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서강신선이 노닐다 간 '천혜의 절경'
동강(東江)은 살았다. 영월댐 건설은 없었던 일이 됐다. 이제는 서강(西江)이 문제이다.
영월군은 서강의 지류인 덕상천이 지나는 인근에 대규모 쓰레기 처리장 건설을 계획 중이다.
지역주민의 반대로 아직 측량조차 못하고 있지만 뜻을 굽힐 것 같지는 않다. 지켜지지 않을지도 모를 서강의 맑음과 아름다움을 돌아본다.
우리 역사상 가장 불운하고 원통한 삶을 산 군왕을 꼽으라면 단연 단종이다.
17세의 나이에 다른 사람도 아닌 삼촌(세조)에 의해 ‘제거’됐다. 역설적이지만, 그러나 죽어서 가장 행복한 군왕이 있다면 또한 단종일 듯하다.
그가 누워 있는 영월의 장릉과 마지막 생을 보냈던 청령포는 매년 수십만명의 참배객으로 북적댄다.
KBS드라마 「왕과 비」에서 단종의 시해장면이 방영된 후 참배객은 늘고 있다. 그들은 그의 허무한 생을 가여워하고, 권력의 무자비함에 분노한다.
청령포는 그 역설의 드라마를 닮았다. 칼처럼 서슬 퍼런 강물이 앞으로 흐르고, 옆과 뒤는 천길 낭떠러지이다.
움치고 뛸 수 없는 지형 때문에 사람의 손때를 타지 않았다. 그래서 비극의 유배지가 됐다. 청령포를 초생달처럼 감아도는 강은 서강(西江)이다.
동강(東江)이 영월의 동쪽 땅을 훑고 내려간다면 서강은 영월의 서쪽 언덕을 안고 흐른다. 두 강은 영월 남쪽에서 만나 남한강이 된다.
서강의 아름다움은 동강 못지 않다. 강원도 땅을 흐르는 물길 답게 구절양장으로 굽이치며 곳곳에 절경을 만들었다.
1급수의 물에 수달, 비오리, 어름치가 뛰노는 건강한 생태계를 간직하고 있다. 강을 따라 잘 포장된 도로가 상류까지 이어진다. 영월을 스쳐 가다보면 몸도 마음도 푸른 물 빛에 젖는다.
서강 여행의 시작은 주천강이다. 주천강은 평창군 태기산에서 발원해 무공해 청정지역만을 골라서 흐른다.
주천강의 아름다움을 대표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은 수주면의 요선암. 수백평에 이르는 너럭바위 군락이다.
물에 씻겨 반짝반짝 빛나는 하얀 화강암들이 강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넓은 것은 장정 20여명이 앉아도 남을 정도. 깊게 패인 골마다 강물이 고여 천연욕조가 됐다.
조선중기 평창과 강릉부사를 지낸 명필 봉래 양사언이 큰 바위에 ‘邀仙岩(요선암)’이라고 글을 새겼다. 그것이 그대로 이름이 됐다.
새벽 안개를 머금은 요선암에선 정말로 신선을 만날 수 있을 듯하다.
요선암 옆의 절벽 위에는 요선정이 있다. 원래 암자가 있었던 자리에 정자를 지었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는 마애석불(석가여래좌상)과 5층 석탑이 불교도량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타원형의 돌에 새겨진 마애석불의 미소는 지금도 은근하다.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면 돌과 물이 빚어낸 천하의 절경을 만난다. 선돌이다. 영월읍으로 들어가는 소나기재 중턱에 있다. 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간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50여㎙ 오솔길을 걸어 들어가면 거대한 두 개의 바위가 나타난다. 한 개의 바위를 전기톱 같은 것으로 정교하게 자른 모습이다.
바위 사이로 크게 굽이치는 서강이 내려다 보인다. 강물은 물론 모래톱까지 햇빛을 받아내 반짝거린다. 선돌에 직접 내려갈 수는 없고 전망대에서 보아야 한다.
단종은 이 곳에서 유배지가 가까와졌음을 알았다. 단종은 한동안 넋을 놓고 쉬었다 갔다.
서강 최하류 청령포. 청령포는 지금 싱그럽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은 그 향기가 더욱 깊고, 양쪽 절벽의 바위들이 일궈낸 나무 끝의 이파리들은 어느 새 짙은 색으로 갈아입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그가 비록 왕이었더라도…. 그러나 강물은 죽어서도 침묵하지 않는다.
권오현KOH@HK.CO.KR
입력시간 2000/06/08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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