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경평(京平) 축구대항전 첫 대회가 열린 1929년 10월8일. 서울 원서동 볼재(공간사옥 자리)에 있는 휘문고보 운동장에는 7,000여명의 구름 관중이 몰렸다. 건물을 포함한 휘문고보의 전체 크기가 2만㎡ 정도니까 운동장 면적은 1만㎡를 넘지 않았을 테고 관중석을 높이는 것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수용인원이 7만여명 가까운 서울 월드컵 상암경기장의 크기가 21만6,712㎡인 것과 비교하면 당시 관중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요, 입추의 여지가 없었던 셈이다. 이렇게 많은 관중이 몰린 것은 이 대회가 단순히 조선 양대 도시의 대항전 성격을 넘어 일제 강점기 민족의 단합을 이루고자 하는 염원도 담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 선수는 사력을 다해 뛰고 관중은 목청껏 응원했지만 정작 이겨야 할 마음속의 적은 일제였다. 독립을 향한 선수와 관중의 열망은 모두가 한목소리로 외치던 '대한독립 만세'로 나타났고 이 때문에 일제 순사에게 끌려가는 일도 많았다.
경평전은 이후 함흥에 축구팀이 창설되자 1938년 경성·평양·함흥 3개 도시 대항전으로 확대됐고 1942년 일제가 구기 종목 경기를 금지할 때까지 매번 명승부를 펼치곤 했다. 경평전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다시 열렸다. 38선이 그어지면서 남북통행이 금지되자 평양 선수들은 경비망을 뚫고 어렵게 내려왔다가 돌아갈 때는 위험한 육로 대신 뱃길을 이용했다. 그들은 이듬해 평양으로 초청하겠다고 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경평전은 그걸로 끝이었다. 이후 2005년 8월14일에 경평전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남북통일축구대회가 서울 상암경기장에서 열려 스탠드를 가득 메운 관중이 한마음으로 '조국통일'을 외치기도 했지만 단발성 행사에 머무르고 말았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18일부터 평양을 방문해 2005년 이후 10년간 막힌 남북 축구 교류를 논의한다고 한다. 부디 논의가 결실을 맺어 남북의 모든 국민이 하나 될 멋진 경평전이 부활하기를 기대한다.
/한기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