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tSectionName();
[리빙 앤 조이] 영원한 라이벌… 전설의 스포츠 韓-日전
"다 져도 너에겐 못진다"'휴전'없는 스포츠 전쟁
서은영
기자 supia927@sed.co.kr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누군가는 말했다. 한ㆍ일 대항 스포츠 경기는 연날리기만 해도 재미있다고.
여느 경기와 달리 한국과 일본이 맞붙으면 양국은 응원 열기 이상의 흥분에 빠져들곤 한다. 스포츠 사회학자들은 "한국인들은 스포츠 경기를 통해 과거 35년 식민 역사를 앙갚음할 수 있다는 생각에 경기 결과에 집착하게 됐다"고 분석한다.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가진 영국과 아일랜드 역시 스포츠 경기에서 만나면 전 국민이 격앙된 응원전을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해방 직후부터 한일전에 임하는 한국 선수들은 '항일 정신'으로 중무장했다. 종목을 불문하고 훈련시설이나 실력 등 모든 게 열세였지만 선수들은 '승리가 아니면 죽음뿐'이라는 각오로 경기에 임했고 기적 같은 승리를 일궈낸 경우가 많았다.
3월 한달동안 2009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과 일본은 다섯 차례나 맞붙었으나 치열한 접전 끝에 승리의 트로피를 일본에 넘겨줘야 했다. 지난달 28일과 29일에는 2009 피겨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김연아(19)와 아사다 마오(19)가 '은반 위의 전쟁'으로 2차 한ㆍ일전을 재개, 김연아가 마오를 20여점의 점수차이로 가뿐히 제치고 1위를 거머쥐면서 설욕했다. 양국 스포츠 팬들은 숙적 한ㆍ일간 '3월 전쟁'의 열기 속에서 긴장과 아쉬움과 감동의 순간을 보냈다. 한ㆍ일 스포츠 대결의 전설적인 역사를 다시 한번 되짚어본다.
1954년 월드컵예선 최초 한일전 V$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김재박 개구리번트' '한대화 스리런' 등 명승부 연출
■ 최초의 한일전에서 승리= 역사의 첫 장은 축구가 썼다. 54년 스위스월드컵 예선전은 '일본의 심장부에서 울린 첫 승리'로 일컬어지는 해방후 최초의 한일전이다. 한국 전쟁의 참화가 가시지 않은 한국은 한 장의 월드컵 티켓을 놓고 일본과 대결하게 됐다. 그러나 당시 반일감정이 아직 거센데다 양국간 국교가 수립돼 있지 않아 홈앤드어웨이(home and away) 방식의 경기를 치르는 것이 불가능했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도 국민 감정을 고려해 양국 선수들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을 꺾고 돌아오겠다는 선수단의 투지에 승복해 결국 '반드시 승리하고 돌아와야 한다'는 조건부 승인이 떨어졌고 선수단은 '일본을 꺾지 못할 경우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각서까지 썼다.
54년 3월7일 도쿄 메이지 진구구장에서 열린 1차전에서 한국 대표팀은 전반 10분 나가누마 전 일본축구협회 회장에게 선제골을 허용했으나 정남식 2골, 최정민 2골, 최광석 1골 등을 넣어 5대1로 대역전승을 거뒀다.
두번째 승리는 63년 9월25일 서울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 해방 후 처음으로 일본과 맞붙게 된 한국 야구팀은 "일본을 이기기 위해 훈련했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할 정도로 투지에 불타 있었다. 경기장 곳곳에 '일본타도'라고 적힌 팻말이 내걸렸다. 이날 경기에서도 행운의 여신은 한국에게 미소지었다.
■ 스포츠팬들이 꼽는 세기의 대결= 82년 서울 잠실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은 스포츠 팬들 사이에 '세기의 명승부'로 꼽힌다. 특히 일본 교과서 왜곡 파문으로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해 있던 터라 미묘한 시기에 벌어진 경기였다.
이날 7회까지 부진했던 한국팀은 8회말 김재박이 투수 니시무라를 상대로 개구리 번트(스퀴즈 번트)를 성공시키면서 2-2 동점을 만들고 이어서 등판한 한대화가 3점 홈런을 성공하면서 5-2 역전극을 연출해냈다.
야구 한일전에서 8회가 한국팀에게 기적의 8회로 불리게 된 것도 이 대회부터다. 7회까지 부진하다가도 8회가 되면 기적을 만들어내는 한국팀의 마법이 시작된 것이다. '야구는 9회부터'라는 말이 있지만 '한일전 야구는 8회부터'라고 해도 될법한 역사가 만들어진 순간이다.
97년 9월28일 일본의 심장부에서 승전보를 울린 98 프랑스 월드컵 최종예선전, 이른바 '도쿄대첩'은 축구 팬들에게 잊을수 없는 명승부다. 당시 골키퍼 김병지가 골문을 비운 사이 야마구치가 골을 넣으면서 1-0으로 끌려가다가 후반 38분 서정원의 헤딩슛과 41분 이민성의 중거리 왼발슛이 잇달아 성공하면서 드라마 같은 대역전승을 펼쳤다. 도쿄대첩 승리 이후 차범근과 한국대표팀은 국민 영웅이 된 반면 당시 일본 대표팀 감독이던 가모 슈 감독은 임기를 남긴채 퇴진했다.
'8회의 기적'은 2006년 WBC 아시아 예선전에서도 연출됐다. 도쿄돔에서 열린 1라운드에서 1-2로 뒤지던 8회초 이승엽의 2점 홈런으로 극적인 3-2 역전 드라마를 만들었다. 미국 에인절스타디움에서 열린 2라운드 역시 0-0으로 팽팽하던 8회초 이종범이 후지카와 규지를 상대로 2타점 2루타를 날리면서 2-1 승리를 거뒀다.
한국에 명실상부한 올림픽 마라톤 첫 금메달을 안겨줬던 황영조 선수의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역시 한일전이었다. 당시 황 선수는 죽음의 언덕이라 불리는 오르막길에서 결승점을 3㎞ 앞두고 당대 최강으로 통하던 마라톤 왕국 일본의 모리시다 고이치 선수를 극적으로 따돌려 우승했다. 56년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목에 걸어야 했던 손기정 옹의 한을 푼 셈이다.
■ 한일전, 스포츠 마케팅의 핵으로= 매 경기마다 혈전을 치르는 한일전은 세계인의 조명을 받는 '흥행 카드'로 자리잡았다.
올림픽 때만 반짝 인기를 누렸던 핸드볼 역시 흥행 보증 수표로 불리는 한일전 프리미엄에 힘입어 예선전까지 관심을 집중시켰다. 재작년 베이징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여자 핸드볼 대표팀은 중동심판의 텃세에 시달리다 일본에 패했다. 편파판정이 인정돼 다시 치러진 경기에서 13점차 대승을 거뒀으나 또다시 경기 결과가 취소되면서 전국민이 격분했다. 결국 지난해 3월 프랑스에서 열린 국제핸드볼연맹 최종예선에서 격전 끝에 본선행 티켓을 따냈으나 전국민의 격앙된 감정은 핸드볼 응원 열기로 이어져 본선에서도 폭발적인 관심을 얻었다.
2006년 제1회 WBC는 세 차례의 한일전 덕분에 예상외 흑자를 냈다. 한일전을 제외한 36경기 평균 관중은 1만7,161명에 그친데 반해 세 차례 열린 한일전의 평균 관중은 4만889명이었다.
WBC가 '패자부활전' 형식의 더블 엘리미네이션 제도를 채택해 강팀간 경기가 늘어나면서 세계 1, 2위를 앞다투는 한국과 일본의 대전 횟수는 더욱 늘었다. 올해 열린 제2회 WBC에서 한일전은 최대 5경기로 늘어났다. '한일전이 지겹다'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한-일 클래식'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돌았지만 한국과 일본의 결승전에는 역대 WBC 한 경기당 최다 관중인 5만4,846명이 들었다.
야구에 빼앗긴 스포츠팬들의 관심을 되찾으려는 축구인들의 전략도 '한일전'이었다. 최근 대한축구협회는 91년 이후 명맥이 끊긴 한일정기전을 부활시켜 한국과 일본의 2010 남아공월드컵 본선 공동 진출이 결정되는 대로 오는 10월과 이듬해 두 번의 경기를 펼치기로 했다고 밝혔다.
골프 대회로선 유일하게 매년 12월 첫째주에 열리는 핀크스컵 한일여자국가대항전은 올해로 10회를 맞은 대형 행사임에도 흥행은 부진한 편이다. 이는 한, 일 양국이 박빙의 승부를 펼치는 야구, 축구, 피겨 스케이팅 등의 종목과 달리 한국 골프가 절대적인 우위여서 팬들의 관심을 끌기엔 역부족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현재 핀크스컵 한국팀 전적은 4승2무3패다.
■ 한일전의 말말말
"후지산이 무너진다"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펼쳐지는 한일전 경기에서는 선수들이나 감독, 해설자들의 말 한마디도 화제가 되곤 한다. 일본 야구선수 스즈키 이치로의 '30년 망언'부터 98 프랑스월드컵 예선 한일전에서 통쾌한 언변으로 일약 스타가 된 송재익 SBS 캐스터의 멘트까지 한일전 관련 화제의 말들을 살펴본다.
○…송재익 캐스터 "후지산이 무너집니다"=98 프랑스월드컵 중계를 맡은 송재익 SBS 캐스터가 '도쿄 대첩'으로 불렸던 아시아 예선 한일전에서 경기 종료 4분전 이민성이 중거리 왼발슛을 골로 연결시켜 2-1 역전승을 이끌어내자 감격에 겨워 던진 한 마디. 이 멘트로 그는 2006 독일월드컵 때까지 각 방송사의 러브콜을 받는등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치로 스즈키 일본 야구선수 "(한국 등 다른 나라들이) 30년 동안 일본을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해주겠다"=이치로 일본 야구선수가 2006년 제1회 WBC 한일전을 앞두고 발설한 '30년 망언'. 덕분에 이치로는 '입치료'라는 별명을 얻으며 한국 야구팬들의 '공적'이 됐고 2009 WBC 한일전에서 이치로를 3연속 땅볼로 처리한 봉중근은 '의사 봉중근'으로 불렸다.
○…허구연 MBC 야구 해설위원, "독도를 넘겼어요. 대마도까지 갔네요."=2008년 베이징올림픽 준결승전에서 일본과 맞닥뜨린 한국은 2-2 동점인 8회말 이승엽의 통쾌한 2점 홈런으로 역전했다. 허 위원은 "이승엽의 홈런이 독도를 넘어 대마도까지 갔다"며 흥분했고 여세를 몰아 한국은 6-2로 승리.
○…호시노 일본 야구대표팀 감독 "이승엽이 누구냐"=2008 베이징올림픽 당시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일본 대표팀의 호시노 감독이 한국 간판 타자인 이승엽에 대해 "그게 누구냐"며 우리팀을 조롱해 구설에 올랐다. 국민정서를 자극한 그의 발언에 이승엽은 역전 홈런 한방으로 갚아줬으며 결국 우리팀은 일본을 두 차례 연속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대호 "이치로가 등판하면 나도 매경기 마무리 투수로 나서겠다"=2009 WBC 중 이치로가 승부치기 투수로 나올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이대호가 "이치로가 등판한다면 나도 매경기 마무리투수로 나서겠다"고 받아쳐 화제. 하다 다쓰노리 일본대표팀 감독의 "승부치기로 가면 이치로를 마운드에 올릴 수도 있다"는 발언에 이대호가 "우스갯소리 아니냐"며 던진 반응.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불황에도 손님 줄 세우는 음식장사의 고수들
영원한 라이벌… 전설의 스포츠 韓-日전
감기 같은데 설사를 하네…
위험천만한 10대들의 성지식
銀輪천국'으로 초대합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기에는 '유사 MTB'가 적당
마을에 들어서자 머리가 맑아졌다
월출산 트레킹하고 갈낙탕으로 몸보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