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정기여형(DC형·근로자가 직접 퇴직금을 운영하는 제도) 퇴직연금 수익률이 기대치를 밑돌면서 제대로 기능을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DC형 가입자들이 저금리 상황에서 원리금 보장상품에 치우치는데다 회사가 선정하는 금융회사의 상품에 의존하는 등 운용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DC형 퇴직연금의 수익률 제고를 위해서는 원리금 보장상품 투자 비중을 줄이고 가입자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아울러 디폴트옵션이나 기금형 퇴직연금제도 도입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25일 금융투자협회와 한국투자증권 은퇴설계연구소가 퇴직연금제도 가입자 898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4월부터 올해 5월까지 약 13개월간 설문조사를 한 결과에 따르면 DC형 가입 근로자의 퇴직연금 연 기대 수익률이 5.23%인 데 반해 실질 수익률은 3.5%에 그쳤다.
수익률이 부진한 것은 원리금 보장상품 투자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DC형 가입자 중 원금보장형 투자 비중은 79%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 2.5~3.5% 수준의 정기예금 위주로 투자하다 보니 실질 수익률이 3%에 그치는 것이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퇴직할 때 사실상 원금만 겨우 건질 수도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DC형 가입자의 수동적인 자세도 수익률 부진의 이유다. DC형은 근로자가 직접 퇴직금을 운용하기 때문에 근로자 본인이 금융지식을 기반으로 발품을 팔아 좋은 포트폴리오를 제시하는 금융회사를 선정해야 한다. 하지만 조사결과 회사가 대신 금융회사를 선정해주는 비율이 33.5%에 달했다. 수익률보다는 금융회사의 안정성을 보고 선택한다는 비율이 25.3%, 대출 등 기존 거래관계를 고려해 선택한다는 비율도 13%였다. 사업자의 운용능력을 보고 선정한다는 비율은 9.7%에 불과했다. 또 자신이 금융지식이 없다고 답한 비율은 88.3%에 이르렀다. 금융지식 부족→원리금 보장상품에만 치중→수익률 부진의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DC형 가입자들이 실적배당형 상품 중심으로 능동적으로 퇴직금을 굴릴 수 있도록 기업이나 금융회사들이 금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성인모 금융투자협회 연금지원실장은 "현재 DC형은 원리금 보장 투자 비율이 높고 가입자의 운영관여도가 낮아 본연의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며 "DC형 가입자들이 퇴직연금 상품을 잘 선택할 수 있도록 기업이 지속적으로 교육을 해야 하고 효율적인 정보 전달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익률 제고를 위해 금융 당국의 정책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디폴트옵션 제도가 대표적이다. 디폴트옵션은 가입자의 운용 지시가 없으면 각 금융사가 자체 투자전략에 따라 퇴직연금 자산을 운용해주는 제도다. 미국·호주에서는 대부분 디폴트 방식으로 운용된다. 기금형 퇴직연금제도 도입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연금가입자와 금융회사 사이에 독립된 수탁기관을 설치하고 수탁기관 책임하에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제도다. 우리나라는 현재 연금가입자와 금융회사가 계약을 맺고 금융회사가 전반 업무를 책임지는 계약형 구조다. 기존 계약형 구조에서는 가입자의 금융지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금융회사가 운용과 자산관리를 도맡아 권한과 역할이 집중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기금형을 도입해 수탁기관에 운용을 위탁하면 책임이 분명해지고 근로자의 선택권도 다양해진다는 분석이다.
DB형은 기업이 퇴직금을 운용하기 때문에 가입자들이 수익률을 고민할 필요가 없지만 기업들도 원리금 보장상품에 치중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근로자가 퇴직할 때 회사가 지불해야 하는 퇴직금은 최종 3개월 평균임금에다 근속연수를 곱한 값이고 임금 상승률이 높아질수록 퇴직금은 더 늘어나는데 현재의 저금리 상황에서 원리금 보장상품만 고집할 경우 나중에 퇴직금이 기업에 상당한 재무 압박으로 다가올 수 있다. 현재 DB형의 97%가 원리금 보장상품에 투자한다.
성 실장은 "기업이 지금처럼 원리금 보장상품만 고집할 경우 나중에 퇴직급여부채가 증가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껴야 한다"며 "합리적 자산운용을 위해 회사 내에 전문가가 포함된 투자위원회를 구성하고 퇴직금 포트폴리오를 짜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