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데스크 칼럼/10월 5일] 우리 안의 야만

우현석 <생활산업부장> 지난 1일 국가인권위원회가 이달말까지 인터넷에서 인종과 피부색, 출신국가를 이유로 사람을 멸시, 박해하거나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사진, 댓글 등의 사례를 모니터링 하기로 했다. 인권위는 또 인터넷 상에서 결혼 이주 여성이나, 외국 남성과 결혼한 한국인을 모욕하는 내용, 외국인 노동자를 비하하는 발언 등도 점검키로 했다. 국가기관이 인종차별 수준을 점검하고 인종주의에 대한 모니터링을 시행하기는 이 번이 처음이다. 모니터링은 다문화 사회 진입을 앞둔 한국 사회에서 인종주의와 관련된 실태를 살펴보고 제도적 개선방안을 검토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 같은 제도를 시행하는 것은 아마도 하루가 다르게 다문화 국가로 변모하고 있는 속도를 국민의식이 뒤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지난 9월15일 새벽 전라남도 나주에서, 몽골에서 온 결혼 이주여성이 한국인의 칼에 찔려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베트남에서 온 결혼 이주여성이 입국 8일 만에 남편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있은 지 겨우 두 달여 만에 또 비슷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코리안드림을 안고 온 외국인노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지만 그들 중 일부는 브로커의 사기에 놀아나고, 체불이나 고용주로부터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그 같은 기사나 보도를 볼 때면 정반대의 처지였던 우리의 20여년 전이 떠오른다. 80년대 초 남ㆍ북한이 팽팽한 대치를 하던 시절 기자는 미군들과 같은 기지 안에서 군생활을 했었다. 기지 앞에는 미군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술집이 몰려 있었고, 업소마다 ‘양공주’라 불리는 젊은 여인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는 심심찮게 미군들이 그 여자들을 구타하거나 해코지하는 일들이 일어나 헌병이 출동하곤 했었다. 양공주들 중에는 심심치 않게 미군과 결혼을 해서 미국으로 살러 가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 여자들은 미군과의 결혼을 큰 횡재로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으로 시집을 간 여자들 중 행복하게 사는 이는 극히 드물고, 십중팔구는 결혼했던 미군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고들 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여인들은 그럼에도 미국으로 시집가는 것이 꿈이었다. 미국에 가서 사는 행운을 잡을 수 만 있다면 그들은 양공주라는 자신의 과거를 희망의 땅 미국의 흙 속에 묻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대한 지 25년이나 지난 지금 그 부대와 정문 앞에 진을 쳤던 술집들이 그대로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국으로 시집을 와서 핍박 받는 동남아 여인들에 관한 기사를 볼 때면 25년 전 황량했던 부대 앞의 그 기억들은 엊그제 보았던 풍경 처럼 되살아난다. 그 때 당했던 인권침해와 유린을 지금 우리가 그대로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 이주자와 근로자들을 받아들이게 된 우리가 20여년 전에 당했던 그 일들을 똑 같이 되풀이 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이 현실을 인정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그 동안 국격이 G20회의 같은 국제행사를 유치하거나, 월드컵ㆍ올림픽 등을 치러야만 올라가는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세계 일류의 국격을 가진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국민소득이나 국제행사 유치 같은 외형적 가치 외에도 정신과 사고방식 같은 내적 가치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 국격이 피부색이나 국적에 상관없이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고, 존중할 때 더욱 고상해진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직장이나 조직, 사회 안에서 고향이 같다고 편을 가르고, 동문수학 했다고 밀고 끌어주면서 상대방을 비난하는 우리의 정서를 생각할 때 그 길은 멀고도 험해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시작해야 한다. 오늘 이 순간까지 수 천년간 외세에 시달렸던 우리이기 때문에 더욱 그래야 한다. 어려운 그들에게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만 한다. /hnskwoo@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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