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아르헨티나가 스페인계 석유회사인 렉솔의 자회사 YPF에 대한 국유화를 강행한 지 불과 2주 만에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은 군 병력을 투입해 스페인계 자회사인 볼리비아 최대 전력공급회사 트란스포르타도라 데 엘렉트리시다드(TDE)를 점거하고 국유화를 선언했다.
강경 좌파 정권이 집권한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뿐 아니라 중도좌파 정권인 아르헨티나까지 가세한 남미 지역의 자원 국유화는 이 지역의 민족주의 정서와 맞물려 국제사회에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다.
◇급진적 포퓰리즘이 촉발한 국유화 '도미노'=21세기 들어 남미에 들어선 급진적 좌파 정권들이 정부의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민족주의와 풍부한 자원을 연결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남미 정권들이 국민을 단합시키고 정부의 지지기반을 얻기 위해 민족주의를 앞세우고 있는데 그 현실적 방법이 자원과 기업 등의 국유화로 나타나고 있다"며 "남미의 자원 민족주의는 포퓰리즘과 맞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남미에서 기세를 떨치는 급진적 포퓰리즘의 중심에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있다. 1999년 집권한 차베스 대통령은 쿠바식 사회주의 모델을 추종하며 통신, 석유산업, 금광업 등 자원 국유화에 앞장서는 한편으로, 세계 5위 원유 생산국에서 넘쳐나는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남미 좌파 연대를 확대하고 있다.
차베스의 노선은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정권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제2의 체 게바라'로 불리며 2006년 집권한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은 자원 국유화를 통한 부의 재분배를 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내세우고 취임 첫 해부터 천연가스와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고 나섰다. 이는 앞서 차베스가 추진한 베네수엘라 유전 국유화 등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남미의 집권 좌파가 자원 국유화 같은 사회주의 정책으로 토착 원주민과 서민, 빈민층의 지지를 확보하며 집권을 장기화하자, 서방 세계에서는 남미의 좌파정권이 대중영합정치를 펼치며 급진성향의 포퓰리즘 노선을 택하고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볼리비아·에콰도르·베네수엘라처럼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 또는 과거 부강했던 아르헨티나 등 남미 국가들 사이에서 급진적 포퓰리즘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며 "국제 투자가들은 남미에서 국유화 조치가 더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다국적 기업에 대한 반감도 국유화에 힘 실어= 다국적 기업에 대한 국민 반감도 국유화 정책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WSJ은 아르헨티나의 YPF 국유화에 대해 "렙솔-YPF에 대해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며 "다국적 기업의 횡포에 대해 국민 정서가 악화될 대로 악화됐다"고 언급했다.
아르헨티나 최대 석유회사인 YPF가 1999년 스페인의 렙솔로 넘어간 이후 아르헨티나 에너지 가격은 크게 오르며 서민 경제를 압박했다. 당시 아르헨티나정부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페소를 달러화와 1대1로 연동시키는 태환법 체제를 도입, 이 때문에 렙솔은 상당한 수익을 올리며 남미 굴지의 메이저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렙솔은 아르헨티나의 자원 탐사 분야에 투자는 거의 하지 않은 채 기존의 확인 매장량을 소진하는데 주력해 아르헨티나 정부와 갈등을 빚었다.
여기에 생산비가 싼 볼리비아 가스 생산량을 늘려 아르헨티나에서 비싸게 판매하고, 국유화 발표 전 YPF의 지분을 중국의 시노펙에 매각하려고 하는 등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서방 세계가 경악한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YPF 국유화 조치에 대해 아르헨티나 국민 60% 이상이 지지를 보내고 있어 렙솔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컸음을 보여주고 있다.
◇통상관계 악화 속 급진좌파 쇠퇴로 국유화 제동 가능성도=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의 잇단 국유화 조치로 서방 세계의 경계감이 고조되면서 남미 국가들과 서방 국가들간 통상관계 악화가 예고되고 있다.
국유화의 직격타를 입은 스페인은 유럽연합(EU)와 남미 경제공동체 메르코수르(MERCOSUR) 사이에 진행 중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아르헨티나를 제외할 것을 우루과이 등에 요구했다. 스페인은 나아가 아르헨티나 국영에너지회사 에나르사(Enarsa)와 체결한 액화천연가스(LNG) 공급 계약도 파기하기로 했다. 이 밖에 아르헨티나 석유개발을 추진하려는 기업들에게 서한을 보내 "아르헨 정부와 협력하면 제소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급진좌파의 쇠퇴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국유화 등 정책노선의 변화에 대한 전망도 제기되고 있다. 남미 급진좌파의 수장 차베스 대통령의 건강 악화설이 설득력을 얻자 국제시세보다 훨씬 싼 가격에 베네수엘라 석유를 공급받고 있는 급진 좌파 국가들의 정책 노선도 변화가 불가피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 경우 좌파 동맹이 와해될 수 있어 에너지 및 사회기반 시설의 국유화 작업에도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