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인구 3% 화교가 상권 85% 장악/국영기업과 더불어 경제 쌍두마차 형성/정치 진출 봉쇄 불구 경제적 기회에 만족/정부도 “성장 견인차” 인정 각종 특혜 부여15세기 무렵, 동서양은 각각 바다를 향한 모험을 단행한다. 1487년 포르투갈 리스본항에서 출발한 바스코 다 가마의 함대는 아프리카대륙 남단에 도달했다. 이른바 희망봉 발견으로 세계사를 바꾼 대사건이었다. 이로써 「지리상의 발견」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됐고 희망봉을 돌아 동양을 「개척」하는 양선도 줄을 이었다. 이후 세계사는 유럽 주도의 역사로 전개된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1406년. 중국 함대가 이미 희망봉 근처까지 도달한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명나라 영락제 시절 환관 정화에 의한 남방경략이 그것이다. 정화는 일곱 차례의 남해 원정을 통해 연인원 15만여명의 중국인을 태우고 말라카해협을 거쳐 인도, 아라비아반도에 이어 아프리카 동쪽의 섬 마다가스카르까지 상륙해 중화의 족적을 남겼다. 서양 중심의 역사에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정화의 남방경략은 바로 대중화(Great China) 정책의 효시나 다름없다.
인도네시아 팔렘방. 수도인 자카르타에서 북서쪽으로 8백70㎞ 떨어져 비행기로 약 2시간이 소요된다. 역사서에는 여기에 정화제독의 흔적이 있다. 일곱차례의 원정중에 정화의 함대가 전투에 참여한 것은 불과 세차례.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팔렘방이다. 15세기 당시 인도네시아는 자바, 말라카, 아즈, 수마트라 등 4개 왕국으로 분리돼 있었다. 남송 말기에 중국의 남부지역서 유출된 중국인들은 자바왕국의 팔렘방 일대에 집단 거주지를 구축하고 해양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정화는 2개파로 나뉘어 상호반목하던 팔렘방지역에 병력을 상륙시켜 해적질을 일삼던 중국출신 해적세력 진조의 일당 5천여명을 몰아낸 후 중국을 심었다. 시진경이라는 토착 중국인이 구항선위사란 작위에 책봉되고 중국인 부락이 건설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팔렘방을 기억하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인도네시아 화교들도 마찬가지. 당시 팔렘방에 거주했던 중국인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화교도 없다. 잊혀진 역사인 것이다.
굳이 팔렘방까지 가지 않아도 오늘날 인도네시아에 중국인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의 2위 은행인 뱅크다나몬의 요셉 아르비안토상무(52)는 8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인도네시아에 터를 잡고 살았다. 혈통은 중국인이지만 중국어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인도네시아 화교의 숫자는 약 6백만명. 전체 인구 2억명의 3%남짓한 숫자다. 이중 대부분이 중국어를 하지 못한다. 한자를 아는 화교는 더욱 찾기 힘들다. 세계 어느 곳에 살더라도 자손대대로 중국어를 고집하는 중국인의 특성과는 맞지 않는 모습이다.
이민역사가 오래된만큼 교류와 혼혈을 거치면서 인도네시아 사회에 동화된 탓이다. 인도네시아 본토인들도 중국인 1세나 인도네시아인의 피가 섞이지 않은 중국인을 「토독」, 동화되거나 혼혈된 중국인을 「퍼라카난」이라고 부른다. 인도네시아 화교들 자신들은 정작 이런 분류조차도 알지 못하지만 대개 퍼라카난에 속한다. 오랜 역사속에서 서서히 동화된 탓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지난 65년부터 「중국」이 의도적으로 배척됐기 때문이다. 지난 9월30일. 인도네시아 언론매체들은 「9·30사건」특집을 방여했다. 9·30사건이란 중국계 장교들이 주동이 돼 일으킨 공산쿠데타.
이 사건으로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 대통령이 물러나고 반란 진압을 지휘했던 수하르토 장군이 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아울러 독립(1945년)이래 계속 되어온 중국인 탄압 정책도 보다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수백개에 이르던 중국인 학교란 학교는 모두 문을 닫았다. 중국어로 된 서적은 발간은 물론 유통도 금지됐다. 중국어로 된 상점 간판조차 내려졌다. 어떤 정치적 활동이나 단체 결성도 허용되지 않았다.
국립대학교에 진학하려는 중국계 학생들에 대해서는 교묘한 할당제가 적용됐다. 수하르토 집권기간에 중국계 장관은 한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최고의 출세로 인정되는 군인이 되는 길은 아예 막혀 있다. 중국인들의 전통종교인 도교와 유교도 종교로 인정되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법적, 제도적 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학살, 약탈, 폭동, 인종차별 등 갖가지 시련을 겪어야 했다. 네덜란드 식민통치 기간중에 장려됐던 중국이민 유입도 봉쇄됐다.
가혹한 차별과 시련속에서도 중국인들은 살아 남았다. 중국인들이 인도네시아를 떠나지 않은 이유는 경제적 기회 때문이다. 수하르토정권의 경제개발 의지, 풍부한 자원, 2억이나 되는 잠재적 구매자가 중국인들의 발을 묶어놓은 것이다. 더욱이 항상 따뜻하고 먹을 것이 풍부한 지역에서 수천년을 살아온 인도네시아인들은 중국인의 장사 상대가 되지 못했다. 「벼는 혼자서 자라고 낮잠을 자도 과일이 익어 입안으로 떨어지는 환경」에서 중국인들은 구멍가게부터 시작해 뿌리를 내렸다. 정부도 경제성장과정에서 중국인들의 역할을 인식하고 상당한 경제적 특혜를 제공했다.
하지만 경제적 혜택이 공짜로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수하르토 정권시절, 중국인들이 인도네시아 전역에 걸쳐 소매점영업 등 유통시장을 장악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하루 아침에 중국인들의 상행위를 금지하고 가게를 인도네시아인들에게 넘겨줬다. 그러자 경제공황이 왔다. 수하르토 정권은 어쩔수 없이 중국인들의 소매점영업을 다시 허용할 밖에 없었다.
결국 총인구의 3%에 불과한 중국인들은 인도네시아 상권의 85%이상을 장악하게 됐다. 인도네시아 정부도 이들의 경제적 기여도를 인정하고 있다. 이들이 소유, 경영하는 기업들은 국영기업과 함께 인도네시아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중국인들이 없다면 인도네시아 경제는 성장도 유지도 불가능한 실정이다.
경제 기여도가 크다고 해서 중국인들이 인도네시아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으며 마음 편하게 사업을 하고 살아온 것은 결코 아니다. 폭동이 일어나는 경우 일차타깃은 중국인이다. 최근 벌어진 일련의 반정부 시위과정에서 불탄 자동차의 태반이 화교소유였다는 점은 인도네시아인들이 마음속으로 중국인들을 질시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완전한 인도네시아인으로 대접도 받지 못하고 중국인으로서의 민족 특성도 온전히 지키지 못한 채 살고 있으면서도 인도네시아 화교들의 경제력은 인도네시아 자체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확대를 거듭하고 있다.
올해 32세인 마달레리씨(중국명 황숙미). 인도네시아 신흥재벌로 부상중인 타타(TATA)그룹의 3남2녀중 막내딸로 종합금융사를 경영중이다. 그는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광동성이 고향인 이민 1세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소매상을 다섯 형제들이 힘을 합쳐 지난해 재벌순위 40위의 그룹으로 일궈냈다는 자긍심이다. 타타그룹은 은행과 종합금융사, 보험, 제조업과 건축업, 호텔 등을 운영하고 있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경제력을 계속확대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화교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형제들은 모두 중국어를 쓰지도 읽지도 말하지도 못한다. 그래도 속내를 터 놓을 수 있는 사업상대는 모두 중국계이다. 인도네시아 화교상인들의 공식적인 모임은 없다. 하지만 화교의 결혼식 등에는 수백명의 하객으로 북적거리는게 보통이다. 사업으로 얽힌 유대관계가 이렇다할 모임을 능가하는 공동체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강화되는 경제력에비해 인도네시아 화교들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2백30여개에 이르는 인도네시아 은행중에 랭킹 2위 은행이자 한국외환은행 현지법인의 제휴선인 뱅크다나몬은행의 요셉 아르비안토 상무는 『인도네시아 당국이 화교들에게 경제적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불만이 없다』고 말했다. 이민 8세인 그 역시 중국어를 전혀 하지 못한다. 모국어라는 공통점도 없는 상태에서 화교간 유대관계가 강하게 유지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 그는 「사업적 이유」 때문이라고 잘라 말한다. 신용을 중시하고 근면하며 저축과 보유 현금이 많다는 공통점만으로도 화교상인간 네트워크가 긴밀할 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바로 이점, 「사업상의 이유」로 인도네시아 화교들은 중화경제권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접근하고 있다. 중국어를 배우려는 젊은 화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름 밝히기를 사양한 화교 2세 사업가는 『중국어를 모르고는 국제적인 그룹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화교사회에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주로 호주나 네덜란드, 영국 등으로 가던 화교 유학생도 최근들어 싱가포르, 대만 등 중국어를 익힐 수 있는 나라들로 향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중국의 거대한 국토와 인적 자원에 동남아 각국 화교의 자본력과 기술력, 각각의 거대시장이 결합하는 중화경제권은 더 이상 가상 시나리오가 아니라 경제적 현실이다. 중요한 점은 중화경제권의 태동요인이 민족적 동질감이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로의 사업상 필요에 의해 결속력이 강화되고 공동의 부도 창출하는 경제적 공동체가 눈앞에 온 것이다.
동일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조상과 문화를 공유하는 경제적 공동체, 중화경제권은 미주와 유럽, 일본을 능가하는 세계최대의 경제공동체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정화의 남해 원정 이래 5백년 만의 쾌속 순항인 셈이다. 정화는 군사력으로 바다를 일시적으로 지배했지만 이들은 경제력으로 아시아는 물론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희망봉 발견으로 촉발된 역사의 동진이 이제는 반대로 서진으로 역전하는 시대 조류가 정정으로 혼탁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도 확인되고 있다.<자카르타=권홍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