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흔들리는 한국의 캐시카우](2부-4) 마지막 열쇠는 투자와 지원

日 정부·재계 손잡고 호시탐탐 "한국 견제"<BR>日정부참여 행사에 기술유출 우려 "삼성 오지말라"<BR>설비투자도 日 두자릿수 증가 불구 한국은 '제자리'<BR>국내업계 R&D 투자는 지속적 늘려 "그나마 다행"


지난해 3월 삼성전자에 일본 반도체장비협회의 공문 한 장이 날아들었다. 일본에서 열리는 공식 회의에 참석하지 말아달라는 일방적인 통보였다. 협회 측은 일본 정부가 관련 프로젝트에 예산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참가했기 때문에 외국 기업인 삼성전자는 불참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외국 기업 중 유일하게 8년 이상 정식 회원사로 참가했지만 협회 측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차세대 디스플레이 개발사업인 ‘퓨처 비전’ 프로젝트에서도 외국계 기업들은 모두 배제됐다. 심지어 삼성전자와 합작회사를 설립한 소니도 업계에서 제기한 기술유출 우려 때문에 불참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의 반도체ㆍ디스플레이 업계는 최근 외국계, 특히 한국 기업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 한국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기술력을 발판으로 반격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전자기업들은 최근 몇 년간 반도체ㆍ디스플레이 분야에서 한국 기업에 세계 시장 선두 자리를 내줬지만 기술경쟁력은 여전히 세계 시장에서 인정 받고 있다. 그런 일본이 철저하게 외국 기업들은 배제한 채 반격을 위한 칼날을 갈고 있는 것이다. ◇뛰는 일본, 걷는 한국=지난해 일본 전자업계의 설비투자 증가율은 18.7%로 지난 89년 이후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올해도 이 같은 설비투자 증가는 지속될 전망이다. 마쓰시타는 연간 1,000만대의 PDP TV 생산체제를 갖추기 위해 추가로 2,800억엔을 투입하기로 했으며 샤프도 설비 증강에 2,000억엔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대규모 투자로 체력을 회복한 후 ‘전자산업 맹주’의 위상을 되찾겠다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반면 최근 몇 년간 이미 대규모 투자를 집행한 국내 기업들은 무리한 설비투자보다 변화하는 시장상황에 맞는 적절한 투자전략으로 선회했다. 실제 삼성전자ㆍLG전자 등 주요 전자기업들은 대부분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의 투자계획을 세워놓았다. 또한 LG필립스LCDㆍ삼성SDI 등 패널 업체 역시 대규모 차세대 설비투자를 보류한 채 시장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가격하락으로 수익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규모 투자는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권영수 LG필립스LCD 사장은 최근 “투자가 빠르다고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라며 “이제는 적절한 시점에 합리적인 투자를 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문제는 반도체ㆍ디스플레이 산업이 대량생산 체제를 통해 가격경쟁력과 시장점유율을 동시에 확보하는 장치산업이기 때문에 설비투자가 부진하면 차세대 시장을 선도하기 어렵다는 것. 국내 PDP 업계의 연이은 투자보류가 세계 1등 전략 포기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술력 확보가 관건=기술력이 경쟁력을 판가름하는 전자산업에서 기술력 확보는 생존의 문제다. 국내 기업들이 설비투자는 제자리걸음이지만 연구개발 투자를 지속적으로 늘리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석박사 800명가량을 포함해 총 1만여명의 반도체 연구인력을 확보하고 기흥과 화성에 총 6개의 연구라인을 운영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난해 9월 세계 최초로 CTF(Charge Trap Flash) 기술을 상용화, 40나노 시대를 열었다.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는 구부릴 수 있는 플렉시블 LCD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이미 14.3인치 플렉시블 LCD를 개발한 삼성전자는 2~3년 내에 상용화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한 삼성SDI는 올 상반기 중 ‘꿈의 디스플레이’라 불리는 OLED 양산체제를 갖추고 본격적으로 생산을 개시할 예정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부문에서 일본의 기술 경쟁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국내 기업들도 그동안 축적된 노하우로 그에 못지 않은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다”며 “특히 국내 기업들은 양산기술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가진 만큼 상용화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전했다. ◇혁신 또 혁신하라=전자산업은 첨단산업이면서 전통적인 제조업의 성격을 갖고 있다. 기술개발뿐 아니라 원가절감을 통한 가격경쟁력 확보가 필수적이다. 국내 업계는 이를 위해 부품업체와의 협력체제를 강화하고 공정 혁신을 통한 원가절감에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는 중국 부품업체와의 가격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협력업체와 공동으로 개선과제를 선정, 공정개선을 추진하고 있으며 삼성SDI는 패널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신공정을 개발해 신규 설립 라인에 적용하고 있다. LG필립스LCD는 시장흐름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부품 및 납품업체와 제휴, 해외 생산시설을 확대했다. 특히 오는 2011년까지 총 4억2,900만유로가 투입돼 연간 1,100만대의 LCD를 생산하게 될 폴란드 공장의 경우 일본 도시바로부터 지분 19.9%를 유치해 안정적인 공급처까지 확보해놓았다. 최근 조직개편을 단행한 남용 LG전자 부회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리더는 구성원이 하는 일 중 낭비요인을 찾아내 제거하고 이를 통해 창출된 에너지를 핵심 업무에 투입해 더 높은 성과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혁신을 통한 체질개선만이 침체에 빠진 LG전자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 같은 내부 성찰은 글로벌 무대에서 사활을 건 승부를 벌이는 모든 기업들의 숙명이기도 하다.
정부 '적극적 개혁'…기업은 '필사적 혁신'
'잃어버린 10년' 아닌 '이노베이션 10년'으로
■ 일본의 부활에서 배운다

지난 2005년 기타오카 도시아키라는 경영 컨설턴트가 쓴 '세계 최강기업 삼성이 두렵다'라는 책을 본 한국의 언론과 기업은 삼성의 성공에 초점을 맞췄다. 책의 70%가 삼성 예찬론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일본 언론과 기업인들은 정작 이 책의 30%인 일본의 자아비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걸음마부터 가르친 삼성이 반도체ㆍ휴대폰ㆍLCD 등 일본의 텃밭에서 일본을 따돌리고 있는 이유가 뭔지 곱씹어봐야 한다고 주장하며 '삼성 위협론'을 급기야 '삼성 타도론'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삼성에 대한 일본의 견제는 기업만의 몫이 아니었다. 각종 규제개혁은 물론 정부가 직접 나서 핵심 기술과 인력이 한국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법적 규제를 강화하고 적극적인 특허소송으로 한국 업체들을 '포위'하도록 업계를 지도하고 있다. '히노마루(일장기) 반도체'의 패자 부활전에 정부와 재계가 스크럼을 짜고 달려든다. 삼성이 두렵다고 엄살을 피우면서도 시퍼렇게 날이 선 사무라이의 혼네(속내)로 국내 기업들을 압박하는 셈이다.

부활하는 일본 경제의 원동력은 뭘까. 최지성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은 일본의 부활이 철저하게 '준비된 반격'이라고 말한다.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반격을 위해 정치ㆍ경제ㆍ사회구조를 수술대에 올려놓고 하나하나 고쳐왔다는 것이다.

최 사장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우리 입장에서) 이쁘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추진한 개혁으로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극복하게 됐다"고 말했다.

일본 경제의 개혁에 '혁명'은 없었다. 특기인 '가이젠(改善·점진적 개선)'을 통해 점진적으로 혁신을 이뤄냈다. 기업은 '3중고(과잉 고용ㆍ설비ㆍ부채)'를 털어냈고 금융 구조조정과 고용 유연화, 경쟁원리 도입 등의 과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했다. 일본의 전통이었던 종신고용, 파벌에 입각한 정치적 리더십, 관료의 보수성 등을 하나씩 해결했다. 일본이 일본을 버린 셈이다.

미래 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R&D)에도 집중했다. 파탄지경이었다는 90년에도 일본의 R&D 지출 비중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시마다 하루오 게이오대학 교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 경제의 부활은 정부의 조용하지만 적극적인 개혁과 기업들의 필사적인 이노베이션(혁신)의 합작품"이라며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이노베이션의 10년'으로 불러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몰래 한 혁명(stealthy revolution)'이라는 일본의 부활을 바라보며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하이닉스반도체의 공장 증설이 겹쳐진다. 기업 투자가 일자리 창출과 경쟁력 강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라면, 일자리 창출은 이미 물 건너갔다며 경쟁력 강화라는 결실이라도 보기 위해 중국 이전을 찬성해야 한다는 어이없는 주장도 나오는 현실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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