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Culture&Life] '아가씨 6번' 단역서 뮤지컬 대모로 올라선 최정원

26년 몸 맞댄 무대는 나에게 물같은 존재 하루도 거를순 없죠


뮤지컬 시카고의 벨마 켈리.

뮤지컬 고스트의 오다메 브라운.


뮤지컬과 첫 인연은
고교3학년때 놀이공원 예술단 입단
노래하고 연기 배우다 남경주 만나
10년간 함께 모든 작품서 호흡 맞춰
뮤지컬계 김혜자·최불암으로 통하죠

무대 위 변신의 귀재
당당한 '도나'·코믹스러운 '오다메'서
섹시한 '벨마'로 끊임없는 탈바꿈
30개 작품서 30명의 다른 삶 살아
악역도 도전 '또 다른 나' 보여 주고파



"가자 아들레이드!"

2시간이 넘는 공연 중 주어진 대사는 단 한마디. 화려한 조명도, 관객의 박수도 없었다. 배역 이름조차 없는 '아가씨 6번'이었지만 마음만은 주인공이었다. 짧은 한마디를 위해 수천번 말투와 표정·감정을 바꿔가며 연구했다는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의 아가씨 6번. 무대가 너무 좋아 다른 배우의 대사까지 모두 외웠다던 열정 넘치는 이 배우는 이후 대한민국 뮤지컬을 대표하는 최고의 브랜드로 자리매김한다. 대한민국 뮤지컬의 대모, 최고의 디바…지난 26년간 수많은 수식어를 만들어온 배우 최정원을 서울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의 뮤지컬 고스트 공연현장에서 만났다.

"비슷한 모습으로만 사는 건 재미없잖아요." 당당한 도나(맘마미아), 섹시한 벨마(시카고) 등 도도한 여성 캐릭터를 주로 맡아온 최정원에게 지난 7개월은 그야말로 도전의 시간이었다. 펑퍼짐한 몸매와 우스꽝스러운, 때로는 상스러운 말투까지. 영화 '사랑과 영혼'을 원작으로 한 고스트에서 그는 심령술사 오다메 브라운 역을 맡아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캐릭터로 변신했다. 스스로 "변신의 귀재가 되고 싶다"는 최정원은 28일 고스트 마지막 공연을 앞둔 소감을 묻자 "내 자신도 몰랐던 내 안의 캐릭터를 발견했다는 게 가장 큰 수확"이라며 "'최정원의 다른 모습을 봤다'는 관객들의 평가에 에너지를 얻었다"고 말했다.

고스트는 톱스타 최정원의 조연 참여로 화제를 모았다. 뮤지컬시장의 캐스팅 1순위인 그는 오다메 역을 위해 오디션에 참여할 정도로 배역에 열의를 보였다. "저는 작품을 볼 때 주연이냐 조연이냐를 떠나 제가 얼마나 빠져들 수 있을지, 이를 통해 저와 작품에 발전이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요. 작품이 좋으면 앙상블로도 뛸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예요. 그런 면에서 고스트는 제 스스로 정말 하고 싶었던 작품이에요." 감명 깊게 봤던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데다 평소 코믹한 캐릭터에 대한 욕심도 있던 그에게 '오다메 브라운'은 조연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신인처럼 오디션 준비에 매진했고 오디션 현장에서는 작품의 넘버(노래)와 대사를 모두 외워 외국 오리지널 공연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극 중 오다메는 귀신을 본다고 사기를 치지만 정작 귀신의 목소리가 들릴 때 엄청 무서워해요. 본인은 정말 무섭고 심각한데 관객은 그 모습이 웃긴 상황인 거죠. 정말이지 오다메는 귀엽고 매력적인 캐릭터라니까요."

배역에 대한 애정과 26년의 관록이 어우러지며 조연 오다메는 작품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수시로 아이디어를 내며 캐릭터의 완성도에 욕심을 냈다. "남자 주인공 '샘'의 사진을 보고 오다메가 '뭐야 백인이네! 백인치곤 귀엽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인종 유머가 잘 먹히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내 스타일 아니네'라고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는데 깐깐한 오리지널 스태프도 흔쾌히 받아들여주더군요." 공연마다 터지는 그의 아이디어와 애드리브는 관객의 배꼽을 강탈했다. 샘 역할의 주원과 그의 전 작품을 겨냥해 '의사같이 생겼네'라는 농을 던지거나 단체관람을 온 한 커피회사 직원들을 위해 '난 브루클린엔 절대 안와. 카페XX가 없거든'이라는 즉석 멘트를 만들어낸 것. 공연 중 최정원의 애드리브에 상대배우가 웃음을 참느라 대사를 못하는 사고(?)가 터지기도 했다. "아 나 귀신 들렸나봐" 같은 즉석 멘트로 다른 배우와 관객이 정신을 수습(?)할 시간을 만들어주는 것도 베테랑 최정원의 몫이었다.

'관록'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26년이라는 경력. 그는 한국 뮤지컬시장이 불모지에서 옥토가 되는 과정을 함께 걸어온 산증인이다. 고등학교 3학년, 한 놀이공원의 예술단 1기로 입단한 게 뮤지컬과의 인연을 만들어줬다. 어린 시절 남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는 게 낙이었던 최정원은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예술단에 들어가 브로드웨이 뮤지컬 전문가들로부터 발레와 탭댄스·보컬·연기 교습을 받았다. 최정원과 함께 1세대 뮤지컬 배우로 불리는 남경주도 이때 만났다. "그때가 1988년이에요. '뮤지컬이 뭐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그거 내가 만든 거야'라고 해도 믿을 만큼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대중화되지 않은 때였죠." 미래에 대한 걱정 따위는 없었다. 그 시절 뮤지컬은 소녀 최정원에게 인생의 전부였다. 그거면 됐다. "언니·오빠들이 연습을 끝내고 집에 갈 때까지 기다리다가 저 혼자 연습을 했어요. 이 모습이 기특했는지 당시 대학생이던 남경주씨가 학교에서 배운 연기 관련 노트 필기를 다 건네줬어요. 이게 인연이 돼 이후 10년을 한 작품도 빠지지 않고 둘이 같은 무대에 섰어요. 뮤지컬계의 김혜자·최불암이라고 불릴 정도로 콤비가 됐죠(웃음)."

1989년 데뷔작 '아가씨와 건달들'의 '아가씨 6번' 이후 무대에 대한 애정은 더욱 커졌다. 다른 인물을 연기할 때면 늘 '그분'이 오셔서 미친 듯이 타인의 삶을 살았다. 무대 아래 있을 때도 주인공들의 대사와 연기·노래·안무를 모두 외워 연습했다. 그러던 1990년의 어느 날 기회가 왔다. "가스펠이라는 공연이었어요. 저는 배역을 받지 못했지만 '10년 뒤에 저 무대의 주연으로 서겠다'는 다짐을 하고 캐릭터를 분석했어요. 당시 여자 주인공 배역 5개 중 하나를 연습하고 있었는데 공연 직전 그 배역에 문제가 생겨 오디션 공고가 새로 난 거죠." 준비된 자는 운명처럼 다가온 기회를 강하게 손에 쥐었다. 배역을 위해 아껴 기른 긴 생머리를 스포츠머리로 잘라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 스무살, 열정으로 똘똘 뭉친 소녀는 '아가씨 6번'에서 '배우 최정원'으로 거듭나는 시동을 걸고 있었다.

모든 배역을 맡으면 '최고의 캐릭터'라는 극찬을 받아온 그다. 고스트를 포함해 30개 작품에서 30명의 인생을 살며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온 26년. 그런 그에게 여전히 욕심 나는 배역이 있을까.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냐'는 질문에 최정원은 마치 큰 장난감 가게를 둘러보는 어린아이마냥 두 손을 모으고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레미제라블의 테나르디에 부인처럼 이유 있는 악역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그동안 제가 연기했던 것과는 다른 '또 다른 최정원'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인터뷰를 마친 뒤 공연에 나선 그는 자유롭게 무대를 헤엄치고 다녔다.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배우 최정원이 20년 넘게 몸을 맞대온 무대. 그 터전은 최정원에게 존재만으로도 에너지를 전해주는 것만 같았다. "제 몸의 70%가 물이잖아요. 하루도 걸러서는 안되고. 무대가 저한테 그래요. 없으면 안되는 존재."





고스트서 7개월간 관객 웃겼지만 이번엔 농염한 연기로 관객 유혹할래요

14년간 출연한 '시카고' 8월 개막

2007년 이어 주인공 벨마 다시 맡아


7개월간 관객을 웃긴 오다메 브라운은 곧 관능미 넘치는 벨마 켈리로의 변신을 앞두고 있다. 오는 8월 개막하는 뮤지컬 '시카고'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관객을 만날 준비에 들어간 것. '시카고'는 1920년대 미국 시카고 쿡카운티의 한 여자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다. 남편과 여동생을 죽인 죄로 유명세를 타는 배우 벨마 켈리, 정부를 살해한 뒤 교도소에 들어와 벨마의 인기를 빼앗아가는 코러스걸 록시 하트, 그리고 두 여인을 이용해 명성과 돈을 손에 쥐려는 변호사 빌리 플린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검은 망사 스타킹에 시스루 의상을 입은 8등신 여배우들과 식스팩 복근을 자랑하는 남자배우들의 춤사위는 재즈 선율과 어우러져 매혹적인 무대를 연출한다.

'시카고'는 최정원씨에게 의미가 남다른 작품이다. 최씨는 이 작품의 2000년 초연부터 올해까지 10번의 시즌에 단 한번도 빠짐없이 출연했다. 초연 당시에는 록시 하트 역을 맡아 그해 한국뮤지컬대상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2007년에는 또 다른 주인공 벨마 켈리로 한층 더 농염한 연기를 선보였다. 최씨는 시카고에서 록시 하트와 벨마 켈리를 모두 연기한 유일한 여배우이기도 하다.

"뮤지컬 인생이 26년인데 그 중 절반을 '시카고'와 함께 했네요(웃음). 제가 경력에 비해 작품 수가 많지 않은데 한 작품을 하면 오래 하는데다 다른 작품을 동시에 하지 않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벨마 켈리로 '대체 불가능'의 연기를 펼쳐온 그이지만 록시 연기에 다시 도전해보고 싶은 바람도 있다. 그는 "록시 연기로 여우주연상도 받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부족했던 게 많았다"며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아본 지금은 예전보다 더 얄궂은 록시를 소화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웃어 보였다. 초연 후 14년간 최정원이 '의리'와 '애정'을 담아온 '시카고'는 8월2일부터 9월28일까지 서울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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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 is…

△1969년 서울 △1988년 서울 영파여고 졸업 △1989년 아가씨와 건달들 데뷔

●주요 작품

<뮤지컬>

고스트, 맘마미아, 시카고, 안녕 프란체스카, 지킬앤하이드, 갬블러, 키스미, 케이트렌트, 브로드웨이 42번가, 사랑은 비를 타고, 그리스 외 다수

<연극>

딸에게 보내는 편지, 버자이너 모놀로그, 피아프 외 다수

<수상>

1995년 한국뮤지컬대상 신인연기상

1996년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조연상

1997년 한국뮤지컬대상 인기스타상

2001년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주연상

2002년 한국뮤지컬대상 인기스타상

2006년 대구뮤지컬대상 인기스타상

2009년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뮤지컬부문 최우수상

2010년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주연상,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올해의 스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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