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제철소 건설 초기인 지난 1968년 박태준은 제철소도 없는 상태에서 사원주택단지를 만들기 위해 은행 문을 두드렸다. 사람이 열심히 일하려면 주거안정이 필수적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은행들은 담보가 없다고 대출을 거절했고 결국 당시 하진수 한일은행장이 박태준의 열의를 믿고 20억원을 대출해줬다. 포항제철이 주거래 은행으로 포항제철을 선정한 것은 박태준이 한일은행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사업과 정치 외에도 교육ㆍ복지ㆍ스포츠ㆍ사회공헌 등 다방면에서 업적을 남겼다. 촌음을 아껴가며 평생을 바쁘게 살았던 그가 교육과 복지 등 '인간을 위한 일'에도 공헌할 수 있었던 것은 가슴속에 인간존중의 정신을 품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선진적인 직원 복지제도 수립과 함께 박태준의 업적 중 빠질 수 없는 것이 교육이다. 박 명예회장은 1986년에는 포항공대(포스텍)를, 이듬해에는 포항산업과학연구원을 설립하며 한국의 기초과학과 공학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박 명예회장과 포스코의 4년제 대학 설립 계획은 1980년 광양제철소 건설 계획 때부터 구상됐다. 우수한 인재를 육성해 인간과 국가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자는 아이디어였다. 그 결과 포항공대는 1986년 12월 국내 최초의 연구중심 대학을 표방하며 출범해 전원 학비 면제 등 당시 사회분위기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정책을 펼쳐 단기간에 세계적인 대학으로 성장했다.
박 명예회장은 한국 스포츠의 역사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한국의 프로축구가 현재의 모습까지 성장할 수 있도록 주춧돌을 놓은 공은 축구사에 길이 남을 공적이다.
박 명예회장은 1973년 실업축구 포항제철을 창단한 후 1984년 프로팀인 포철 아톰즈로 이를 전환시켜 프로축구가 출범 초기 조기에 정착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에도 포스코는 포항과 전남 구단을 운영하며 축구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홍명보ㆍ황선홍ㆍ이동국 등 포항이 배출한 국가대표 선수만도 52명이다. 이회택ㆍ허정무ㆍ박성화ㆍ최순호 등 명감독들이 포항 또는 전남의 사령탑을 거쳐갔다. 이 밖에 박태준은 1990년 국내 최초의 축구전용구장을 설립하는 등 인프라 구축에도 아낌없이 투자했다.
박 명예회장의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회공헌이다. 그는 제철소를 건설 중이던 1971년 재단법인 제철장학회를 설립해 사원 자녀 학자금 지원과 철강 기술 인력 양성에 주력하며 사회공헌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2005년에는 자신의 호를 딴 포스코청암재단을 세우고 2008년에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현재 포스코청암재단은 2,000억원대 기금을 운영하며 ▦연구지원 ▦과학ㆍ봉사ㆍ교육 등에서 기여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청암상 운영 ▦기초과학 연구자 지원하는 청암과학펠로십 ▦지역사회 장학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
포스코의 한 관계자는 "고 박 명예회장의 이 같은 활동의 근간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었다"면서 "그가 남기고 간 사랑을 포스코가 계승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