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9년 4월19일, 독일 서남부 슈파이어. 제국의회에 참석한 루터파 영주 6명과 14개 자유시 대표들이 머리를 맞댔다. 3년 전 열렸던 슈파이어 1차 제국의회에서 어렵게 얻어낸 신앙의 자유가 위협받았기 때문이다. 루터파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원인은 유럽의 정세 덕분.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세를 업고 1519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뽑힌 카를 5세는 루터파를 포용할 마음이 전혀 없었으나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의 전쟁, 오스만투르크의 위협을 의식해 관용적 종교정책을 펼쳤다. 등 뒤의 적을 만들지 않으려는 카를 5세의 계산은 이탈리아를 둘러싼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뒤 '내부의 이단부터 처단하자'는 결심으로 바뀌었다. 카를 5세는 1529년 3월 소집된 슈파이어 2차 제국의회에 대리인을 내보내 루터파 제후들에게 가톨릭으로의 복귀를 강요했다. 루터파 제후들은 똘똘 뭉쳐 약속 불이행에 대한 항의 서한(protestation von Speyer)을 들이밀었다. 루터파 교도들이 이때 얻었던 별명인 '프로테스탄트(Protestantㆍ항의하는 자)'는 시간이 흐르며 신교도 전체를 통칭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항의 서한을 받은 카를 5세는 군대를 동원하고 싶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오스만투르크의 군대가 빈을 향해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봉합된 갈등은 17세기 초반 30년 종교전쟁으로 터졌지만 16세기 국제역학 관계를 이용해 힘을 기른 신교는 자본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막스 베버는 명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4년)'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윤리에 근거한 근검절약이 합리적 정신과 근대 자본주의 발전으로 이어졌다'고 설파했다. 정말 그랬을까. 분란을 확대재생산하는 이 땅의 종교와 많이 달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