 "협박"전화를 받았다고 폭로하는 기자회견장에 뜻밖의 인물이 나란히 서 있었다. 호위병처럼 선 그는 정당 소속의 현역 국회의원이다.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국민은 "아니 저 사람이 저기 왜?"어리둥절하다.
참으로 황당한 일들이지만 이게 지금 우리를 둘러싼 억지 현실이다. 국민의 최고지도자를 뽑는 엄중한 국가행사가 희극화되거나 뒤죽박죽 돼버린 전도된 현실에서 국민은 투표일을 기다리며 미래에 희망을 걸고 있다.
미중 힘의 역학과 한중일의 지정학적 균열, 글로벌 경제 패러다임 위기, 불황의 저성장… 이런 구조적 전환기에 국가지도자를 뽑아야 하는 선거일이 불과 9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도 선거판은 어처구니없이 반쪽이다. 올해 대선이 있는 미국은 선거일이 우리보다 1달 앞서기는 하지만 이미 5월에 구도가 확정됐다. 밋 롬니는 공화당 후보로 확정되기까지 반년을 당내 다른 후보들과 격전을 벌여야 했다.
민주주의에서 대선 레이스는 국가와 국민이 미래를 향한 컨센서스를 이뤄내는 금쪽 같은 기회다. 국가미래 좌표와 궤도가 정해지고 국민 개개인과 기업이 그에 맞춰 새롭게 마음가짐을 하게 된다. 국민은 비단 투표로써가 아니라 대선 레이스 과정을 통해 최종 결과에 대한 승복을 예비하게 되며 그 결과 다시 한번 국민통합이 이뤄지게 된다. 그것이 대선 레이스가 국가에 주는 진정한 선물이다.
후보검증, 정책대결 같은 것도 결국 그런 큰 선물을 만들어가는 수렴 과정이다. 후보ㆍ국민ㆍ공약정책 모두를 담금질하는 기간이 선거 레이스이다. 또한 국민과 후보가 서로 이리저리 재보며 궁합과 호흡을 맞춰보는 소중한 시간이다. 후보 자신에게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한 무서리 내리는 간밤이기도 하다. 이런 숙성과정은 무조건 후보 자신과 국가에게 이롭다.
지금과 같은 허깨비 선거 레이스는 국가의 불행이다. 진성 프로그램들로 달아올랐어야 할 선거 레이스가 한 사람의 출마 여부를 점치기에 바쁜 추리극으로 변질하면서 나라의 시간을 탕진하고 있다.
5년 단임 정권은 시간이 없다. 충분히 검증되고 사회 각 이해집단과 샅바를 잡아본 준비된 인물이 취임일부터 전력 속도전을 내도 뜻을 이루기에 모자랄 시간이다. 우리 국민이 지혜롭지만 초(秒)치기 선거 레이스에서는 차선의 리더도 고르기 어렵다. 뜸이 잘 들어야 찰진 밥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