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의 화자는 노란 숲 속에 있는 갈림길을 놓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결국 시인은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길을 택하고 그 선택이 자신의 삶을 바꾼 의미 깊은 순간이었음을 회상한다.
김한(사진) 전북은행장은 그런 의미에서 항상 가지 않은 길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서울대 공과대학을 나온 뒤 KAIST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그 길을 포기하고 멀리 미국까지 경영학을 공부하러 갔다. 연수 뒤 대신증권ㆍ메리츠증권 등 자본시장에서 커리어를 쌓았지만 이내 은행장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선택 마디마다 삶을 바꾼 순간들이었다. 한번쯤 편안함에 안주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에게는 인생 내내 '노란 숲(가지 않은 도전의 숲)'이 아른거렸던 것 같다.
김 행장의 다양한 경험은 금융산업의 큰 그림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증권ㆍ보험ㆍ은행을 다 경험해봤습니다. 모두 주식회사로 엮입니다. 하지만 자기자본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곳과 불특정 다수의 예금으로 경영하는 곳은 공공성 부문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주식회사라 할지라도 지주의 입장을 더 반영할 수 없는 것이죠. 이런 산업의 차이를 반드시 이해해야만 각 분야에서 좋은 최고경영자(CEO)가 되는 것 같습니다."
금융회사의 근무 경력만이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은 아니다. 서울대 기계공학과에서 학부를 마친 것도 은행 경영에 굉장한 도움이 되고 있다고 김 행장은 말한다. 순탄한 길을 걷지 않았지만 거쳐온 힘든 길이 알알이 새로운 삶의 자양분이 됐다는 얘기다.
"수신을 받는 은행은 어찌됐든 기업을 골라 대출을 내줘야 합니다. 은행은 기업을 평가할 때 오너와 기술력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여기서 공대 출신이 빛을 발합니다. 기업의 기술력과 공정 프로세스에 대해 한두 가지 물어볼 질문이 생긴다는 거죠. 제가 공대를 안 나왔다면 투자한 기업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달라졌을 겁니다."
사실 학부 선택은 아버지가 제안한 바가 크다. 김 행장의 아버지는 김상협 전 국무총리다.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젊었을 때나 이과 공부를 할 수 있지 나이 들면 하기 힘들다고. 그래서 들어갔는데 진짜 여긴 아니다 싶었어요. 이러다 정말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하겠다 싶어 졸업 뒤 군대를 갔다 유학을 갔어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참 잘한 생각이었어요. 경영이라는 건 일종의 실습입니다. 실습을 위해 기초적인 영역을 닦아나갔던 것이죠."
유학파이자 공과대학 출신 행장은 어떤 직원을 선호할지 궁금했다. 김 행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조직에 열정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김 행장은 증권사의 시절을 떠올리며 설명을 곁들였다.
"증권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재미 있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어요. 10억원 운용은 잘 하지만 100억원 운용은 못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딱 정반대의 사람도 있고요. 사람이라는 게 다 사이즈와 리스크 파라미터(risk parameter)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이 당장 일 처리가 서투르다고 끝까지 느리다고 할 수 없어요. 대신 열정이 있으면 끝에 가서 성공하게 됩니다. 제가 그런 경우를 많이 봤어요."
그러다 보니 채용 과정에서 학과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은행 업무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세일즈'이기에 특화된 전공이 있을 수 없다. 김 행장은 "은행에서 상품을 설계하는 등 특별한 기술을 요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나머지가 영업이에요. 그렇기에 좋은 은행원이 되기 위해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적극적인 게 중요하다"고 했다.
사람을 중요시 여기는 김 행장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금융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금융 산업이 여전히 사람에 대한 장기 투자에 소홀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국내 금융회사가 아직 외국의 금융회사를 인수할 수 있는 여력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큰 이유가 '맨파워'가 없다는 거예요. 사람을 키우는 것은 비용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뚝딱해서 나올 일이 아닙니다. 10~20년 장기투자를 하면서 한 사람이 조직에 계속 머무를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끊임없이 줘야 합니다."
전북은행 직원들은 이런 김 행장을 모시기 편한 상사로 생각한다. 시쳇말로 '쉬운'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격이 없는 사람이어서다. 쓸데없는 격식을 불편해하는 성격이기에 소소한 일로 부하들을 괴롭히지 않는다. 일례로 김 행장은 외국에 출장 갈 일이 있을 때 수행 비서를 대동하지 않는다. 비행기 타는 데 짐도 혼자 부친다. 직원들과 출장 갈 일이 있을 때면 스스로 통역사를 자처해 직원들에게 손수 알려주기도 한다.
"사실 짐 빼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건데요. 이민국 통과하는 것도 다른 직원들보다 제가 더 빠를 겁니다. 제가 하면 더 빨리 할 수 있는 일을 누군가 대신해주면 속도도 느려지고 하는 사람도 힘들어하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미국에 많이 왕래했던 제가 이민국을 더 빨리 통과해요."
화제를 돌려 사회공헌에 대한 철학을 물어봤다. 전북은행은 지난 몇 년간 순이익의 10%를 지역사회에 기부해왔다. 사진을 찍으면 보여주기 식 행사로 이뤄질 것 같아 언론 보도도 자제한 편이었다.
"봉사활동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게 있습니다. 사회공헌을 할 수 있도록 은행을 찾아주는 고객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다는 점이죠. 지역사회의 고객으로부터 얻는 은행의 이익은 당연히 환원돼야 하는 게 맞습니다."
은행장실에 비치된 대형 그림ㆍ인형 등 아기자기한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물어보니 렌트하거나 은행 직원의 재능을 빌려 꾸몄다고 했다. 자기에게 인색하고 남에게 관대한 은행의 스타일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운동이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김 행장은 젊은 시절의 암벽등반을 언급하며 마약처럼 중독성이 있었다고 답했다. "암벽등반은 보기보다 안전한 운동입니다. 끌어주는 프로가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죠. 하지만 사고가 날 때가 있습니다. 방심하기 좋은 쉬운 코스죠. 비즈니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사업이 궤도에 올라 안심할 때 비로소 큰 사고가 날 겁니다. 방심하지 않고 경영하기 위해 지금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지난 3년 동안 김 행장은 우리캐피탈 인수, 총자산 10조원 시대를 여는 등 전북은행이 그간 가지 못한 새로운 길을 개척해줬다. 그리고 지금은 지주회사 본격 출범을 눈앞에 두고 있다. 단순하게 외적 치장을 위해 금융지주사를 꿈꾸는 것은 아니다. 김 행장은 'JBbank 2.0' 전략을 한참 전부터 수립해놓았다. 전략에 맞춰 하나씩 그림을 완성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김 행장은 "전북의 핵심사업인 새만금사업 등 늘어나는 지역의 금융 수요 증가에 대응하고 '최고의 소매금융그룹'으로 거듭나려면 지주사로 전환해야 한다"면서 금융지주사의 출범 배경을 설명했다. 김 행장은 이어 "대형 금융지주사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서민금융에 특화된 금융지주회사를 만들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계속되는 그의 새로운 도전에 다시 한번 기대가 모아진다.
■ 김한 행장은 |
순익 10% 이상 반드시 지역사회 환원 ■ 김 행장 사회공헌 10%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