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상해는 춤추고 있다

◎중국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의 클럽은 붐비고 있고 중개업무는/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시민들은 등의 칭찬을 받을/돈벌이로 6일간의 추도기간을 보내고 있다.등소평은 결코 자신을 위한 기념물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상해의 번화가 후아이하이가 골든에이지 클럽이 기념물이 될 수 있다. 등이 외제 대리석 바닥과 아슬아슬한 옷차림의 러시아 댄서들을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클럽의 호사스럽고 퇴폐적인 모습은 그가 창조한 중국에 대한 성공적인 증언이 되고있다. 6일간의 공식추도기간 첫날인 그가 사망한 날 밤 클럽에서는 춤판이 벌이지고 있었다. 연미복차림의 흰색 장갑을 낀 웨이터들은 새 지폐를 꺼내는 손님들에게 하루밤 1천달러 밀실에서 2천3백달러 상당의 레미 마르텡 루이 18세 꼬냑을 접대하고 있다. 상해시 고층타워들에 에어컨디션 시스템을 공급하는 독일기업의 현지사무소 대표인 말숙한 차림의 30대인 주순은 『중국은 잘 돌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번쩍이는 고급안경을 쓰고 동료들과 합석한 그는 『등동지, 감사합니다』고 덧붙인다. 중국 자본주의 창시자의 사망에도 옛명성인 아시아의 금융중심지를 되찾은 상해는 거의 동요가 없었다. 그것은 등의 유산이 막대함을 말한다. 1976년 모택동 사망시에는 부자유스런 애도가 쏟아졌다. 미국신문 상해지사에 근무하는 26세의 사람은 『모가 사망했을때 울지않으면 비판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등의 사망소식은 쉽게 받아 들여졌다. 호화로운 힐튼호텔 인근 줄루가의 주민단체는 『등동지가 서거했다』며 칠판에 써 내걸었다. 두 구역 떨어진 곳에서는 노인 몇몇이 평소처럼 조그만 게시판에 붙여진 해방일보에서 뉴스를 읽고있었다. 한편 경제활동은 평소와 같았다. 명랑한 택시기사 루 바오민은 『큰 뉴스가 아니다』며 『노인이 사망했다. 어떻단 말인가』고 반문했다. 등의 사망에 대한 애도는 깊지않지만 그가 12억 중국민들에게 남긴 영향은 부인할 수 없다. 첸 레보는 자신의 직업 편력을 미소를 머금고 회상하고 있다. 가냘프고 말씨가 부드러운 지식인 첸(48)은 처음엔 물리학자로 교육받았다. 그러나 모사후 중국사회의 폐쇄적인 조직이 이완되면서 언론인이 됐다. 그는 당시 한계를 넘어 사회비리와 보다 의도적으로 북경의 크레믈린인 중남해의 내막을 폭로한 상해의 유명 주간지 「월드 이코노믹 헤럴드」의 경제부 기자였다. 그는 대담하게 활동한 댓가를 치뤘다. 1989년 천안문사건이후 등은 이 신문의 기자 수명을 체포토록 지시, 정치불만세력에 대해 비관용적인 자세를 취했다. 헤럴드는 폐간됐으며 첸은 6주이상 투옥됐다. 첸이 석방됐을때 그는 정치적으로 기피인물이었다. 모든 언론기관과 연구소는 그를 채용치않았다. 그래서 대다수 중국 지식인들처럼 그는 개인사업에서 도피처를 발견했다. 현재 그는 상해시에서 붐이 일고있는 부동산과 증권시장에 투자하는 소기업인 상해밍센사의 부사장이다. 첸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두드리며 『나같이 두뇌를 써먹고 싶은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사업에 뛰어드는 것이다』고 말한다. 그것은 악마에게 혼을 파는 파우스트의 거래와 비슷했다. 그는 정치를 피해 10배이상 더 출세한 것이다. 그의 집에는 최근 구입한 비디오CD플레이어 등 최신 제품들이 가득하다. 그는 가족들과 휴일을 즐길 여유도 있다. 그는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부유의 교환을 큰 아픔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첸은『등의 시대에 인민의 운명은 더 이상 정치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며 『대단한 업적이다』고 말한다. 등의 시대가 물론 승자만을 만든 것은 아니다. 1978년 등의 개혁이 시작된 이래 1인당 국민소득은 1천1백% 뛰었지만 빈부격차는 심화됐다. 모의 시대는 가난했지만 똑같이 못살았던 것이다. 현재 소득격차는 엄청나고 못가진 자들의 소요위기까지 나돌고 있다. 이 지역 저 지역을 떠돌아다니는 실업자 인구가 1억명에 달한다. 상해 거리에는 이같이 직장을 찾아 움직이는 유랑인구가 2백50만명으로 추산된다. 상해의 넓은 기차역에 중국 한지 출신의 헐벗은 사람들이 지난해 13% 성장한 상해가 풍요의 땅이 되리라는 기대를 갖고 무리지어 속속 도착한다. 손이 농부답게 투박한 데다 좀 칠칠치 못한 23세의 란 이강은 가장 가난한 성중 하나인 안휘성 출신으로 상오에 상해에 도착했다. 그는 하루종일 건축일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허탕을 치고 역앞에서 가지고 온 옷가방을 베고 「대」자로 누웠다. 그는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생각하는 가격인 2.5달러를 주고 여관방에 들어갈지 아니면 기차를 타고 일자리를 찾아 다른 지방으로 떠날지를 고민중이다. 상해에 온 것을 환영하기라도 하듯 휘황찬란한 네온사인(펩시, 미놀타, 산요)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다. 그는 상해의 급증하는 부에 대해 생각해 본다. 『도대체 여기 사람들은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몸에 먼지가 배어있는 몇몇 동료들이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가진 자들은 상해를 지배하고 있다. 등을 기념하는 또다른 비공식적인 상징물인 상해 주식시장은 등사후 폭락할 것으로 예상됐었다. 등 사망후 수시간 중국의 두개 주식시장(또 하나는 심천 주식시장)중 하나인 상해 주식시장은 정말 흥분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것은 혼란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상해 포동개발은행 증권부의 딜링룸이 20일 상오 9시30분 열리자 수백명의 투자자들이 몰려들었다. 은퇴한 학교교사인 장 유는 미소를 지은채 머리위의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다. 개장초 10% 내려갔지만 다시 활황세로 돌아섰다. 상오에 장은 25.8 위안을 기록하고 있던 시추안 창 홍 일렉트릭사 주식 1천주를 샀다. 주가는 상승해 30.4 위안을 나타내고 있다. 조금 더 오르면 그녀는 매각해 이익을 챙길 것이다. 정치에 관해 장은 『등의 정책이 앞으로 적어도 50년간 유효하다고 본다』고 말한다. 몇 구역 떨어진 조용한 거리 구석에서 장 젠화는 등의 매력이 아직까지 유효한지 시험해 보고 있다. 자그마한 점포에서 수백권의 책을 팔고 있는 66세의 서적 판매업자는 등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불티나게 팔릴 것으로 생각되는 책들(등의 외교, 등의 전략, 전 영국대사 리차드 에반스가 쓴 등전기를 중국어로 번역한 책)을 구하기 위해 한 도매상으로 달려갔다. 장은 그런 책들을 내다 팔겠다는 계약서를 황급히 써 보지만 거의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장도 그런 책들을 읽어보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나는 사업가다.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그의 베스트 셀러는 미국인 초자본가 워렌 버펫 전기의 번역본이다. 등소평에 대한 또 하나의 조용한 예물이다.<지사보도 애디 이그나티우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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