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토요산책] 그림을 그린다는 것

얼마 전 새 작업실을 구했다. 이 작업실(둥지)은 지난 2000년 우리나라에 돌아온 후 벌써 6번째다. 생각보다 덜 눅눅한 지하 작업실은 여전히 날 설레게 한다. 누구든 자신만의 공간 확보가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이지만 작가(화가)에게 작업실이란 그야말로 일터이자 창작의 발원지이며 선술집처럼 푸근한 곳이다. 한 달이 다 되어서야 얼추 작업실이 정리됐다. 그러던 중 우연히 먼지 쌓인 작업일지를 뒤척이게 됐다. 길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지난 8년여의 유학 중에 기록했던 작업일지들은 지난 시간들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가장 젊었을 때, 오직 그림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그 노트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시절 프랑스 동북부에 위치한 샹파뉴 지방의 행스라는 작고 예쁜 도시에 살고 있었고 지난 작업일지 속 어떤 날의 하루가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서너 시간도 채 못 잤구나. 오전10시를 가리키는 딱 손목시계만한 벽시계를 바라본 후 ‘약’이라고 번쩍이던 전기장판을 껐다. 엊그제 무쳤던 무말랭이와 그래도 수분이 남아 있는 식은 밥 한 덩어리를 물에 말아 입에 밀어 넣는다. 어제 저녁부터 따뜻했던 커피 한 잔 들고 뚜벅뚜벅 작업실로 향한다. 밤새 뚫어져라 비벼대며 긁었던 캔버스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다는 생각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중략)…그린다는 것은 행복한 일임에 분명하다. 그래, 작업은 많은 것을 잊게 해준다. 집세도, 전기세도, 배고픔도, 고향도, 망상도. 세상의 비명소리마저도 그렇게 잊게 해준다. 무엇보다 침묵할 수 있어 행복하다. 그러나 때로는 작업이란 모진 형벌과도 같아 숱한 색의 사연들을 모조리, 싸늘하게 거부하기도 한다. 작업 안에서 요구되는 타당성과 보편성ㆍ독창성이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작업을 하는 데 있어 자기변혁의 실험이 요구된다는 것은 기쁨이자 고통이다. 작업, 그것은 나의 ‘애증’인 것이다. 어느 새 어두움이 내려앉았다. 또 다른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어제 같은 아침이 다가선다. 피곤하다. 그리고 덥다.’ 이렇게 적혀 있던 10년 전 어느 날의 이야기를 보며 겁도 시샘도 없이 작업에 열중했던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아직도 그때나 지금이나 식지 않은 열정과 젊음은 그대로인 듯한데 나 자신은 현실 앞에 움츠러들지 않았던가. 언제나 시간은 내편이라 믿고 자만하던 어리석음을 새삼 돌아보는 계기가 된 듯싶다. 희망에 사는 사람은 추억에 사는 사람만큼 괴로워하지 않듯 아마도 작가들은 맑은 수채화처럼, 때로는 덧칠하는 유화처럼, 때로는 깎아내는 조각처럼 희망에 사는 삶에 무게를 두고 있을 테다. 그렇게 한 땀 한 땀 세월을 이겨오며 작업해온 선배 작가들을 마냥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던가. 힘을 내야겠다. 몇 날 며칠을 하루처럼 살아왔던 시간들이 있었지 않았던가. 비록 작업실을 찾아 전전긍긍해도 지난 시절의 추억들이 그리워도, 미술시장이 들썩이며 옥션이 어쩌고 저쩌고 해도, 말 없는 전업작가들은 알고 있다. 그래도 그려야 한다는 사실을. 작업은 ‘애증’이라는 것을. 예술은 삶과 시대를 해석해내는 가치 있는 지렛대로 부조리한 역사와 세계를 올바르게 유도하는 데 크나큰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예술가들의 절치부심한 성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이 예술가의 전유물이 돼서는 안 될 것이다. 작가와 대중이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다가설 때 비로소 참다운 순수미술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좋은 작품을 위해 수많은 시간을 탐구하는 예술혼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의 한가운데 나도 서 있음을 확인한다. 곧 장마가 시작된다고 하는데 걱정이다. 지하 작업실에 물이 들지 말아야 할 텐데. 뽀송뽀송하게 필히 작업실을 지켜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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