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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오전 서울 강남의 한 호텔 소회의실로 한국철강협회장을 맡은 권오준 포스코 회장과 우유철 현대제철 부회장, 장세욱 동국제강 부회장, 이순형 세아제강 회장 등 철강업계 최고경영자(CEO)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여느 때 같으면 호텔 로비와 복도·회의실 앞에 행사 내용과 주최가 누구인지 알리는 안내판이 있었겠지만 이날은 소수의 협회 회장단만 참석하는 비공개회의였던 만큼 해당 장소에 아무 표시도 없었다.
이 자리는 글로벌 철강재 공급과잉과 저가의 불량 수입재 확산, 국가 간 무역분쟁 확대 등 철강업계가 공동으로 겪고 있는 어려움을 풀기 위한 '라운드테이블 회의'로 권 회장의 제안으로 마련됐다. 4월 첫 모임에 이어 두 번째다. 철강업계 수장들은 30여분간 최근 이슈와 쟁점에 대한 브리핑을 들은 뒤 각 사안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두고 토론을 벌였다. 공식 일정은 1시간이었지만 권 회장과 우 부회장, 장 부회장 등 핵심 인사들은 오찬까지 함께 하며 머리를 맞댔다.
10일 철강업계에 따르면 국내 철강사들은 한국 등 아시아 시장에서는 중국과 러시아에서 생산된 저가 철강재에 밀리고 선진 시장에서는 현지업체들의 반덤핑 제소 등 통상마찰에 치이며 샌드위치 신세다.
철강협회에 따르면 7월 중국 철강재 수입량은 134만7,000톤으로 2008년 9월(156만톤)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중국 내 철강 공급과잉으로 주변국에 대한 밀어내기가 본격화하면서 열연강판 수입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5% 늘었다.
최근에는 위안화까지 절하돼 중국 열연강판 수출가격은 톤당 300달러 안팎의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중국산 철근도 물밀듯이 유입되고 있다. 국내 분양시장이 살아나면서 철근이 품귀 현상을 빚자 덩달아 중국산 수입이 늘어난 것이다. 8월 수입량은 18만8,000톤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76.6% 급증했다. 동남아 시장에서는 루블화 폭락으로 가격 경쟁력이 높아진 러시아 철강재까지 파고들며 경쟁이 심해지고 있다.
미국 철강업계는 한국산 철강재를 막기 위해 열연강판과 냉연강판 등을 반덤핑 제소, 미국 상무부가 조사에 나섰다. 한국은 미국에 가장 많은 강판을 수출하는 나라로 지난해 수출액이 6억7,880만달러에 이른다. 조사 결과에 따라 무역제재가 가해질 가능성도 있다.
이처럼 세계 철강 공급과잉으로 철강시장이 국가 간, 업체 간 전쟁터가 된 상황에서 국내 철강사들은 서로 경쟁하기보다 똘똘 뭉쳐 나라 밖 적들과 맞서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판단에 공조를 강화하고 있다. CEO들은 국내 철강 유통시장 질서 확립을 위해 KS규격이나 원산지표시를 강화하고 정부 차원의 통상 대응을 촉구하는 등 여러 대안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송재빈 철강협회 상근부회장은 "국내 철강업계가 무너지면 자동차나 조선 같은 전방산업 경쟁력까지 떨어지고 일자리도 줄어드는 등 국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며 "이날 논의를 바탕으로 정부와도 충분히 협의해 철강업계 생존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