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위안저(李遠哲)는 지난 1986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1965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로런스 국립연구소, 시카고대 등을 거쳐 1974년 미국 국적까지 취득한 그의 노벨상은 오롯이 미국에서 얻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노벨상 수상자에게 보장된 안정적인 노후와 영광을 버리고 자신이 태어난 대만 국적을 회복해 귀국했다. 중국의 급성장으로 한국과 서구 국가들이 대만과의 국교를 단절하는 등 어려움을 겪게 된 고국을 위해 뭐든 하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는 대만중앙연구원 설립을 주도하고 대만 과학계의 부흥을 이끌었다. 그 결과 과학의 중요성이 주목받으면서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그를 '대만의 양심'이라고 부르며 존경한다. 리위안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아시안 사이언스 캠프' 등을 만들어 아시아 각국의 젊은 과학영재를 키우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다카기 데이지(高木貞治)는 20세기 초반 독일에서 유학했다. 당시 최고의 수학자들 사이에서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현대 수학의 아버지인 다비트 힐베르트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 그러나 유학을 마친 후 숱한 연구소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수학 후진국이었던 일본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 연구를 통해 수학의 한 축을 이루는 '유체론'을 완성했고 저술활동과 교육으로 현대 수학을 일본에 전파했다.
다카기가 유학을 떠날 때만 해도 수학을 가르치는 대학이 하나밖에 없었던 일본에서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 수상자를 3명이나 배출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후학들은 "다카기 같은 선구자 덕분"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반면 1960~1970년대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던 한인 과학자들 대부분은 그 나라에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일부는 "가난하고 못사는 조국에 봉사하겠다"며 유치과학자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연구 여건이나 대우는 외국보다 형편없지만 애국심으로 한국 경제 성장의 선봉에 섰다.
시대는 변했다. 과학은 물론 과학자에게도 국경은 사라지고 있다. 더 좋은 조건에 훌륭한 연구를 할 수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는 것이 상식인 시대다. 애국심만으로 우수 인재를 불러들이기는 힘들어졌다는 의미다.
최근 한국무역협회가 해외로 진학하거나 취직할 뜻이 있는 고급 과학기술 인력을 대상으로 설문을 진행한 결과 71.5%는 '국내로 복귀하겠다'고 답했다. 이를 두고 두뇌유출이 두뇌순환으로 바뀌는 신호탄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여전히 과학계 홀대 논란이 끊이지 않고 탁월한 성과를 낼 수 있는 인재들은 귀국보다 해외 유명대학에서 일하는 것을 선호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해외 한인 과학자를 유치하기 위한 각종 계획이 등장하지만 성과는 기대에 못 미친다. 중국이 '연어 프로젝트'를 통해 자국 과학자들을 돌아오도록 함으로써 과학계에서 영향력을 키워가는 것이 부러운 이유다.
'사람'이 미래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미래를 이끌어갈 한국의 리위안저·다카기가 망설임 없이 돌아오게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줄 수 있고 무엇을 해줘야만 하는지 고민해야 할 때다. 이런 고민은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