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고졸이 기업활력 불어넣는다] <2> 금융계에 부는 고졸 채용 바람

내년까지 2,700명 뽑아… 은행 '고졸신화' 다시 쓴다<br>남학생·정규직 선발… 국책은행들이 앞장… 시중은행도 적극 동참<br>대졸과 대등한 업무기회 부여등 일자리 질 개선 병행을

우리은행이 이달 초 서울 회현동 본점에서 개최한 고졸 신입행원 채용박람회에서 여학생들이 채용상담을 받고 있다. /서울경제DB


금융권은 고졸 출신이 만개(滿開)했던 대표적 업종이다. 지난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금융권, 그 중에서도 은행권은 고졸 출신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수도권에서는 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 덕수상고(현 덕수고), 서울여상 등 명문상고 출신 행원들이 대거 은행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부산상고(현 개성고), 마산상고(현 용마고), 군산상고 등 각 지역의 대표적 상고 출신도 주요 보직에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1997년 찾아온 외환위기는 고졸 행원의 명맥을 끊는 계기가 됐다. 모든 은행이 신규 인력 채용에 소극적으로 나서면서 고졸 인력이 가장 먼저 '가지치기'를 당했다. 때마침 학력 인플레이션 및 대졸자들의 은행 취업 선호현상이 맞물리면서 고졸 출신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져갔다. 2000년대 들어 은행의 채용판도가 대졸 중심으로 고착화하면서 영업점에서 고졸 행원을 찾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은행권을 중심으로 고졸채용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각 은행은 고졸채용 규모를 이전보다 확대한 데 이어 고졸 출신 행원의 승진인사도 단행했다. 자연스레 전산업계의 시선은 금융권으로 집중되고 있다. 가장 먼저 고졸채용의 불을 댕긴 은행권에서 고졸신화가 재연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은행권, 고졸채용 열기=3월9일 우리은행 명동 본점에서는 고졸채용 박람회가 열렸다. 전국 각지의 특성화고 학생 500여명이 운집했다. 열기는 뜨거웠다. 설치된 부스마다 학생 5~6명이 몰려 선배 행원들에게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특성화고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은행의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국내 18개 은행들이 올해부터 오는 2013년까지 2년간 채용할 고졸 인력은 약 2,700여명. 향후 2년간 은행권이 채용할 전체 인원의 12% 수준이다. 물론 은행이 이전에 고졸 행원을 전혀 뽑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채용규모를 확대하는 것이다.

은행들이 갑자기 고졸채용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은행들의 집단행동은 자발적이라기보다 정부의 고졸채용 확대 노력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고졸채용에 가장 적극적인 곳이 기업은행ㆍ산업은행 등 정부의 입김이 작용하는 국책은행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이명박 대통령까지 고졸 행원을 격려하기 위해 국책은행을 찾는 상황에서 이를 외면할 은행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학생도 뽑고 정규직도 선발한다=최근 은행권의 고졸채용은 ▦채용인원 확대 ▦특성화고 남학생 채용 ▦정규직 채용 등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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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7명을 채용하며 고졸채용의 물꼬를 튼 기업은행은 올해 163명으로 채용규모를 확대했다. 특히 기업은행은 고졸취업 사각지대에 있던 남학생 30명을 선발하는 신선한 실험을 실시했다.

산업은행은 더 적극적이다. 산업은행은 지난달 24일 3개월의 연수를 마친 고졸 신입행원 48명을 전국 영업장 현장에 배치했다. 여기에는 남자 졸업생 5명도 포함됐다. 산업은행은 한술 더 떠 하반기 채용예정인 50명의 고졸 신입행원 전부를 정규직으로 선발하기로 했다.

산업은행의 한 관계자는 "당초 고졸채용에 대한 우려가 많았지만 업무평가는 대졸 행원들과 비교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며 "고졸채용은 즉흥적인 이벤트가 아닌 능력 위주로 행원을 평가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책은행 중심으로 나타난 고졸채용 움직임에 시중은행들도 동참하고 있다. 우리은행이 특히 적극적이다. 지난해 85명의 고졸인력을 채용한 우리은행은 올해 두 배가 넘는 200명을 선발하는데 이 중 40명은 남학생이다.

◇진정한 고졸신화 재연하려면=전문가들은 지난 15년간 명맥이 끊겼던 은행권 고졸인력의 존재가치를 높이려면 얼마나 많은 인원을 뽑느냐가 아니라 그들에게 어떤 기회를 줄 수 있는가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고용의 질'을 되짚어봐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대다수 은행들이 채용하는 고졸인력들은 2년 계약직이다. 그렇기 때문에 취업 초기에는 고용 불안정을 겪을 수밖에 없다. 성과 등에 따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더라도 고용은 보장되지만 일반 대졸행원들과 비교할 때 임금이나 승진체계 등에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역할도 문제다. 대다수 고졸인력은 입행 후 창구 텔러, 콜센터 상담직 등에 배치된다. 고졸인력의 역할이 단순업무에 국한되면서 역량을 발휘할 기회 자체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은행권의 고졸채용 노력에 질적 변화가 수반되지 않으면 '고졸행원은 창구직원, 대졸행원은 정규직"이라는 이중구조가 고착될 수도 있다.

시중은행의 한 고위관계자는 "고졸신화가 재연되려면 고졸자를 선발한 후 직장 내에서 일도 배우고 경력도 만들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며 "이 같은 일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고졸채용은 변죽만 울리는 꼴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해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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