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가을과 시인과 당신


여름이 지난 후 '9월이 오면' '9월의 기도'와 같은 시를 읽은 게 어제 같은데 어느덧 10월 중순이다. 우리도 바쁘게 살지만 세월 역시 참 성실하게 가고 있다. 하늘은 사정없이 높고 태양에서는 '쨍'하고 소리가 나는 맑은 날이 싱그럽기만 하다. 서울 세종로를 지나다가 광화문에 있는 대형 건물의 글판이 바뀐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안도현 시인의 '가을 엽서'의 마지막 구절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이 새로 적혀 있었다. 가을 낙엽처럼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누어주고 싶습니다'를 실천하며 살아왔는지 반성해본다.


시가 우리 곁에 돌아오고 있다. 오래전 시집 한 권이 백만부 넘게 팔리곤 했던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힐링' 바람에 힘입어 다시 시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류시화 시인이 올해 15년 만에 내놓은 세 번째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은 출간되자마자 한 대형서점 종합 베스트셀러 10위권에 단숨에 진입하기도 했다. 세월은 흘렀지만 영혼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시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누구나 좋아하는 시 한 편은 가슴 한 켠에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삶이 각박해지고 메말라가는 것은 그 감성을 나이가 들면서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장년의 나이지만 문학소년과 문학청년 그대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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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은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사망 1주기였다. 잡스는 어렸을 때부터 명상과 독서를 통해 인문학적 감수성을 키워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생각이 막히거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18세기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집을 펼치고 그 속에서 통찰과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모든 경계를 허무는 융합적 사고로 애플 신화를 이룬 그가 '(전략)눈물이 메말라/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꽃 철책이 시들고/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사라지리라'는 함민복 시인의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는 시를 알았다면 분명히 무릎을 치며 공감했을 것이다.

프랑스의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한 권의 책은 독자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수많은 책을 (재)생산한다'고 했다. 이 말을 시에 적용하면 한 편의 시를 읽고도 우리 모두는 각각 서로 다른 시인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함민복 시인의 또 다른 '가을'이란 시가 있다. '당신 생각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라는 단 16자의 강렬한 시다. 이 가을에 독자 여러분을 시인으로 만들어줄 당신은 누구일까. 우리는 또 누구의 당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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